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컬처] 십자군 전쟁의 내막은? [유진모 칼럼] '세시봉' 스틸.
[히스토리&컬처] 십자군 전쟁의 내막은? [유진모 칼럼] '세시봉' 스틸.

[미디어파인=유진모 칼럼니스트] 7월 15일. 1606년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 1916년(~1998) 가수 김정구, 1940년 배우 김지미, 1948년 가수 김세환, 1961년 미국 배우 포레스트 휘태커, 1970년 개그우먼 장미화, 1980년 전 야구 선수 봉중근, 1982년 야구 선수 오승환, 1986년 포레스텔라 배두훈, 1988년 일본 배우 후지이 미나, 1994년 엔플라잉 김재현, 1998년 우주소녀 성소, 2004년 라필루스 베시 등이 태어났다.

1274년 이탈리아 추기경 보나벤투라, 1857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카를 체르니, 1904년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 등이 세상을 떠났다.

1099년 1차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1968년 국내 중학교 입학 시험이 사라졌다. 1982년 서울 종합운동장 야구장이 개장되었다. 2004년 연쇄 살인범 유영철이 검거되었다. 2012년 '강남스타일'이 실린 싸이의 '싸이6甲 PART1'이 발표되었다.

김정구는 대한민국 대중문화계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의 최대의 히트곡 '눈물 젖은 두만강' 때문이다. 함경남도 원산의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어릴 때부터 찬송가로 노래 실력을 뽐냈다. 1936년 형인 김용환의 레코드사를 찾아 서울로 가서 '삼번통 아가씨'로 데뷔하는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1939년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드디어 성공을 맛본다. 하지만 1943년 조선총독부가 이 곡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음반 판매 금지를 명령해 1937년 발표한 '왕서방 연서'가 그의 대표곡이 된다. 해방 후 1963년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고, 1964년 KBS 라디오 '김삿갓 북한방랑기'의 주제곡으로 채택되면서 이른바 인기가 역주행하게 된다.

김정구와 함께 당시를 풍미한 가수로 '신라의 달밤'의 현인, '선창'의 고운봉이 있다. 김정구는 1998년 미국 LA에서 아들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은 물론 할리우드의 역사물, 액션물, SF,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이다. 유럽과 중동은 최소한 4000년 이전부터 다퉈 왔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립 이후 더욱 치열해졌다.

7세기 초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고 본격적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전까지 동유럽과 소아시는 기독교 세력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633년부터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아프리카 북부, 심지어 8세기 초 스페인까지 이슬람 세력에 정복되자 유럽은 위기 의식 및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겉으로는 1095년 동로마 제국의 알레시오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동방의 위험성을 알리며 도움을 청한 데서 시작된다. 예수의 무덤을 되찾고, 동방의 그리스도교인들을 구하기 위해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8차례 출정해 이뤄진 게 십자군 전쟁이다.

그런데 그 내막은 사실 그렇게 간단하거나 신성하지 않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지만 서로 매우 배타적이다. 기독교의 근원이 되는 유대교 역시 이 두 종교와 앙숙이다.

당시 유럽은 봉건 제도에 의해 생활이 비교적 안정적인 편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에 다녀오는 것이 유행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주인인 셀주크 투르크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가 없었다.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유럽에서는 이 기회에 함을 합쳐 아예 탈환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사실상 봉건 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영토를 넓힐 욕망에 불타올랐고, 상인들은 보다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했으며, 하급 농민들은 귀족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 각자의 욕구가 예루살렘 정복이라는 테제와 맞아떨어진 것.

따라서 신성한 종교적 행위라기보다는 각종 욕심이 신앙적 광기와 결합해 전쟁을 부추겼다고 보면 쉽겠다. 그런 광기는 적지 않은 영화 속에서도 묘사되고는 한다. 전쟁에 참가한 유럽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한 이유로 십자군 전쟁으로 불린다.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무려 20명을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한 희대의 연쇄 살인마이다. 그의 범행 중 하나가 2003년 10월 1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2층 단독 주택에 침입해 최모(70) 씨의 부인 유모(69) 씨를 살해한 것.

사건 후 이 집의 가격은 폭락했고, 연에 기획사 대표 김모 씨가 헐값에 구매해 3층으로 리모델링한 뒤 투자를 받아 기획사 더컨텐츠의 사무실로 사용한다. 바로 여기가 고 장자연이 주장한 사건의 현장이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1층은 바, 2층은 사무실, 3층은 주거 공간이었다. 밤에 1층의 바에서 술 접대가 이루어지고, 이후 3층에서 매우 은밀한 접대가 이루어졌다는 게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주장한 내용이었다. 사건은 잊혔고,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김 씨는 이 건물을 매도해 시세 차익을 남기고 연예계에서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김세환은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과 함께 1970년대를 풍미한 포크 계열 가수이다. 그래서 그를 '세시봉 가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작 그는 세시봉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다. 세시봉은 당시 가요계의 유행을 주도한 가수들을 배출한 명동의 음악 살롱이다.

그런 오해가 발생한 이유는 김세환의 히트곡이 '사랑하는 마음'(이장희 작곡), '길가에 앉아서'(윤형주 작곡), '좋은 걸 어떡해'(이장희 곡) 등 세시봉 가수들이 작곡해 줬고, 그래서 그들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세시봉을 소재로 한 영화 '세시봉'(김현석 감독, 2015)을 한 번 감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체르니는 베토벤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 피아노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바이엘 다음에 배우는 체르니 100, 체르니 30, 체르니 40. 체르니 50를 만든 주인공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