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컬처] 김건모의 비결은 말보로 담배? [유진모 칼럼]
[히스토리&컬처] 김건모의 비결은 말보로 담배? [유진모 칼럼]

[미디어파인=유진모 칼럼니스트] 7월 16일. 1858년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매국노 이완용, 1952년 미국 배우 겸 가수 데이비드 핫셀호프, 1958년 중국 영화감독 왕자웨이(왕가위), 1967년(~2008) 전 야구 선수, 살인마 이호성, 1970년 배우 장현성, 1973년 DJ DOC 정재용, 1979년 개그맨 안일권, 1981년 개그맨 김원효, 1983년 배우 김진우, 1984년 KBS 아나운서 김솔희, 1986년 가수 다나, 1996년 배우 서지혜 등이 태어났다.

1790년(1723~) 영국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1959년 미국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 1967년 미국 재즈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 등이 눈을 감았다.

1453년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가 사실상 승전했다. 대한민국 제헌 국회 국회의장 이승만에 의해 제헌 헌법이 공포, 시행되었다. 제헌절의 유래가 되었다. 1968년 이라크 혁명이 일어났다. 1996년 KBS2 '가요톱텐'에서 조용필에 이어 4년 연속이자 정규 앨범 4장 연속으로 골든컵 수상곡 배출을 노리던 김건모의 기록을 클론이 저지했다.

서울예대 86학번 김건모는 대학 선배 박미경의 소개로 라인음향 프로듀서 김창환을 만나 1992년 1집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데뷔한다. 후속곡 '첫인상'까지 크게 히트하며 그는 단숨에 스타덤에 진입한다. 이듬해 2집에서 '핑계'로 전국을 레게 열풍에 몰아넣은 그는 1995년 3집 '잘못된 만남'으로 대한민국 음반 판매량 최고인 286만 장을 기록한다.

그러나 이후 김창환과의 불화로 라인음향을 떠났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김창환이 계획적으로 클론을 데뷔시켜 김건모의 탄탄대로를 저지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가요톱텐'이 대표적인 증거로 제기되기도 한다.

국내 가요계에서 이른바 '국민 가수'라고 불리는 남자 가수는 조용필, 나훈아, 이승철, 김건모 정도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개성과 장르가 달라 비교가 쉽지 않다. 다만 나훈아는 트로트 쪽에서, 이승철은 록과 발라드 분야에서, 김건모는 소울 장르에서 독보적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조용필은? 장르 불문이다. 그가 사실상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배경이다.

어쨌든 김건모는 1990년대까지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소울, 리듬앤블루스 등을 전면에 배치하고 등장해 성공했다는 점에서 값어치를 높이 살 만한 인물이다. 그는 대학 시절 흑인들의 필링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에 답답해하던 중 한 흑인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바로 독하기로 소문난 말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 그래서 한때 김건모는 이 담배의 애연가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조용필도 한때 하루 3갑씩 피우는 골초였었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고도 그런 가창력과 보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김건모는 가로세로연구소와의 진실 공방으로 이미지가 상당히 실추되었지만 음악만 놓고 본다면 진정한 최정상급 아티스트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실력자이다.

빌리 홀리데이는 재즈계의 가장 뛰어난 여성 보컬리스트로 평가된다. 재즈의 역사를 논할 때 무조건 맨 앞에 놓여야 하는 뮤지션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명성과 달리 그녀의 삶은 탄생부터 불행했다. 1900년대 초반 모든 미국 흑인들이 그렇듯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회의 가혹한 인종 차별 대우를 받으며 성장한 것이다.

그녀의 본명은 일리노어. 아버지 클라렌스 홀리데이는 유랑 악단의 기타리스트였는데 일리노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를 버렸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16세, 어머니는 불과 13세. 일리노어를 양육할 능력이 없던 어머니는 딸을 친정에 맡겼다.

그녀는10살이 되자 돈벌이에 나섰는데 일하러 간 집에서 백인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런데 사법부는 남자를 유혹한 불량소녀라며 감화원으로 보냈다. 일정 기간을 거친 후 사회로 복귀했지만 또다시 다른 백인 남성에게 성폭행 당했다.

삶을 자포자기한 14살의 소녀는 뉴욕의 뒷골목을 헤매는 창녀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사상 최대의 경제 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리노어는 조금이라도 더 먹고살기 위해 나이트 클럽의 댄서에 응모했지만 떨어졌다. 그때 피아니스트가 장난삼아 노래나 한 번 불러 보라고 해서 부른 게 인생을 바꿨다.

 

그렇게 재즈계의 슈퍼스타가 되었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고, 영혼은 아직도 혼미했다. 그래서 그 고통을 잊고자 남편을 따라 마약을 시작한 게 알코올과 함께 스스로의 삶을 잠식해 가는 결과를 낳았다. 불과 44살에 눈을 감았다. 진료 기록에는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DJ DOC는 신철이 서울(김창열), 전주(이하늘), 대구(박정환)를 각각 대표하는 클럽 DJ 세 명을 모아 DJ Dream Of Children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결성한 댄스 그룹이다. 처음에는 디제이덕이라고 읽었다.

 

1집 '슈퍼맨의 비애'로 어느 정도 지명도를 쌓았는데 갑자기 박정환이 군대에 입대하자 김창열이 고등학교 동창인 DJ 정재용을 그 자리에 합류시키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4집부터 디제이디오씨로 네이밍을 바꿨다. 그들은 한때 주먹다짐으로 파출소 신세를 지는 일이 몇 번 있었는데 한 경찰이 "디제이덕 맞죠?"라고 묻자 "아니거든요. 디제이디오씨, 디제이 디 점 오 점 씨."라고 반박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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