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컬처] '한번만 더' 박성신을 추모하며 [유진모 칼럼]
[히스토리&컬처] '한번만 더' 박성신을 추모하며 [유진모 칼럼]

[미디어파인=유진모 칼럼니스트] 2023년 8월 8일. 1937년 미국 배우 더스틴 호프만, 1939년 배우 전원주, 1953년 코미디언 엄용수, 1961(~2005)년 가수 길은정, 1963년 허진호 영화감독, 1966년 배우 조성하, 1969년 중국 배우 겸 가수 왕페이, 1988년 배우 이은성, 1995년 세븐틴 에스쿱스, 1999년 NCT 샤오쥔 등이 태어났다.

1969년 북한 무용가 최승희, 2014년 가수 박성신, 2017년 미국 가수 글렌 캠벨, 2022년 호주 가수 올리비아 뉴튼 존 등이 눈을 감았다.

세계 고양이의 날, 파파데이, 포도데이, 피아노데이(건반이 88개), 버블데이, 무궁화의 날, 섬의 날, 상담의 날이다.

1961년 12월 31일 KBS TV가, 1964년 12월 7일 훗날 KBS 2TV가 되는 TBC TV가 개국한 데 이어 1969년 오늘 MBC가 개국함으로써 지상파 TV 3사 시대가 열렸다. 1973년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

4월 4일, 6월 6일, 8월 8일, 10월 10일, 12월 12일은 63일을 주기로 하므로 매년 같은 요일이라는 재미있는 사실을 아시는지. 팔월 팔일이기에 발음이 비슷한 파파데이로 정했다. 아버지의 날이다. 그만큼 아버지의 존재감이 많이 상실되었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여러 가지로 긍정적인 의미가 많은 날이다.

그런데 국내 역사로는 매우 우울한 김대중 납치의 날이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모두가 알다시피 영구 집권을 노렸다. 그런데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자인 김대중의 선전에 진땀승을 거둔 뒤 김대중이 눈엣가시였을 게 당연할 터.

김대중은 1972년 10월 11일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 및 일본 정계 인사들과의 만남을 위해 도쿄에 간 뒤 체류 중이던 17일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그대로 망명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일본에 체류하며 유신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던 1973년 8월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백주에 김대중을 납치해 태평양에 빠뜨려 죽이려 한다.

하지만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배의 위치가 탄로나는 바람에 살해를 포기했다. 결국 김대중은 납치된 지 5일째 되던 날 밤에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 앞에서 풀려난다.

이로 인해 일본, 미국은 물론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적 신뢰도는 급락하게 된다. 박정희,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 김대중 등 세 사람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사건의 최종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영원히 미궁 속에 파묻혀 있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 즉 박정희는 이후락과 중앙정보부의 단독 소행이라고 발표했지만 경찰의 수사는 흐지부지되었고, 이후락이 사석에서 박정희의 지시가 있었음을 고백했다는 '설'이 나돌았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어쨌든 이 사건은 정치권은 물론 전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폈다.

최승희는 신무용의 창시자로서 한국 무용계에 끼친 영향이 그야말로 엄청난 예술가이다. 광복 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했다. 1995년 MBC 특집 드라마 '최승희'가 방송되었다. 채시라가 타이틀 롤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왕페이는 중화권 최고의 가수 덩리쥔(등려군)과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 유일무이한 가수 겸 배우이다. '왕페이가 없다면 중국과 홍콩 가요계를 논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그야말로 중화권 최고의 국민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얼터너티브 록까지 수용하는가 하면 독자적으로 재해석한 싱어 송 라이터로서 아시아에서 인정받는 중화권 가수로서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게임 '파이널 판타지 8'의 주제곡 'Eyes on me'를 부르기도 했다.

국내 관객들에게는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의 페이 역으로 사랑받았다. 진청우(금성무)의 단골 패스트푸드 식당 점원 역을 맡아 묘한 중성적 매력을 풍겼다. 국내에는 왕정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올리비아 뉴튼 존(1948년생)은 1970~80년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미녀 여가수였다. 영국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멜버른에 교사로 재직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이주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컨트리 가수로서 활동하며 'Let me be there' 등을 히트시켰다.

1978년 뮤지컬 영화 '그리스'에 출연해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또한 뮤지컬 영화 '제너두'에도 출연했다. 미모와 가창력뿐만 아니라 싱어 송 라이터로서 탁월한 음악성을 보여 주었다. 1981년 'Physical'로 빌보드 핫100 1위에 오르며 정상에 등극했다.

환경 보호 및 동물 권리 운동을 펼쳐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전성기에 찾아온 유방암 투병 끝에 결국 눈을 감았다.

박성신(1968년생)은 '산넘어 남촌에는'으로 유명한 원로 가수 박재란의 딸이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가창력과 음악성으로 1989년 '한번만 더'로 데뷔하자마자 스타덤에 올랐으나 2집 발표 후 임인성 씨와 결혼하면서 자연스레 메인 스트림을 떠나 주로 CCM 가수로 활동했다.

젊은 나이에 심장 질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한번만 더'는 나얼, 이승기 등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