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컬처] [유진모 칼럼] 채드윅 보즈먼 추모 '와칸다 포에버'. '블랙 팬서' 스틸.
[히스토리&컬처] [유진모 칼럼] 채드윅 보즈먼 추모 '와칸다 포에버'. '블랙 팬서' 스틸.

[미디어파인=유진모 칼럼니스트] 2023년 8월 28일. 1749년 독일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947년 방송인 이상벽, 1949년 배우 허진, 1962년 미국 영화감독 데이비드 핀처, 배우 오광록, 1965년 가수 겸 배우 문희경, 1966년 배우 전노민, 1969년 미국 배우 잭 블랙,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1970년 가수 박윤경, 1971년 배우 이지은, 1972년 배우 김민희, 1979년 개그맨 서남용, 1984년 배우 소이현, 1989년 2AM 조권, 어반자카파 조현아, 1992년 축구 선수 황의조, 1993년 펜타곤 후이, 1996년 가수 김세정, 2000년 에이프릴 출신 가수 레이첼, 2003년 엔싸인 한준 등이 태어났다. 2020(1976~)년 미국 배우 채드윅 보즈먼이 눈을 감았다.

1990년대를 풍미한 배우 이지은은 2000년 벤처 기업인 이진성과 결혼하며 사실상 연예계를 은퇴해 대중의 뇌리에서 금세 잊혔다. 그러던 2021년 3월 8일 오후 8시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바람에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게 되었다. 그녀는 2015년 남편과 이혼한 후 아들 호준(2001년생) 씨와 둘이 살았는데 사망 당시 호준 씨는 군 복무 중이었다.

그래서 자살설이 나돌았지만 유족들이 부검을 의뢰한 결과 심근경색으로 밝혀졌다. 만약 함께 사는 가족이 있었다면 50살이 채 되기 전에 사망하는 일은 피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귀국해 고등학교까지 다닌 뒤 대학은 일본에서 졸업했다.

1994년 KBS2 드라마 '느낌'에 김민종의 상대역으로 등장해 당시 한국 여자들과는 사뭇 다른, 이국적인 메이크업과 복장으로 눈도장을 찍는다. 일본인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 남장 소매치기 역할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영화 '금홍아 금홍아', '파란 대문' 등에 출연하며 당시 가장 뜨거운 여배우로 활약했다.

채드윅 보즈먼은 1976년 11월 29일 태어났다. 하워드 대학교에서 연출로 학사 졸업한 뒤 2003년 드라마 '서드 워치'로 데뷔했다. 꽤 오랫동안 무명의 세월을 보내다가 최초의 흑인 메이저 리거 재키 로빈슨의 전기 영화 '42'와 소울 음악의 대부인 제임스 브라운의 전기 영화 '제임스 브라운'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6년 3월 국내 개봉된 영화 '갓 오브 이집트'에 지식의 신 토트 역으로 출연했지만 비중이 적은 데다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 존재감을 전혀 알리지 못했지만 한달여 뒤 개봉된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트찰라 역을 맡아 확실하게 스타 탄생을 알렸다. 이후 '블랙 팬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어벤져스: 엔드게임' 등에 출연하며 톱스타의 자리를 굳건하게 다졌다.

흔히 덴젤 워싱턴을 가장 지적인 이미지의 흑인 배우라고 했는데 보즈먼이 바로 그 이미지를 이어 '제2의 덴젤 워싱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8년 2월 5일 '블랙 팬서' 홍보를 위해 내한한 적이 있는데 그의 아프리카 억양이 섞인 발음 때문에 한국 팬들은 '채두익' 혹은 '최두익'이라는 이름을 붙여 줬는데 이에 대해 그는 매우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국 시각으로 2020년 오늘 갑자기 그가 대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블 영화에서 봤듯 매우 건강한 체격을 자랑한 액션 스타가 2016년 대장암 3기를 선고받고 그동안 암 투병을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수술과 항암 치료 등을 꾸준히 해 왔으나 4년 새에 4기까지 악화되어 결국 사망한 것.

그럼에도 그가 그동안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4편의 마블 영화 및 다른 작품들을 소화했다는 사실에 많은 영화인들은 물론 관객들까지도 감동하고 있다. 또한 사망 후에야 그가 2019년 가수 테일러 시몬 레드워드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평소 그가 자기 관리에 철저했고, 겸손했다는 것을 증명해 더욱 안타까움을 크게 만들었다.

생전에 그가 흑인 인권 운동에도 남다르게 열성적이었다는 점 역시 흑인은 물론 의식 있는 지식인들로 하여금 더욱더 애도의 마음과 아쉬움을 크게 만들었다.

1945년 호찌민이 베트남 공화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호찌민은 현대 베트남의 국부로 평가받는다. 일부 반대파에 대한 학살의 논란도 있기는 하지만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라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엄존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는 "독립과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일한다"라는 테제로 유명하다.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받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미국은 베트남을 지배하기 위해 호찌민의 적대 세력인 남베트남을 지원했고, 이에 애꿎은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어 희생되는가 하면 베트남에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1963년 마틴 루터 킹이 'I have a dream' 연설을 하였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명의 자녀들이 이 나라에 살면서 피부색으로 평가받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받게 되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빛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개신교 종교 개혁의 선두 주자였다면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의 인종 차별 철폐 운동의 아이콘, 인권 운동의 대명사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직도 미국과 유럽에는 흑인에 대한 편견이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유색 인종이 사는 아시아에서조차 그런 비뚤어진 시각을 가진 이들이 잔존할 정도이다.

마틴은 사람이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을 꿈꾸었다. 그러나 지구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자본주의는 돈으로 평가하게 만든다. 지위에 따라 돈이 움직이지만 결국 지위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다. 존경의 척도가 인격이 아니라 재산이다. 차별이 없는 세상, 인격이 인정받는 세상, 그것은 인권 운동을 하다 암살당한 마틴이 무덤 속에서 오매불망 간구하는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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