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위해] 늘 지하철을 이용하는 필자는 급변하는 세태나 환경을 밀폐된 채 이동하는 그 공간 속에서 읽곤 한다. 최근 누구라도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급격한 변화는 바로 노년 인구의 급증이다. 널찍이 개방된 공간이라면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한 타인의 존재나 그의 일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지하철은 그 특성상 누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직, 간접적으로 알거나 알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내가 독점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므로 항상 양보와 존중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승차 순간처럼 의무처럼 주어진다. 그러므로 옆이나 앞의 승객, 즉 나와 하등의 관련이 없는 타인이라도 그를 살피는 것은 이타적 행위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50을 넘긴 필자가 하지 근육 단련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그 시작점이 옆에 서 있던 노인을 본의 아니게 밀어붙여 그를 거의 넘어지게 만든 직후다. 손잡이를 놓고 책을 보던 순간에 달리던 열차는 갑자기 멎었고 왼편으로 쏠린 필자의 옆에 할머니가 서 있었다. 필자에게 밀린 작은 할머니를 내가 잡았고 그럭저럭 우리 둘은 균형을 잡고 호모에렉투스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연신 사과를 하는 필자에게 할머니는 그저 괜찮다고 하신다. 미안하고 창피하고 계면쩍어 몇 번 그분의 상태를 살핀 후 자리를 떠났지만,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필자는 부끄럽다.

이제 손잡이에 기대지 않은 채 두 다리로 버티던 시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50줄에 들어선 필자가 이 지경인데 과연 노인분들은 어떨까. 승강구도, 계단도 그들에겐 그저 버겁다. 더욱이 필자의 큰 형님, 큰 누나 뻘 되는 그들은 앉을 자리도, 양보받을 자리도 없는 형편이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노인이 과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이 대한민국이 여지없이 고령화 시대가 되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앉을 자리가 없으니 할머니들은 전철 선반을 지지하는 봉을 잡고 힘겹게 매달려 간다. 두 손으로 부여잡은 봉이건만 힘에 부치는 할머니들은 전철의 움직임에 따라 봉을 잡고 휙휙 돌아간다. 이를 보다 못해 기사도를 발휘, 자리를 양보하고 봉을 잡은 할아버지들 역시 봉을 잡고 흔들린다.

현재 60살 전, 후인 베이비 세대들은 10년 이내에 확실한 노년층으로 자리매김할 것이고 필자도 슬며시 그 줄의 뒤에 설 것이다. 필자 역시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봉 잡고 봉춤을 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 거다. 노년에 대비할 것은 재정 자립뿐 아니라 홀로 서거나 홀로 걷는 독립 및 독보 자립도 포함해야 한다. 최근 운동생리학 분야의 최대 화두는 노인의 전도(넘어지는 것)를 막아 와상 생활을 방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필자 역시 이 부분의 연구를 열심히 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선 채로 버티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를 물리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별다른 저항 없이 건물 바닥에 서 있는 것과 흔들리는, 즉 상하좌우 저항을 받는 이동 수단 내에서 선 채 버티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먼저 전철 바닥에 발을 딛고 가만히 멈춰있는 상태를 생각해보자. 나와 내가 서 있는 물체 간 아무 일도 없듯 보이지만 실제는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작용하여 균형을 이룬 상태다. 발은 전철 바닥을 미는 힘을 만들고, 바닥은 체중이 실린 발을 위로 밀어내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힘을 가할 때 힘을 받은 물체는 받은 힘의 반대 방향과 같은 크기의 힘을 만들어 내는 데 우리는 이것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 한다. 넘어져선 안 된다는 필자의 신념이 중학교 물리 수업 같은 고리타분한 이론을 들춰낸 거다. 세월이 우리를 밀어내는 힘에 비해 거기에 반발하려는 우리의 힘이 부족해진 이유는 바로 하지 근육의 상실이다. 전철 바닥이 밀어내는 힘보다, 또는 지구(?)가 우리를 밀어내는 힘보다 우리가 버티는 힘이 강해야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지지 않으려 버티는 독자를 필자가 다음 호에 돕겠다.

▲ 박창희 교수

[다이어트 명강사 박창희]
-한양대학교 체육학 학사 및 석사
-건강 및 다이어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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