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선균과 존재와 시간과 無 [유진모 칼럼]
故 이선균과 존재와 시간과 無 [유진모 칼럼]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해 12월 27일 배우 이선균이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세상의 모든 존재자는 본능적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즉 아등바등 생존하고자 한다. 그런데 왜?

고인은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조사 중 그는 마약이 아닌, 수면제인 줄 알고 투약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그는 모든 투약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았다. 경찰 입장에서는 몸이 달았을 듯하다. 애초에 경찰은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게 아니라 고인이 다니던 유흥업소 여자 실장 A 씨의 진술만으로 공개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3차례의 수사 과정을 통해 이선균을 둘러싼 치욕적인 내용들이 흘러나왔다. 사건의 본질은 마약 투약인데 투약의 명확한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은 채 본질과 상관없는 자극적인 내용만 노출되었다. 오죽하면 신평 변호사는 고인의 죽음에 경찰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는 의견을 냈다. 고인은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하자고 제안했을 정도이다.

이선균 사망 후 그에 대한 애도가 줄을 잇는 가운데 그의 고운 심성과 곧은 인격을 칭송하는 증언들이 쇄도하고 있다. 마약 투약 혐의가 제기되었을 당시 그동안 그가 보여 온 '바른 생활' 이미지를 비아냥거리는 글들이 온라인을 도배했던 것과는 반대 되는 방향으로 여론이 형성되었다. 즉 생전에 굳어진 이미지가 사실 그의 실상이었음을 알린 것.

철학계 혹은 사상계에서 존재론은 영원한 숙제였고 탐구의 대상이었다. 일찌기 플라톤은 '영원 불멸'이라며 존재론을 열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체적으로 계승했으며 마르틴 하이데거와 장 폴 사르트르를 통해 절정의 꽃이 만개했다. 이선균은 사람이라는 존재자이다. 지구에는 81억 명이 넘는 인간 존재자가 존재하고 있다.

그들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 그리고 사상은 제각각이지만 거의 통일되는 한 가지를 뽑으라면 생존이 첫 번째일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내달리지만 그것을 어릴 때부터 의식하는 이는 거의 없다. 굉장히 아프거나, 사고를 겪거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야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준비하지 그 전에는 그럴 일이 없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고자 경주한다. 또한 잘 살고자, 잘살고자 경쟁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를 본래적 존재(육화되기 전)-현존재(현재)-도래적 존재(죽음 이후)로 나누어 시간성을 부여했다. 원래 존재하던 나라는 존재자는 육체를 얻어 세계에 피투되었고, 언젠가 죽어서 도래적 존재가 되어 결국 본래적 존재로 되돌아간다는 이론이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보다는 하이데거의 스승인 에드문트 후설쪽으로 기울어 현상일원론에 정초해 대자 존재와 즉자 존재라는 이론을 정립했다. 즉자 존재는 하이데거에 대입하면 현존자이다. 사물 그 자체, 더 나아가 아무 생각 없는 인간 존재 자체이다. 대자 존재는 의식을 말한다. 만약 내 의식이 육체 밖으로 나와 나를 바라본다면 그게 대자 존재이다.

그레서 '존재'는 즉자 존재이고, '무'는 대자 존지이다. 종교도, 철학도 모두 인간이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 둘은 유사하다. 신이란 무엇일까? 종교는 특정 신을 상정하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신이 어떤 윤곽이 있는 존재자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섭리 같은 존재(현상)라고 주장한다.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고인 입장에서는 한때의 실수가 자신의 명예를 하루아침에 땅속에 쳐박고, 가족에게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준 게 괴로웠을 것이다.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그냥 존재자, 즉 즉자 존재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만천하에 본질은 사라진 채 천박한 실수 이야기만 도배될 때에야 비로소 존재자 밖으로 나와 대자 존재의 시선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이선균이라는 존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때 이선균이었던 존재자는 본래적 존재로 되돌아가 어떤 현상 안에서 도래적 존재로 존재할 것이다. 그건 우리의 의식의 영역을 포함할 수도 있다. 그 의식 속에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이선균을 추모하는 것만으로는 그가 안긴 감동과 남긴 교훈에 보답하기에 부족하다.

먼저 경찰은 신 변호사의 충고를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경찰의 수사 방식을 간통죄가 현존할 당시의 포르노 소설 같은 수사 기록에 비교했다. 물론 경찰은 합법을 주장했고, 그것은 합법적인 듯하다. 하지만 법이 만능이 아님을 웬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법도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헌법 재판소가 왜 있겠는가.

이선균은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배우로서 일가를 이루었으고, 드라마에서 회당 2억 원을 받을 정도로 부를 축적했으며, 행복한 가정도 일구었다.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전 세계적 스타였다. 그런 그가 모든 기득권과 존재를 내던졌다. 그런 그를 애도하고 추모하는데 왜 딴죽을 걸까?

가수 최희준은 '인생은 나그네 길,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라고 노래했다. 이 노래의 제목은 '하숙생'이다. 현존재는 주인이 아니라 하숙생이라는 의미이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고, 존재자들이 계속 이어서 무가 되고 있다.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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