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컬처] 한류 4대 천왕의 완성 박용하를 기리며 [유진모 칼럼] 박용하.
--------------[히스토리&컬처] 한류 4대 천왕의 완성 박용하를 기리며 [유진모 칼럼] 박용하.

[미디어파인=유진모 칼럼니스트] 2023년 8월 12일. 1887년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 1949년 록 밴드 다이어 스트레이츠 보컬리스트 마크 노플러, 1967년 가수 조갑경, 방송인 조영구, 1971년 배우 류승수, 1973년 배우 한재석, 빅마마 신연아, 1977(~2010)년 배우 박용하, 1979년 가수 윤성한, 1980년 개그맨 홍인규, 1986년 가수 베이식, 1989년 원더걸스 선예, 1993년 f(x) 루나, 1996년 케플러 최유진, 2004년 우아 민서 등이 태어났다.

1964년 영국 스코틀랜드 소설가 이언 플래밍, 2010년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2022년 독일 영화감독 볼프강 페테르젠 등이 별세했다.

국제 청소년의 날. 대한민국은 이산 가족의 날이다.

박용하는 1994년 MBC '테마극장'으로 데뷔했다. KBS2 '출발 드림팀'에서 에이스 역할을 하며 인기를 높여 가다가 2002년 드라마 '겨울연가'에 주조연으로 출연했다. 2003년 드라마 '올인'의 주제곡 '처음 그날처럼'을 불러 가수로 먼저 성공한 뒤 이듬해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빅 히트를 기록하면서 한류 톱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일본에서는 배용준을 욘사라마고, 박용하를 요나짱이라고 각각 부르며 열렬히 성원했다. 한류 스타가 된 박용하는 일본에서 가수로 데뷔해 성공했고, 한때 한류 4대 천왕의 4번째 자리를 놓고 이병헌, 송승헌, 권상우와 경쟁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2005년부터 4년 연속 일본 골든 디스크상을 수상한 것만 봐도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세대 음반 제작 매니저 박승인 씨의 1녀 1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박 씨는 송창식 등의 매니저를 지낸, 가요계의 유명 인사였지만 자신의 아들이 가수가 아닌, 배우로 먼저 데뷔했기에 자신의 전문 영역이 아니라며 후배 배우 전문 매니저 안재형 씨에게 매니지먼트를 맡겼을 정도로 인품이 높은 사람이었다.

박용하와 박 씨는 부자 관계를 뛰어넘은 친구 같은 사이로 연예계에서 유명했다. 특히 박용하는 골프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각종 골프 용품을 선물해 주며 남다른 효심을 보였다.

그러던 중 2010년 박 씨가 위암 투병 중이고, 박용하가 병 간호에 지극한 정성을 쏟는다는 사실이 알려진 가운데 6월 30일 새벽 드라마 '러브송' 촬영을 앞둔 박용하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 온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는 20대 때부터 불면증에 시달리며 수면제롤 복용해 왔다. 사망 전 그는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하며 힘든 삶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1인 기획사 요나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뒤 사업 문제로 그의 스트레스가 더욱 극심해져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이 월드컵에서 파라과이에 승부차기 끝에 졌는데 일본 언론은 그 소식보다 박용하의 자살을 먼저 속보로 내보냈다. 고인의 아버지 박 씨도 그해 10월 22일 결국 병마에 굴복해 아들의 곁으로 갔다.

영국 요크셔 이브닝포스트에서 록 음악 평론 담당 기자로 일하던 마크 노플러가 동생 데이비드 노플러를 비롯해 픽 위서스, 존 일즐리와 함께 블루스와 재즈를 기본으로 한 록 밴드 다이어 스트레이츠를 결성하고 1978년 동명의 데뷔 앨범을 발표한다.

DS는 데이비드와 픽이 탈퇴한 뒤 5명의 멤버들이 거쳐가는 동안 1988년 한 번 해체했다가 3년 후 재결성되어 1995년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는 펑크 록, 글램 록, 하드 록, 뉴 웨이브 등이 유행했지만 DS는 재즈와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다소 올드한 음악을 추구했음에도 듀란 듀란, 폴리스, 필 콜린스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영국 뮤지션으로 손꼽힐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총 4회 그래미 상을, 3회 브릿 어워드 상을 각각 수상했고, 2018년 드디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다이어 스트레이츠나 마크 노플러는 몰라도 'Sultans of swing'이나 'Money for nothing'이라는 곡과 그 노래들을 느릿느릿하게 코맹맹이 톤으로 특이하게 부르는 보컬리스트는 기억할 것이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고, 말도 안 되는 압도적인, 아니 일방적인 우세로 자유당의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었다. 부정 선거였다. 이후 4·19 혁명이 일어났고 8월 12일 재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민주당 조병옥 후보 단 두 명이었는데 조병옥이 유세 중 갑자기 병사했다. 이승만의 당선은 명약관화했는데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방법으로 이기붕을 당선시켰고 결국 혁명을 유발한 것.

기본적인 뇌물 살포부터 시작해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치졸하고 사악한 방법이 총동원되었다고 한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오늘의 결정에 대한 지침서이자 미래를 살아갈 방향타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슈뢰딩거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 혹은 양자물리학의 모순을 설명하려 한 실험인데 오히려 양자역학의 대변인이 되어 준 아이러니한 용어이다.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을 연구하면서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은 사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고전물리학은 미래를 내다본다고 하지만 양자물리학은 이항대립의 공존을 주장하면서 측정 후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역사는 확실하게 미래를 보여 준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한 학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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