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연예사] 유재하 교통사고사, 김현식 병사 '두 천재의 죽음'-김현식.
[오늘의 연예사] 유재하 교통사고사, 김현식 병사 '두 천재의 죽음'-김현식.

[미디어파인=오서윤 기자] 싱어 송 라이터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안동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재학 시절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키보디스트로 들어가 후에 그의 대표 히트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용필에게 선사해 조용필 7집에 수록되게 된다.

재학 시절 그가 제출한 창작곡을 본 교수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모차르트를 베끼냐?"라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음악성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 전공은 클래식이었지만 그는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위대한 탄생의 문을 두드린 것이고 일찌감치 그의 실력을 알아 본 조용필이 흔쾌히 받아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용필과의 인연은 그리 길지 못했다. 해외 공연을 떠나야 했는데 학교 측에서 허가해 주지 않아 결국 키보디스트는 교체된다.

대학 졸업 후인 1986년 유재하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 들어간다. 이미 음악계에 유재하의 실력은 널리 알려져 있던 터였다. 유재하는 김현식에게 '가리워진 길'을 작곡해 준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자신의 사비 800만 원을 털어 서울음반을 통해 첫 음반이자 유작인 데뷔 앨범을 발표한다.

자신이 모두 작사, 작곡, 편곡했고 키보드 외에도 다양한 악기를 직접 연주했다. 국내 가요계에는 단 한 장의 원 맨 밴드 앨범이 있으니 1989년 김수철이 발표한 앨범이다. 모든 악기를 김수철이 연주했다. 작사, 작곡, 편곡도 물론 그가 혼자 도맡았다. 유재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거의 원 맨 밴드에 가까웠다.

이 앨범은 대중음악 전문가들이 국내의 명반을 손꼽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할 만큼 뛰어난 음악성을 자랑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존의 대중가요는 일정한 몇 가지의 형식에 의해 작곡, 편곡되었다. 아주 파격적인 소량의 곡을 제외하면 '거기에서 거기'였다.

그런데 유재하의 음악은 달랐다. 한마디로 클래식을 바탕으로 한 대중음악이었다. 유재하는 클래식의 위대함과 대중성을 동시에 입증한 셈이다. 그러나 이 음반의 '사랑하기 때문에'가 라디오를 통해 서서히 알려질 즈음인 11월 1일 새벽 술에 취한 친구가 운전하던 포니에 동승한 그는 이 차가 마주오던 택시와 충돌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김현식이라고 하면 '가요계의 반항아'라는 이미지가 가장 강하다. 언더그라운 가수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당대의 우상이었다. 그는 기존 양대 지상파 방송사의 고압적인 태도에 반항해 방송 출연을 거부했고, 오로지 무대와 음반 활동으로만 대중과 만났다.

1984년 발표한 2집에서 '사랑했어요'가 크게 히트되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라선 그는 당시 언더그라운드의 대표 레이블인 동아기획에서 들국화와 함께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후 그의 눈부신 활약은 메인 스트림의 조용필이나 전영록과는 결이 조금 달랐지만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에 대한 친근감과 더불어 깊은 음악성에 대한 신뢰를 주게 된다.

이후 블루스 록 밴드 신촌블루스와도 협업하던 그는 1989년 가을 우연히 마주친 친구 강인원의 제안으로 영화 '비 오는 날 수채화'의 OST를 권인하까지 셋이 취입하게 된다. 영화보다 노래가 더 크게 히트했고, 세 사람은 의기투합해 계속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때 이미 김현식은 간경화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

1990년 그는 동아기획에서 6집을 준비한다. 그때 부른 노래가 '내 사랑 내 곁에'. 당시 완벽한 녹음은 아니고 이른바 가녹음이었다. 그러나 '술을 단 한 방울도 마시면 안 된다.'라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주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술을 마시던 그는 11월 1일 결국 눈을 감는다.

그런데 그가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힘겹게 가녹음한 '내 사랑 내 곁에'의 감성이 의외로 뛰어나 이 앨범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이 팔리면서 역시 국내 대중가요사에서 명반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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