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비늘', 상실적 집착과 긍정의 체념의 심리 스릴러 [유진모 칼럼]
'물비늘', 상실적 집착과 긍정의 체념의 심리 스릴러 [유진모 칼럼]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매우 주목해야 할 만한 독립 영화가 등장했다. 임승현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물비늘'(6일 개봉)이다. 말이 독립 영화이지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으로 굉장히 흥미롭게 전개되는, 매우 치밀하고 촘촘한 심리극이다. 60대 예분(김자영)은 사실상 영업이 끝난 장례식장에 기거하는 염습사로 1년 전 손녀 수정(설시연)을 잃었다.

1년 전. 예분은 딸 현경과 의절했고, 현경은 수정을 남겨 두고 재혼해 서울로 갔다. 예분은 매일 술로 지새우고, 그런 할머니가 지겨운 여중 2년생 수정은 절친한 친구 지윤(호예서)을 만났다. 두 사람은 교내 수영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지윤은 수정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래프팅을 제안했고, 래프팅 중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일부가 익사했다.

지윤은 살아남았고, 수정은 사망했다. 그러나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날로 예분의 시간은 멈췄다. 매일 금속 탐지기를 들고 강을 헤매며 수정의 시신을 찾는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수정의 기일. 암 말기 환자인 예분의 친구 옥임(정애화)이 찾아온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며 지윤을 대신 키워 달라고 부탁하지만 예분은 차갑게 거절한다.

지윤의 엄마는 없고 아버지는 있지만 노름 때문에 집을 나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그렇게 헤어진 지 얼마 안 지나 지윤이 예분을 찾아온다. 옥임이 죽었다. 예분은 옥임을 시체 안치소에 보관하고, 지윤은 아버지가 곧 올 테니 그때 장례식을 치르자고 부탁한다. 지윤은 남 모르게 정신병 약을 먹고 있다.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

'물비늘', 상실적 집착과 긍정의 체념의 심리 스릴러 [유진모 칼럼]
'물비늘', 상실적 집착과 긍정의 체념의 심리 스릴러 [유진모 칼럼]

지윤은 집에 있기 싫다고 고백하고 예분은 장례식장에서 함께 지내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고, 예분은 여전히 강가를 헤맨다. 지윤은 이번 수영 대회에서 입상해야 기숙사가 있는 여고에 진학할 수 있다. 그래서 대표 선수에 선발되는 게 최우선 목표이다. 하지만 코치는 키도 안 자라고 실력도 늘지 않는다며 부정적이다.

강 위로 커다란 다리가 건설 중이다. 이제 예분이 강에 나가 금속 탐지기를 휘저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위가 찾아온다. 출산을 앞둔 현경이 서울 집에서 예분을 모시고 싶어 한다는 것. 그렇게 예분은 짐을 싸고, 그것을 본 지윤은 밖으로 나간다. 예분은 우연히 지윤의 가방을 열어 보게 되고 거기서 수정의 머리핀을 발견하는데.

수정의 죽음 이후 예분은 지윤을 추궁하지만 지윤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심지어 남 모르게 정신병 약을 먹을 정도로 심리 상태가 불안정하다. 아빠가 곧 오리라는 말도, 수정의 죽음에 대해 모른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도대체 지윤은 무엇을 숨기는 것일까? 왜 숨기려는 것일까? 그녀가 아는 한도는 어디까지일까?

예분은 왜 무모하게 1년째 수정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 염습사로 일할 정도면 시체가 벌써 떠내려 갔을 것쯤은 잘 알고 있을 텐데. 설혹 유품 하나를 건질지라도 그게 그녀의 죽음의 원인과 진실을 알아내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될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이 영화는 상실, 가족, 관계 등의 키워드로 압축된 후 삶과 죽음으로 종결된다.

'물비늘', 상실적 집착과 긍정의 체념의 심리 스릴러 [유진모 칼럼]
'물비늘', 상실적 집착과 긍정의 체념의 심리 스릴러 [유진모 칼럼]

모든 동물, 특히 인간의 세계는 가족에서 출발한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변전하고 왜곡되어 간다. 사람은 늘 후회한다. 정작 곁에 있을 때는 모르다가 그 사람이 떠나가면 그제서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예분이 수정이 살아 있을 때 많이 사랑하고, 아껴 줬더라면 수정은 래프팅을 안 했을 것이다.

예분이 미친년처럼 금속 탐지기를 휘두르는 것은 그런 자책감과 후회 때문이다. 그것은 늦은 밤 스스로 어깨를 때리며 자학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의 자기 고문이다. 인간의 사회는 관계로 이어져 있다. 혈연, 지연, 학연, 인연, 비즈니스 등 모든 게 관계이다. 심지어 성행위조차 관계라고 표현한다. 그 관계의 시작이 가족이니 얼마나 소중한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자주 상실을 경험한다. 그중 가장 아픈 것은 가족의 죽음이다. 일부 있기는 하겠지만 연인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가족의 제사는 챙긴다. 부모이건 배우자이건 누구나 제사를 지내기 마련이다. 그건 그만큼 가족이 자신의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영향이 컸으며, 이래저래 깊게 결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은 일찍 장례 문화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유사한 시기에 신화와 종교를 차례로 만들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유물론적으로 사후 세계는 없다. 영혼 불멸을 외쳤던 플라톤은 시작부터 틀렸다. 유물론이나 의학에 근거했을 때 영혼은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육체의 부속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비늘', 상실적 집착과 긍정의 체념의 심리 스릴러 [유진모 칼럼]
'물비늘', 상실적 집착과 긍정의 체념의 심리 스릴러 [유진모 칼럼]

무신론자는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희망도 잃는다. 유신론자는 다음 생에서 만날, 실낱 같은 희망을 품는다. 예분도, 지윤도 확실한 무신론자이다. 알고자 하는 의도와 감추고자 하는 저의는 다를지언정 두 사람의 고통은 같은 곳에서 시작해 같은 곳에서 끝난다. 예분은 가장 사랑하는 손녀를, 지윤은 가장 친했던 친구를 각각 잃었으니 얼마나 아플까?

그런데 예분은 수정이 살아 있을 때 애정 표현을 제대로 못 했기에 아프고, 지윤은 수영 선수임에도 수정을 지켜 주지 못했음에 고통스럽다. 꼭 수영 대회에 출전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수영 선수인 수정이 왜 익사했을까? 물은 양가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사람은 태아 때 양수 속에서 숨을 쉴 수 없지만 엄마로부터 탯줄로 공기를 공급 받는다.

그런데 태어나면 물속에서 당연히 살 수 없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지만 죽음의 장소이기도 하다. 적지 않은 나라에서는 시신을 물에 띄워 보냈다. 그리스 신화에는 레테와 스틱스가 있다. 물은 탄생의 장소이자 죽어서 돌아가야 할 영혼의 무덤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물은 공포의 대상이지만 사후에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런 이항대립을 통해 상실적 집착과 긍정의 체념을 이야기한다. 아름답게 이별하는 방식을 웅변한다. 지윤은 아버지가 오실 거라고 계속 거짓말을 늘어 놓으며 옥임의 장례를 미루지만 예분은 "이제 보내 주자."라며 강행군한다. 대단한 심리 스릴러 한 편이 나왔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색은 관객을 상념의 개여울로 안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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