[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서스펜스 소설의 거장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을 각색한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정식 김휘 감독, 2017)은 오랜만에 한국 영화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웰메이드 서스펜스 스릴러이다. 특히 2개의 시공간을 교차 편집해 마치 ‘사건 속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듯한 병치적 장치는 관객의 지적인 호기심을 한껏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는 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비교가 될 듯하다.

1945년 경성. 클럽에서 마술사로 일하는 압둘라 리(고수)는 찻집에 앉아 있다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온 미모의 처녀가 “1원만 빌려 달라.”라고 부탁하자 두말없이 건네 준다. 어디선가 2개의 큰 가방을 들고 무작정 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온 그녀는 택시비가 모자라 가방을 빼앗길 처지였던 것.

그러나 택시 기사는 그 돈으로 부족하다며 가방을 내놓을 생각을 안 한다. 리는 100원을 더 내놓고 그녀를 구한다. 그녀의 이름은 하연(임화영). 오갈 데 없는 하연을 리는 일단 자신의 숙소에 묵게 한 뒤 클럽 사장에게 그녀를 종업원으로 취업시켜 달라고 부탁한다.

사장은 하연의 미모를 장사에 이용할 요량으로 춤을 가르친 뒤 리와 함께 무대에서 댄서로서 공연하게 만든다.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입소문도 좋게 나 부산 공연 제안을 받고 클럽에서 독립해 부산으로 간다.

그런데 리에게 ‘동판’을 달라는 쪽지 하나가 날아온다. 우연히 호텔 침대 밑에서 하연의 가방을 발견한 리는 그 속에서 100원짜리 위조지폐 제조용 동판을 발견하고 하연을 추궁한다. 하연은 동판 기술자인 삼촌과 살았는데 한 정체불명의 일본인이 삼촌에게 동판 제조를 부탁한 뒤 삼촌을 죽였고, 자신은 그 동판을 들고 도망 중이라는 사연을 털어놓는다.

1948년 서울의 법정. 1년 전 호화 석조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놓고 검사 송태석(박성웅)과 변호사 윤영환(문성근)의 공방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갑부 남도진(김주혁)이 자신의 집에서 운전기사 최승만(고수)을 죽인 뒤 그를 보일러에 태워 증거를 감춘 혐의로 잡혀 있다.

그러나 목격자가 없고, 결정적인 증거인 사체가 없다. 다만 집안 곳곳에서 A형 혈액형의 혈흔이 발견됐고, 역시 같은 혈액형의 오른손 검지 일부만 찾았을 뿐 승만의 시체는 온데간데없다. 상황은 증거 불충분으로 도진이 풀려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과연 승만의 시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도진이 승만을 죽이기는 한 것일까? 도진은 어떻게 큰돈을 모았을까? 리는 왜 갑자기 승만이 됐고, 도진의 승용차 운전기사가 됐을까? 도진의 정체는? 그리고 하연의 정체는?

과거와 현재를 교묘하게 시퀀스대로 잘라 붙이는 편집으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돌아가는 추리적 내러티브를 펼치는 솜씨가 절묘하다. 현악 앙상블의 치찰음으로 초반부터 관객들을 서스펜스로 몰아가는 음향 효과는 분위기와 비주얼을 누아르 스타일로 몰아간다.

러닝타임의 절반 가까이 도진의 존재를 숨기고 아예 배우가 누구인지조차 잊게 만드는 ‘밀당’ 솜씨도 뛰어나다. 원작이 훌륭한 덕도 있지만 김휘 감독의 각색과 연출 능력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대결 구도는 김주혁 대 고수, 박성웅 대 문성근이다. 도진은 명석한 두뇌에 지적인 능력과 외적인 매력까지 모두 갖춰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인물이지만 정작 피와 가슴이 차갑다. 사랑이란 위조지폐만큼도 못하다는 가치관을 갖고 오로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부를 축적해 자신만의 만족감을 즐기는 게 인생관이다.

두 인물을 ‘연기 속의 연기’로 풀어낸 고수의 투혼도 스크린 곳곳에서 물씬 풍겨 나온다. 지금까지 고수는 ‘고비드’란 별명답게 화면 속의 미장센 역할에 그쳤다면 이젠 캐릭터를 표현할 줄 안다. 다만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 망가진 승만에 쉽게 녹아들지 못하는 게 옥에 티. 특수 분장이 아쉽다.

문성근과 박성웅의 제 역할은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다. 플롯의 주인공이 고수와 김주혁이라면 주요 시퀀스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문성근과 박성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짧은 시간이지만 확실한 임팩트를 준다.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이지만 분명한 철학과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도 이 영화의 강점이다.

먼저 사랑이다. 리(혹은 승만)는 사람을 속이는 마술이 주업이지만 사랑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순수하고 맹목적이다. 그는 “보이는 것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게 내 능력이다.”라고 자랑하지만 하연에게만큼은 보이는 것을 감추려 하지 않고, 안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꾸미려 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 줄 수 없는 가슴은 확실하게 열어젖힌다.

그는 때로는 하연의 사랑을 의심한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사랑을 믿는다. 그건 하연이 자신을 사랑했다고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연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것에 대한 신뢰이고, 그래서 그걸 추억과 행복으로 갈무리한다.

각색 과정에서 시대를 일제 강점기 끝과 해방 뒤의 어수선한 시국이던 때로 잡은 이유는 분명하다. 민족정신을 내팽개치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에 눈먼 부자와 친일 부역의 반민족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해방 뒤 예전의 상류층 지위를 그대로 유지한 채 호의호식하는 기득권층에 대한 ‘반민특위’이다. 당시의 풍광을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고 특히 고수와 김주혁의 패션 대결이 매우 큰 보너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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