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꽤 오래 전 이야기 입니다. 어느 휴일 저녁, 약속이 있는 아내가 밥과 반찬을 어떻게 먹으라고 말해놓고 외출을 했습니다. 대충 들어보니 그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휴일 저녁인데도 아내를 내보내는 ‘대범한 남편’에게 아내가 대단히 감격하고 있을 거라고 저는 내심 흐뭇해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되어 제가 먹을 저녁식사 준비를 하면서 밥과 국을 그릇에 잘 퍼 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냉장고에 있다고 한 김치가 없습니다. ‘있다고 했으니 분명히 있을 텐데?’ 하고 다시 찾아 보았지만, 역시 없습니다.

아내에게 전화해서 물어볼까 했다가, ‘나는 어른이니까 스스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지만, 살짝 화가 납니다. 화를 삭이고 좀 더 찾아보니 있는 것이라곤 김치 통 속에 배추의 생긴 모양 그대로 있는 김치 포기뿐입니다. 당시 제가 보기에 이건 아직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집어 먹기 좋게 알맞게 잘라져서 그릇 속에 담겨있어야 비로소 김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혹시나 하고 포기 채로 들어보았습니다.  흐물거리고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시큼한 도시락 김치 국물이 밴 옛날 책가방 냄새가 납니다.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징그럽습니다.

저는 먹을 것도 준비해놓지 않고 나간 아내에게 비로소 화가 났습니다. 홧김에 떠놓은 밥과 국을 다시 쏟아놓고, 김치도 없이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기로 합니다. ‘대범하지만 불쌍한’ 저 자신을 위해 계란 한 개를 깨 넣는 위로를 베풉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는 왜 밥을 먹지 않았느냐고 묻겠지?’ 그래도 김치가 없어서 못 먹었다는 비밀은 절대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아마 당신이 차려주지 않아도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강한 남자’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하나.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된장이나 고추장을 퍼오라고 심부름 받았던 생각이 납니다. 장독대에 가서 항아리를 열어보니 파랗고 하얀 곰팡이가 슬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먹나? 여태 이런 걸 먹었던 거야? 에익 더러워!’ 그래서 빈 그릇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위를 걷어내고 속에서 한 주걱 퍼서 담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제게 그런 일을 다시는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제가 부엌일 심부름을 하기 싫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처럼 이런 부끄러운 추억을 가진 남편들은 하나 둘이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런 남편들에 대해서 가정 일에 무관심하고 아내를 도와주기 싫어하는 나쁜 남편이라는 ‘낙인’을 찍어놓은 아내들도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쉬운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쉬울 거라 지레 짐작하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간단한 것도 그것을 알기 전까지는 어려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활을 아무리 편리하게 해줄 수 있는 많은 전자제품들도 그 사용법을 알기 전까지는 오히려 골치만 아프게 하는 애물단지일 뿐이지 않던가요? 마찬가지로, 통 안에 있는 김치도 잘라먹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못 먹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 아내가 저에게 김치 포기를 국물이 떨어지지 않게 그릇으로 받쳐서 가져올 것과 김치를 몇 토막 내면 먹을 만한지, 또 김치 자를 때 쓰는 김치 도마가 따로 있다는 것과 여러 부엌칼의 용도가 각각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주었다면 저도 그날 저녁 기분 좋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마 설거지까지 해놓았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이냐고요? 하기 싫으니까 핑계를 만들어 뒤집어 씌우는 것 같은가요? 물론 그런 면도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남편의 가사분담에 대한 불만으로 싸우거나 아예 포기를 하고 사는 부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 이유는 (남편들의 잘못은 일단 제외하고) 그런 일들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고, 따라서 남편이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해놓은 설거지나 청소, 또 빨래를 널고 개고 해놓은 것을 보고서, 하기 싫으니까 마지 못해서 건성으로 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탓하거나, 그런 부탁을 하지 않기로 적정을 합니다. 그런데 부인 자신들은 그 많은 집안 일들을 언제부터 잘 하게 되었나요? 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대부분은 결혼을 하고 나서 또는 책임이 생겨서 관심을 기울이고 배우고 해서 익숙해진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집안 일에 관심이 없거나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남편이라면 잘 해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요? 그런 남편에게 (물론 실망이야 할 수 있겠지만)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는가요? 그리고 그 결과가 어찌 되었나요? 남편이 분발해서 점점 잘 하게 되던가요? 오히려 '나 몰라라' 하게 되지 않았나요? 제가 남자라서 남편들 편을 드는 것 같은가요? 천만에요! 남편이 집안 일에 관심을 가지고 좀 더 잘 하게 하려면, 좀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상대를 비난하거나 실망하여 포기하고 말면 (그 심정을 이해할 수야 있지만),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집안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남편의 '못된 마음'에 초점을 두지 말고, 남편이 ‘안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을 해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사람됨'을 고치려는 것 대신에 남편이 집안 일을 하는 또는 하지 않는 '방법'을 변화시키기로 목표를 바꾸라는 겁니다.

만약 제가 권하는 방법대로 해서 효과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착한 남편'으로 길들여져 가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효과가 없다면요? 그래도 일단 더 잃은 것은 없지 않나요? (그런 애를 쓴 부인의 낙담 정도야 있겠지만요.) 그래도 ​그 때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 다른 방법 한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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