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웡카', 자본주의 비판하는 대기업의 예쁜 동화 [유진모 칼럼]
'웡카', 자본주의 비판하는 대기업의 예쁜 동화 [유진모 칼럼]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잔혹 동화의 악동 팀 버튼은 2005년 영국 작가 로알드 달의 동명 아동 소설을 두 번째로 영화화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변함없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웡카'는 '패딩턴' 1, 2로 관객들에게 친숙한 폴 킹 감독이 연출한 그 작품의 프리퀄이다. 마술사이자 셰프인 윌리 웡카(티모시 샬라메)는 7년간의 항해를 마치고 '달콤 백화점'이 있는 대도시에 정착하려 한다.

그의 꿈은 달콤 백화점에 자신만의 초콜릿 가게를 차리는 것. 첫날 몇 푼 안 되는 돈을 주민들에게 탈탈 털린 웡카는 블리처의 제안으로 스크러빗 부인이 운영하는 여관에 들어간다. 초콜릿 제작을 배우느라 글을 못 배운 그는 스크러빗의 양녀 누들(칼라 레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약서를 확인 못 한 채 사인하는 바람에 수년간 세탁소에서 사역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같은 처지의 크런치, 벤츠, 처클스워스, 벨 등의 동료들을 만난다. 웡카는 자신의 기술을 이용해 거리에서 초콜릿을 팔고, 시민들은 열광한다. 그 지역은 슬러그워스를 중심으로 한 세 명의 자본가들이 초콜릿 연합을 결성하고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뇌물로 경찰서장과 줄리어스(로완 앳킨슨) 신부를 매수해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웡카에게 위협을 느낀 카르텔은 서장에게 노점상이 불법이라는 현행법을 상기시켜 그를 제지한다. 그러자 누들은 낡은 건물을 임대해 웡카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세탁소 동료들의 도움을 받은 웡카는 드디어 자기 초콜릿 상점을 오픈한다. 개점 당일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고 가게는 대성황을 이루지만 그것도 잠시, 초콜릿을 시식한 손님들의 몸에 변화가 생긴다.

'웡카', 자본주의 비판하는 대기업의 예쁜 동화 [유진모 칼럼]
'웡카', 자본주의 비판하는 대기업의 예쁜 동화 [유진모 칼럼]

카르텔이 스크러빗을 사주해 초콜릿에 독을 탄 것. 폭삭 망한 웡카 앞에 카르텔이 나타나 솔깃한 제안을 한다. 웡카는 물론 그 친구들의 빚을 모두 갚아 줄 테니 웡카에게 이 도시를 떠난 후 다시는 초콜릿을 만들지 말라는 것. 고아 소녀인 누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웡카는 누들을 지켜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배를 탄다.

한편 웡카를 괴롭히는 귀여운 악마가 있으니 그는 코코아 생산지인 움파룸파 랜드의 코코아 수호 병사였던 움파룸파(휴 그랜트). 그는 웡카가 코코아 열매를 훔친 것을 막지 못한 죄로 랜드에서 추방되었고, 이후 웡카 뒤를 쫓으며 계속 그의 초콜릿을 훔쳐 왔다. 도시를 떠나는 배에 승선한 웡카는 그러나 그게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인 것을 깨닫게 되는데.

외형은 뮤지컬과 판타지를 혼합한 동화이다. 요즘 가장 뜨거운 남자 배우 샬라메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게 주효해 전 세계적으로 흥행 중이다. 그는 결코 실망시키지는 않지만 음악적으로는 비주얼에 미치지 못하는 게 옥에 티이다. 대신 의외의 캐스팅인 그랜트의 귀여운(?) 연기가 부족함을 충분히 메워 준다. '찰리와~'의 움파룸파와의 비교도 재미있을 듯.

일단 이 작품의 미덕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일가족이 모두 만족할 만한 콘텐츠라는 점에서 그 값어치가 훌륭하다. '찰리와~'의 마니아라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버튼의 개성을 다른 감독에게서 바라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나 참조할 것.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대표 키워드인 초콜릿이 주인공인 게 아이러니할 만큼 메시지도 근엄하다.

'웡카', 자본주의 비판하는 대기업의 예쁜 동화 [유진모 칼럼]
'웡카', 자본주의 비판하는 대기업의 예쁜 동화 [유진모 칼럼]

이 작품 전체를 시종일관 관통하는 소재는 꿈과 현실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이념이 그렇듯 관념론과 유물론의 충돌이다. "좋은 일은 모두 꿈에서 시작된다. 꿈을 잃지 마라."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초콜릿과 사탕은 꿈이다. 그것을 먹고 충치가 생기는 것은 현실이지만 그것을 먹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정서적 세계의 향유이자 꿈으로의 가열찬 접근이다.

웡카는 만병통치의 초콜릿을 만든다. 육체의 핸디캡이나 정신적 고뇌를 치유해 준다. 초콜릿이 약도 아닌데. 그것은 단맛이라는 환상의 세계가 가진 관념론을 의미한다. 단맛을 즐김으로써 육체적 고통을 잊을 수 있고, 쇠잔한 정신 세계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말고 부단히 매진한다면 이겨 낼 수 있으리라는.

그런데 그 현실은 어떠한가? 법에 가장 공정해야 할 경찰 서장이, 도덕에 가장 청렴해야 할 성직자가 초콜릿과 돈에 중독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바로 대기업, 즉 자본이다. 자본주의의 상징성인 할리우드는 이렇듯 무시로 자아비판적 구도로 돈을 챙긴다. 세상은 아이러니하다. 초콜릿의 이중성 역시 세상을 휘감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어린이나 서민에게는 꿈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관념론적 희망인 초콜릿이 기득권자에게는 쾌락의 도구이고, 자본가에게는 권력의 앞잡이이다. 그래서 누들은 누누이 외친다. "욕심쟁이가 가난뱅이를 이겨."라고. 현실은 꿈을 가진 자들에게 야박하다. 웡카는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거리에서 희망을 품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벌금을 문다. '몽상 금지'가 법이다.

'웡카', 자본주의 비판하는 대기업의 예쁜 동화 [유진모 칼럼]
'웡카', 자본주의 비판하는 대기업의 예쁜 동화 [유진모 칼럼]

물론 상업 영화의 공식대로 '착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이곳에선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다."던 허황되어 보이던 테제가 결국 웡카와 친구들의 재능과 노력으로 결실을 보고, "좋은 초콜릿은 단순하다."라는 명제 역시 웡카의 순수한 인성으로 그 의미를 인정받는다. 귀족에 약한 스크러빗의 노예 근성은 결국 폐망의 길로 인도하는 길라잡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초콜릿이 아니라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다."라는 웡카 어머니의 유언은 '가장 맛있는 술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랑 먹느냐에 달려 있다.'라는 우리 격언과 비슷하다. 왜 웡카는 문맹일까? 누들의 어머니는 도서관에서 살며 일하는 사람으로 밝혀진다. 글을 몰라 여러 번 죽을 뻔했던 웡카는 결국 글로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고 세상을 바꾼다.

매 장면마다 왠지 저우싱즈(주성치) 감독-주연의 '쿵푸 허슬'(2005)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롤리팝이 겹쳐지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결론은 저우가 천재라는 것. 이제 관념론과 유물론의 이항대립의 결말. 누들의 가장 큰 적은 그녀의 삼촌이다. 관념론의 승리인가? 웡카는 커다른 공장을 자려 움파룸파를 고용한다. 이항대립이 공존해야 현사실적 세계가 존재한다.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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