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플래시' 운명론과 시간성 [유진모 칼럼]
'더 플래시' 운명론과 시간성 [유진모 칼럼]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더 플래시'는 DC의 새로운 수장 자리에 취임한 제임스 건이 DCU의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 DCEU의 세계를 마무리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지만 그동안의 다크한 DC의 세계관에 대한 변화를 준다는 점에서도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작품이다. 게다가 MCU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멀티버스 개념까지 도입해 매우 깊은 재미를 선사한다.

배리(에즈라 밀러)는 빛보다 빠른 스피드로 달리고, 물체 투과, 전기 방출, 신체 자체 회복, 천재적 두뇌 등의 능력을 가졌지만 저스티스 리그 내에서 존재감은 제로이다. 그의 어머니는 강도에게 칼을 맞고 눈을 감았는데 아버지가 억울하게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스피드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하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엄마도 살리고 아버지도 곤경에서 구해 내려 하는데 브루스 웨인(벤 애플렉)에게 저지당한다. 하지만 그는 충고를 무시하고 과거로 가서 엄마를 살린 뒤 멀티버스 속 과거의 자신과 만난다.

그가 번개를 맞아 초능력을 갖추게 되는 날을 맞아 과거의 배리에게 초능력을 주고자 번개를 맞게 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배리는 초능력이 생기지만 오히려 미래의 베리는 초능력을 상실한다. 또한 그가 과거를 바꿈으로써 멀티버스 세계가 뒤틀어져 슈퍼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은 존재가 아리송해진다.

'더 플래시' 운명론과 시간성 [유진모 칼럼]
'더 플래시' 운명론과 시간성 [유진모 칼럼]

그 와중에 크립톤 행성의 조드 장군이 칼엘(슈퍼맨)을 잡아 응징하기 위해 지구를 침략한다. 두 배리는 도움을 청하러 브루스 웨인의 집을 찾아 가는데 그곳의 브루스(마이클 키튼)는 더 늙은 모습. 어쨌든 브루스와 힘을 합쳐 러시아가 슈퍼맨을 가둬 놓은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침투하지만 칼엘은 없고, 웬 여자만 억류되어 있다.

그녀를 구해 도망치지만 러시아 군인에게 곧 포위되는데 기운을 차린 그 여자가 배리 일행을 구해준다. 그녀는 칼엘의 사촌인 슈퍼걸이었던 것. 미래의 배리는 슈퍼걸의 도움으로 초능력을 되찾는다. 그리고 슈퍼걸, 배트맨, 두 배리는 조드와 그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출동한다. 하지만 역부족으로 배트맨과 슈퍼걸은 희생된다.

그 즈음 미래의 배리는 자신이 과거를 바꾼 게 엄청난 잘못이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아직 깨우침이 부족한 과거의 배리는 계속 시간을 되돌려 슈퍼걸과 배트맨을 살리려 안간힘을 쓰는데.

DC의 슈퍼 히어로 영화를 모두 관람한 관객들에게는 그야말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눈물겨운 오락물이다. 팀 버튼의 '배트맨'의 주인공이었던 마이클 키튼을 소환하는 것은 물론 팀 버튼과 '슈퍼맨'을 만들 뻔했던 니콜라스 케이지의 슈퍼맨, 가장 유명한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더 플래시' 운명론과 시간성 [유진모 칼럼]
'더 플래시' 운명론과 시간성 [유진모 칼럼]

그뿐인가? '배트맨과 로빈'에서 배트맨 역을 맡았던 조지 클루니가 막판에 등장해 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스파이더맨'도 멀티버스 세계관을 훌륭하게 구현했지만 이 작품도 만만치 않다. 초반에는 벤 애플렉(배트맨)과 갤 가돗(원더우먼)이, 막판 쿠키 영상에는 제이슨 모모아(아쿠아맨)가 각각 출연해 역시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영화는 온통 CG투성이라 눈이 좀 현란하기는 하지만 그 심오한 메시지만큼은 시사하는 바가 커서 납득할 만하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시간에 대한 개념과 관념이 색다르다. 시계로 재는 시간은 동일하지만 각 개체의 생각과 환경 등에 따라 시간의 길이는 각자 다르기 마련.

흔한 예로 어릴 때는 시간이 더디게 흐르지만 늙으면 빨리 간다. 철학자들은 그 시간 개념에 대해 매우 어렵게 설명하고 해석한다. 대표적인 시간성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론과 시간론을 한데 엮어 서술한 바 있다.

영어는 그냥 time이지만 우리 말의 시간과 시각은 다르다. 시각은 정지한 어느 지점을 이야기하고 시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말한다. 하이데거의 시간성은 전자일 수도, 후자일 수도 있다.

'더 플래시' 운명론과 시간성 [유진모 칼럼]
'더 플래시' 운명론과 시간성 [유진모 칼럼]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들은 세상에 피투된 존재자이다. 자의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라 타의에 의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성'을 잃은 현존재이다. 세상에 피투되기 전의 본래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느 목표를 향해 가는가? 본래적 존재인 도래적 존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기투를 시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죽음이라는 도래적 존재가 되어 본래적 존재로 회귀하는 게 시간성이다.

뭐 대충 그런 설명인데 많이 어렵다. 하이데거는 그런 논리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돈을 벌고자 했든지. 결국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존재론적 시간성과 운명론이다.

배리는 '필연적 교차점'을 이야기한다. 사실 이론적으로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렇다면 과거로 가서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이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론과 실재는 다르다. 그게 바로 필연적 교차점인 듯하다.

'더 플래시' 운명론과 시간성 [유진모 칼럼]
'더 플래시' 운명론과 시간성 [유진모 칼럼]

즉 종교에 근거한다든가, 자연법에 기대어 본다면 세상은 자연의 섭리, 혹은 신의 의지에 의해 운명이 정해져 있다. 그걸 신의 힘이나 자연의 섭리가 아닌, 과학의 힘이나 어떤 인위적인 거대한 새로운 힘에 의해 바꾼다면 세상의 순리는 크게 뒤틀어져 혼돈이 오고 결국 우주가 붕괴된다는 이론을 이 작품은 설파하고 있다.

미래의 배리는 과거의 배리에게 "엄마는 시간 속 어딘가에 살아 있다."라고 위로한다. 하이데거이다. 또한 그의 운명론은 종교적으로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론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태초에 신이 조화롭게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그 예정된 조화로 톱니바퀴 물리듯 잘 돌아가는 것이다. 심지어 파리, 모기, 뱀조차도 다 이유가 있어서 창조된 것이다.'라는 식이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교훈은 '모든 문제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모든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려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는 한다. 이를테면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있는데 아내가 귀가해 남편에게 직장 상사가 자신을 괴롭힌다는 하소연을 한다고 치자.

그건 아내가 어떤 솔루션을 달라는 게 아니다. 억울하고 답답하니 그냥 들어만 달라는 시그널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남편은 "내가 만나서 잘 설득해 볼까?"라든가, 심지어 "폭력배를 동원해서 협박해 볼까?"라는 등의 과잉 대응을 하는 패착을 저지르고는 한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진퇴양난이라는 단어가 대표적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을 때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잠시 쉬어 가면 된다. 그럴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 심오한 인생의 비결을 알려 주는, DC의 앞날을 기대하게 만드는, 심오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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