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 7월 개봉돼 8만 6712명의 관객을 동원한 미스터리 호러 ‘미드소마’(아리 애스터 감독)가 170분짜리 디렉터스컷으로 10월 3일 재개봉된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상을 주거나 평론가들이 극찬한 영화라면 대다수 관객은 고개를 돌린다. 흥행 성적과 평가가 매우 다른 애스터의 영화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애스터는 왜 20여 분을 더 늘려 재개봉을 시도할까? 이 작품은 충분히 충격적이고 무섭다. 그런데 귀신이나 괴물이란 작위적인 장치가 개입하지 않아 더 큰 공포를 준다. 상업영화의 구문론적 문법인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집단 간의 인식론이 정상과 비정상, 일상과 구토를 가름한다.
 
뉴욕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대니(플로렌스 퓨)는 인류학 전공 크리스티안과 사귀고 있다. 4년째 교제 중인데 둘 사이에 결혼이란 계획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고 현재마저 불안정하다. 크리스티안에게 그 관계는 관성적일 뿐이고 대니는 섹스에는 관심이 없고 정신적 도피처에 불과하다.
 
대니에겐 자신처럼 조울증을 앓는 여동생이 있다. 부모와 함께 사는 동생은 자동차 배기가스를 집에 연결해 집단자살을 한다. 부모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그런 집안 내력은 자매에게도 유전된 듯하다. 대니가 그 충격에서 허우적댈 때 스웨덴 교환학생 펠레가 자기 고향 호르가 문화 체험을 제안한다.
 

그렇게 대니, 크리스티안, 조쉬, 마크는 시골에서 공동체생활을 하는 호르가 마을을 방문한다. 이곳은 여름 한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다. 마을 인구라야 1~200명 남짓하다. 탄생한 아이는 부모가 아닌, 마을 공동체에 의해 양육된다. 당연히 혈연보다 호르가라는 공동체적 식구의 개념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18진법이다. 0~18살은 봄, 36살까지는 여름, 54살까지는 가을, 71살까지는 겨울이라 72살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그건 ‘절벽 의식’이라는 자살 제식으로 마무리되는데 그들은 그걸 매우 명예스럽게 생각한다. 새로 태어날 생명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려줌으로써 윤회를 믿는 것.
 
그래서 절벽 의식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생전의 자신의 얼굴을 없앰으로써 새로 태어날 생명의 새로운 얼굴을 인정하되, 그 안에 자기 영혼이 부활한다는 믿음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존재론이다. 그건 프래그머티즘을 만든 미국인에겐 매우 충격적이다.
 
모든 민족에겐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이 있다. 미국을 상징하는 동물이 독수리라면 호르가의 물활론은 죽은 고목에 조상의 영혼이 깃들어있다는 게 대표적인데 곰에 대해선 부정적인 애니미즘이 있다. 사람에게 공격적이고 피해를 주는 곰의 영혼을 악으로 규정,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을 내리는 것.
 

제도권 종교가 보기에 이 영화는 매우 불경스럽고 불쾌할 만큼 이교적이다. 그들에게도 루비 라드르란 경전이 있다. 그런데 룬 문자로 쓰인 이 경전은 성경과 달리 장애인의 낙서(추상화)로 도배돼있고, 뒷부분은 백지라 계속 업그레이드된다. 십계가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 율법이 거듭 추가되는 것.
 
그들에겐 성행위조차도 종교적이다. 근친상간을 피할 수 없는 인구이기 때문에 종족보존을 위해선 이번처럼 타지의 사람들을 끌고 와 번식에 이용하거나, 제식에 희생양으로 바친다. 근친상간은 신탁에 의해 필요할 때만 허락한다. 그럼으로 탄생한 장애인은 조상신의 신탁을 경전을 통해 고지한다.
 
이 신비주의는 오르페우스교를 계승한 피타고라스를 연상케 하고, 꽃과 식물 뿌리 등으로 만든 묘약을 통해 환각을 경험하는 제의는 다분히 디오니소스적이다. 그들의 체계는 모계사회고, 섹슈얼은 자웅동체인 헤르마프로디토스를 추구한다. 즉 인간이 신을 능가할 수 있었던 원시시대를 추구한다.
 
그렇다면 왜 대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그녀의 여동생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데 뮌하우젠 증후군을 보인다. 그런데 심리학 전공자인 대니 역시 똑같은 증상을 나타낸다. 가족이 있어도 외로운 현대인.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고통과 두려움 없이 존중을 받으며 사는 삶, 즉 진정한 식구에 있다.
 

호르가 화장터의 불은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 그들은 조화와 균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즉 천지창조론을 믿지 않고 조상신을 섬기면서 각자의 삶과 죽음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죽음으로써 순환을 만들고 그 순환고리에서 내가 부활해 부족의 생존을 이어가는 것이다.
 
펠레는 수시로 자기 부모도 화재로 죽었다며 동병상련으로 대니를 위로한다. 그의 부모는 절벽 의식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풍습에 따라 화장된 것인데. 그건 고통받는 대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또 다른 제의일 뿐이다. 대니는 여주인공치고는 몸매도 옷차림도 그리 돋보이지 않는다.
 
호르가는 가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미국적 개인주의도 거부한다. 철없는 크리스티안(이 작명의 의도는 적나라하다)이 제식에 동참하겠다며 “저기 껴도 돼?”라고 묻자 펠레는 “넌 미국인이잖아, 왜 안 되겠니”라고 말하는 데서 통렬함이 느껴진다.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강렬한 주제다.
 
다분히 동양적인 “인생은 주기고 삶은 원”은 “내 것, 네 것으로 싸우지 않는 세상”이란 공산주의 이념으로 귀결된다. 대부분은 젊은이가 강제로 노인을 요양원에 보내지만 호르가 노인은 후세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 모든 사람이 함께 정화의식을 치르는 시퀀스다. 마지막 대니의 미소는 해탈이다.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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