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킹 아서: 제왕의 검> 예고편 화면 캡처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킹 아서: 제왕의 검’(가이 리치 감독,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배급)은 웬일인지 영국의 전설 같지 않고 대한민국의 오늘을 보는 듯하다.

아서는 고대 브리튼을 다스린 왕이다. 중세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걸쳐 문화와 예술의 단골소재로 쓰인 엑스칼리버와 원탁의 기사 신화의 주인공이다. ‘킹 아더’ ‘원탁의 기사’ ‘엑스칼리버’ ‘카멜롯의 전설’ 등 수많은 영화(혹은 애니메이션)로 제작돼왔다.

이번 영화는 인간군상의 다양하고 독특한 캐릭터의 향연 같은 블랙코미디액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로 실력을 뽐낸 ‘영국의 쿠엔틴 타란티노’ 리치의 최근작이다. 하지만 마돈나와의 결혼 이혼 양육권다툼 등으로 많이 변한 그에게서 예전의 재기 발랄한 신선도를 찾긴 힘들다.

다만 영화는 마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 속도감이 좋고 음악이 강렬하며 CG 등의 기술력과 상상력이 훌륭하다. 시청각의 호강이다. 그런데 이 고대의 전설을 다룬 영화가 왠지 한국의 현실과 제19대 대통령 문재인을 연상케 한다.

▲ 영화 <킹 아서: 제왕의 검> 촬영 현장

켈트족 브리튼의 왕 우서는 동생 보티건과 함께 라틴족 색슨족 게르만족 노르만족 등 외세에 맞서 싸워 이기거나 화친해 나라를 튼튼하게 지키고 있다. 그러나 어긋난 집권야욕에 불타는 보티건은 사악한 님프 세이렌의 도움을 받아 우서 부부를 죽이고 왕좌에 오른다.

우서의 3살 난 아들 아서는 간신히 도망쳐 사창가에서 성장한다. 우서의 힘의 바탕은 신검 엑스칼리버다. 우서가 죽으며 이 검도 사라졌다. 간신들은 물론 바이킹과 결탁한 보티건의 폭정이 극에 달할 즈음 거리에 엑스칼리버가 나타나고 분노가 극에 달한 백성 사이에서 순혈 왕이 새로 왕좌에 오를 징조란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결과는 신화처럼 아서가 엑스칼리버의 진정한 주인이 돼 후일 원탁의 기사가 되는 충신들의 도움과 백성들의 성원에 힘입어 보티건을 물리침으로써 왕좌에 올라 선정을 베푼다는 얘기다.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는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민심이다.

▲ 영화 <킹 아서: 제왕의 검> 예고편 화면 캡처

보티건은 자신의 힘을 키우고 권위를 자랑하기 위해 높은 탑을 쌓는 데 몰두해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공무원들은 부패했고, 이기심 강한 사람은 그런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건네 불법으로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 이골이 나있다. 당연히 민심은 보티건에게서 멀찌감치 달아났고, 일부 사람들은 낙서로 왕권을 비난하며 민심을 움직인다.

아서는 처음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 그러나 백성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도우며 새 세상을 열어줄 간절한 소망을 내비치자 내재돼있던 운명적인 사명감을 이끌어내 천신만고 끝에 보티건을 죽이고 정의로운 왕국을 건설한다.

그가 승리의 일등공신인 원탁의 기사들을 대하는 방식도 매우 친근하고 민주적이다. 아이 한 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길 주저하지 않는다. 창녀와 비렁뱅이 등 천박한 신분의 사람들 하나하나 모두 소중히 여기는 지도자다.

▲ 사진=kbs 뉴스화면 캡처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대통령들과 달라도 확연하게 달랐다. 아무리 보궐선거로 당선돼 공석이었던 대통령 역할을 급박하게 해내야 하는 상황이라지만 그는 빨리 내달렸고, 거의 모든 걸 직접 챙겼으며, 특히 국민과 스킨쉽을 하려는 실시간 직접소통의 의지가 남달랐다.

제일 먼저 안보를 챙긴 그는 현충원에 이어 국회를 방문해 야당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예포 등 거창한 취임식 행사를 생략한 대신 청와대 가는 길에 광화문광장에 들러 국민들과 손을 맞잡고 그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성의 있게 청취했으며 의전차량으로 이동 중에도 선루프 위로 상체를 드러내고 눈과 손바닥으로 국민들과 인사를 했다.

그는 광화문광장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해 늦가을부터 전국에 들불처럼 번진 촛불집회가 박근혜를 끌어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그 트리거가 바로 광화문광장이었으며, 그게 그의 당선에 큰 도움을 준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퇴근 후 자주 재래시장에 들러 피부로 서민의 삶을 느끼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겠으며 때론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토론회도 갖겠다고 약속했다.

▲ 사진=kbs 뉴스화면 캡처

지난 이병박-박근혜 정권의 9년과 문 대통령은 확연하게 달랐다. 없는 건 권위주의와 번역기였다. 문 대통령에게선 조금의 고압적 권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레 국민들이나 공무원들 앞에서 고개 숙이고 허리 굽히는 걸 반복했다. 그의 말은 참모나 언론이 부연설명해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쉽고 명확하고 직설적이었다. ‘통일은 대박’이란 품격의 상실도, ‘우주의 기운이 돕는다’는 뜬구름 잡는 주술적 유치함도 없었다.

있는 건 솔직함과 현실성이었다. 앞선 두 정권의 틀에 박힌 천편일률적인 국정운영방침과 달리 국민들이 체감하는 부조리, 고치라고 간절하게 갈구하는 불합리 등 진짜 문제다운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권위주의적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고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눔으로써 서민과 눈높이를 맞추겠다는 선언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자신을 ‘국부’라 칭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승만부터 구악적 권위주의를 되살리고 언론과 언로에 재갈을 물린 박근혜까지 ‘왕’이나 ‘여왕’을 '모셔온'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참으로 생소했지만 엄청나게 반갑고 희망적인 얘기였다.

화룡점정은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매조짐이었다. 가장 상식적이고 가장 정상적이며 그래서 당연한 이 사회적 구조를 새 대통령이 약속한 건 그만큼 그동안 국가가 그런 풍토를 조성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아서는 왕이 된 후 원탁의 기사들 앞에 무릎을 꿇고 기사가 되는 의식을 치른다. 아무리 영화고 왕권정치 시대라고 하지만 국민이 있어야 왕이 있고 왕국도 있는 법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노숙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당시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부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나타나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자신 밑으로 들어올 것을 청하자 “햇볕 좀 쬐게 비켜주쇼”라고 대응했다.

노기에 찬 알렉산더가 “너는 내가 무섭냐, 그렇지 않냐?”라고 물었다. 무섭다고 하면 항복 선언이고, 안 무섭다고 하면 사형감이었다. 디오게네스는 외려 “대왕은 선한 분입니까, 악한 분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알렉산더가 당연히 “선한 사람”이라고 답하자 디오게네스는 “선한 분이 무서울 리 없다”고 마무리 펀치를 날렸다. 완패하고 돌아간 알렉산더는 “내가 만약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존경심을 표출했다.

▲ 영화 <킹 아서: 제왕의 검> 예고편 화면 캡처

‘킹 아서’에서 아서는 절대 권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지지세력과 함께 고립돼 보티건의 파상공세를 눈앞에 두고 부하들이 비밀통로로 피하라고 하자 그는 외려 약자들에게 먼저 피신할 것을 명령한다. 부하들이 피할 생각을 안 하자 때마침 몰려온 적들 앞에 그는 제일 먼저 나서 엑스칼리버를 휘두른다. 그리고 그는 매사에 마법사(책사)에게 의견을 묻고 그에 따른다.

영화는 마치 중국의 판타지무협영화의 유럽 버전 같은 느낌을 준다. 기승전결이 뻔한 권선징악의 히어로영화의 전형을 따르면서도 엄청난 규모의 코끼리와 뱀, 그리고 지옥섬의 기괴한 동물 등 색다른 공포와 재미를 갖췄다. 126분. 12살 이상. 5월 1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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