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를 통해 본 자유라는 빅 브라더 [이상원 칼럼]
1984를 통해 본 자유라는 빅 브라더 [이상원 칼럼]

[미디어파인 칼럼 = 이상원 기자] <1984>는 조지오웰의 소설로 1948년 당시 기준에서 미래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 20세기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평가받는 <1984>는 빅 브라더에 의해 지배받는 전제주의의 끔찍한 모습을 그린다. 주인공인 윈스턴은 전제주의의 지배에 저항하려 하지만 주변 인물인 오브라이언의 배신으로 인해 당에 잡혀가고 고문을 당한다. 결국 윈스턴은 빅 브라더에게 매우 충성스러운 인물이 된다.

우연하게도 우리는 작중 연도인 1984년 전후에 비슷한 일을 겪었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자유 및 선거권을 찾기 위한 운동들은 윈스턴의 저항처럼 보인다. 1980년대에는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을 통해 국민의 자유를 되찾았다. 어찌 보면 소설보다 더 결말이 괜찮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이에 굴복했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체주의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보이는 형태의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졌고 현재 우리는 투표권을 통한 민주주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우리 일상생활에 보이지 않는 빅브라더가 남아있는 것 같다.

자유라는 빅 브라더
현대에는 많은 자유가 있다.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 등 개인이 원하고 싶은 자유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심지어 내가 가진 성별과 다른 생각을 가졌고, 사상적으로 반대의 성별로 살아가겠다 하더라도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 그것을 지원해 주고 오히려 장려하기까지 한다. 현대에는 지나친 자유가 오히려 그것을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사람까지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익명성 뒤에 숨어 연예인에 대해 욕설한다고 해보자. 이런 행동은 개인의 정신에 타격을 주고 나아가 일상생활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현대는 이를 표현의 자유라는 장막 속에 가두고 있다. 심지어 일부는 연예인에게 그 정도는 인기를 얻으려면 당연히 견뎌야 할 책임이라고 말한다. 이런 행동이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또 우리는 극단적인 사상의 자유 속에 갇혀있다. 과거, 인종으로 인해 차별받은 많은 사람이 있다. 또 성별로 인해 차별받은 많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요즘 미디어를 비롯한 세상은 뭔가 필자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게 돌아간다. 예를 들어 최근 논란이 되었던 인어공주 실사화 캐스팅에 대해 살펴보자. 인어공주는 누구나 아는 것처럼 백인이다. 그리고 실사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상상 속 이미지와 비슷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이는 흑인을 차별해서도 아니고, 백인이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도 아닌 단순히 백인이 인어공주가 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직관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인종의 자유라는 명목하에 인어공주 실사화에는 흑인이 캐스팅되었고 이는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오히려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왜 흑인을 차별하냐?” 라는 주장까지 이어진다.

현대에는 많은 빅브라더가 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돈, 정치, 사상 등의 빅브라더는 우리의 생활방식을 억압한다. 하지만 지금 언급한 자유라는 빅 브라더는 소설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인간의 마음마저 억압할 수 있다. 다른 생각, 치우친 생각을 자유라는 틀 안에서 강요함으로써 세뇌하는 것이다. 텔레스크린 뒤의 빅 브라더가 판치는 이 세계에서 당신이 원하는 진정한 윈스턴이 되기를 바란다.

[이상원 칼럼니스트] 
고려대 산업경영공학과(휴학 중)
미디어파인 대학생칼럼니스트 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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