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애도와 치유의 힐링 다큐멘터리 [유진모 칼럼]
'약속', 애도와 치유의 힐링 다큐멘터리 [유진모 칼럼]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엄청난 다큐멘터리 한 편이 탄생했다. 11월 1일 개봉된 민병훈 감독의 영화 '약속'이다. 1998년 '벌이 날다'로 데뷔한 이래 '포도나무를 베어라', '터치', '사랑이 이긴다' 등의 작가주의 영화를 만들며, '영원과 구도의 시네아스트'라 불려 온 민병훈 감독의 11 번째 장편 영화이자 3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민 감독은 5년 전 투병 중인 아내와 당시 3살이던 아들 지우 군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한다. 그러나 결국 사별한 후 남겨진 8살 아들과 자신의 1년여의 애도와 치유의 시간을 기록한다. 올해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 케이스 부문에 초청되어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통해 관객과 처음 만났다. 시우 군도 이때 비로소 관람했다고.

아빠는 어린 아들을 고려해 엄마의 안식처를 보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뒤 '그곳'에 함께 갈 것을 약속한다. 아들은 자주 운다. 엄마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아빠 역시 울고 싶지만 참는다. 자신까지 나약해지면 부자의 삶은 피폐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빠는 안다. 자신이 어떻게 아들을 키워야 하늘의 아내가 안심할지.

'약속', 애도와 치유의 힐링 다큐멘터리 [유진모 칼럼]
'약속', 애도와 치유의 힐링 다큐멘터리 [유진모 칼럼]

영화는 많이 슬프리라는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뜨린다. 오히려 매우 따뜻하게 아프고, 아주 흐뭇하게 아리다. 외형상 아빠와 아들이 주인공이지만 사실 아름다운 제주도의 자연 풍광이 그에 못지 않은 존재감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바다, 하늘, 구름, 바람, 안개, 고라니, 사마귀 등 제주도의 자연을 형성하는 모든 존재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따로 마장센이랄 것도 없지만 제주도라는 존재의 미장센이 그 어떤 장치보다 훌륭한 역할을 한다. 물론 그것을 프레임 안에 어떻게 담아낼지 잘 아는 감독의 걸출한 연출력 덕분이다. 아빠와 아들은 아내를, 엄마를 그리워하되 다른 세계에서 남편과 아들을 지켜 볼 존재자를 위해 서로 보듬으면서 치유하는 방법을 배우고 공유해 간다.

그럴 수 있었던 배경은 고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상대방에 대한 가족애와 믿음, 그리고 제주도라는 공간이 주는 자유 덕분이었을 것이다. 감독은 특별한 기교를 부리려 하지 않지만 특유의 작가주의 형식으로 매우 수려한 비주얼과 유려한 흐름을 완성했다. 감독이 지적했듯 후반부의 리버스 시퀀스는 매우 인상적이다.

제목은 약속인데 왠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연상된다. ‘기억은 지워져도 삶은 지워지지 않는다.'라고 말한 감독은 하이데거를 잘 아는 듯하다. 동물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포식자 등 천적의 공격을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는 않는다. 사고 능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약속', 애도와 치유의 힐링 다큐멘터리 [유진모 칼럼]
'약속', 애도와 치유의 힐링 다큐멘터리 [유진모 칼럼]

하지만 사람은 동물 중 유일하게 죽음을 걱정한다. 영장류나 돌고래처럼 고등 동물보다 훨씬 진화한 사고력과 인식론을 가진 인류는 오래전부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아파했다. 그러나 마냥 슬픔에 괴로워할 수 없어서, 또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장례 문화를 만들었다. 여기에 스리슬쩍 내세론, 영혼 불멸설, 환생론 등이 끼어들었다.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이 없기에 (그런 주장을 하는 극소수가 있기는 하지만) 하늘나라가 있는지, 환생을 하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 특정 종교인이 아닌 이상, 유물론과 다윈의 진화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는 영혼을 이야기하지만 영혼을 보거나 증명한 적은 없다. 심지어 과학, 의학, 유물론에 의하면 우리의 생각은 육체(뇌)에 속해 있다.

하이데거 역시 죽음이 두려웠다. 물론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학문적 궁금증도 다른 학자들과 달랐다. 그래서 그는 현생을 사는 현실 속 우리의 존재를 현존재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육체에 영혼이 깃들기 전에 우리는 본래적 존재였다. 즉 영혼. 이후 현세에 피투되어 살다가 죽으면 본래적 존재인 도래적 존재가 된다.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이 연상되기도 한다.

'약속', 애도와 치유의 힐링 다큐멘터리 [유진모 칼럼]
'약속', 애도와 치유의 힐링 다큐멘터리 [유진모 칼럼]

아빠와 아들은 그런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사후 세계가 있든, 그렇지 않든 망자를 애도하는 가운데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아들이 더 이상 아파하지 않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약속이라는 희망으로 변전시킬 수 있도록 살아가자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다.

후반부의 리버스는 바로 '존재와 시간'의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늙고 병들어 죽기 마련이다. 하이데거는 그게 끝이 아니라 본래적 존재로 회귀하는 도래적 존재라고 했다. 시우 군이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과거로 점점 회귀해 엄마와 함께 제추도에 처음 여행 왔을 때로 되돌아가는 게 바로 그런 내용이다.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든 생물은 DNA를 남기려고 한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 세상을 살다 간 흔적을 남기는 한편 제한된 자신의 생명력을 다른 방법으로 이어 가려는 본능 때문이다. 진화론이 근거이다. 이 어려운 이야기들을 민 감독은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통해 슬며시 설파하는 한편 아들에 대한 애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스산한 바람이 감성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요즈음 한판 시원하게 울고 싶은 사람도, 제대로 눈과 영혼을 힐링하고 싶은 이도 가족과 함께 83분 내내 아름다운 시를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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