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멜로 영화의 장점이 연인끼리 별다른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고, 커다란 기대도 심한 실망도 없이 적당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라면 단점은 파격적인 감흥은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러브 액츄얼리’는 천편일률적인 틀에서 벗어난 감동의 스테디셀러로서 오래 사랑을 받고 있다.

‘라스트 크리스마스’(폴 페이그 감독)는 연말의 캐럴과 함께 즐길 만한 로맨스로서 단언컨대 ‘러브 액츄얼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스파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등으로 입증된 페이그의 연출력은 재기 넘치고 엠마 톰슨이 쓴 시나리오는 기발하면서 울림이 심오하다.

영국 런던 외곽. 26살의 가수 지망생 케이트(에밀리아 클라크)는 유고슬라비아 이민자로 중국계 중년 여성 산타가 사장인 크리스마스 기념품 가게에서 일한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콜택시를 운전하고 언니가 변호사가 됐다. 엄마(엠마 톰슨)와 케이트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언니는 독립했지만 케이트는 같이 잘 남자를 못 만날 때 집에서 잔다. 그녀 앞에 어느 날 동양계 미남 톰(헨리 골딩)이 나타난다. 노숙자 쉼터에서 자원봉사를 한다는 그는 원 나이트 스탠딩을 즐기며 희망 없이 사는 그녀에게 어느덧 기다림과 설렘이란 감정을 주면서 사랑이란 걸 가르쳐주는데.

대개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는 전형적인 기승전결이 있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런 형식을 답습하는 듯하다가 돌연 다른 플롯으로 진행되며 주제의식을 펼친다. 먼저 유럽의 문제다. 수천 년 된 이집트의 문명까지 흡수한 그리스 문명을 이은 로마제국은 유럽은 물론 북아프리카와 중동까지 정복했다.

지금이야 확연하게 나뉘었지만 한때 프랑스와 독일이 한 국가였듯 유럽인들의 정서의 저변엔 유럽은 하나라는 생각이 남아있다. 유로화에서 보듯. 하지만 현실은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있다.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TV 뉴스의 브렉시트 관련 보도를 보여준다. 유럽과 미국이 안고 있는 딜레마다.

버스 안에 동유럽인,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타고 있는 걸 본 영국 청년은 “영어로 얘기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고함친다. 현재 지구촌은 인종차별과 박애주의, 국수주의와 글로벌리즘, 다수결 원칙과 소수의견 등이 대치 중이다. 우리나라가 보수와 진보의 이념대결로 일촉즉발인 것처럼.

고유문화의 정통성을 지키느냐, 재빠르게 변화에 편승하느냐의 난통을 살짝 거론하지만 그리 심각하게 다루진 않고 인종과 문화가 뒤섞이면서 느끼게 되는 가치관의 혼란이 강하다. 산타는 중국 본명을 밝히면서 전형적인 영국 신사 스타일의 중년 남자와 열애에 빠진다. 유럽의 현실을 설정한 것.

케이트는 27살에 요절한 영국 출신의 천재적 뮤지션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동경해 그녀 같은 대스타가 된 뒤 27살에 세상을 떠나는 게 꿈이다. 하지만 현실은 음악성도 가창력도 변변치 못해 오디션에서 매번 떨어진다. 생활이 성실치 못해 직장에도 오디션에도 매번 지각이다. 이런 ‘루저’가 없다.

그녀의 언니는 레즈비언이다. 유일하게 이 비밀을 아는 케이트가 언니의 승진을 기념하는 파티 때 가족들에게 언니의 정체성을 폭로하는 바람에 가족 모두가 서먹서먹해졌고, 자매 사이는 원수가 됐다. 그녀의 가게 인근엔 노숙자 돌봄 센터가 있고, 톰은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거기서 자원 봉사한다.

하룻밤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아무 남자하고 섹스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질 때조차 남자를 끌어들이는 케이트는 당최 개념이 없는 망나니다. 위생 관념도 없다. 그러나 톰의 집은 아무 데나 앉기 거북할 만큼 깔끔하고 잘 정돈돼있다. 케이트는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된다.

케이트는 대놓고 톰에게 잠자리를 요구하며 사랑을 고백하지만 톰은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가 지나치게 의존적이라며 배타적으로 밀어낸다. 도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게이? 케이트는 “사는 게 왜 이리 거지 같냐”며 자조하지만 톰은 “세상에 정상인은 없다”라는 테제로 위로한다.

또 “특별하다는 것 별것 아니다”, “사람으로서 사는 것은 힘들다” “난 누구인가? 그게 뭔 상관인가?”라는 철학적 명제를 계속 던진다. 주제 파악을 못 한 채 자신을 ‘저평가된 불운의 가수’라고 으스댔던 케이트는 비로소 많은 걸 깨닫고 노숙자를 위해 거리에서 노래 부르며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톰은 계속 “위를 봐”라고 외친다. 세상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고 잘난 체해봐야 그놈이 그놈이란 얘기다. 주눅들 필요도 없고, 으스댈 이유도 없다. 저마다 제 목소리를 높이지만 길지 않은 인생은 ‘오십 보 백 보’다. 위를 보면 세상이 달라진다. 거북목이 되지 말고 미래지향적이 되란 얘기.

파스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병원을 운영해나가기 위해 정치에 관여했다’며 소외를 거론했다. 케이트와 엄마가 정신병원에 다니는 건 소외된 이민자기 때문이다. ‘원래’는 없다.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 만물은 변한다고 했다. 수시로 들려오는 왬과 조지 마이클의 노래는 반갑다.

멜로의 외피를 쓴 103분의 짧은 영화 한 편이 이렇게 방대하고 심오한 삶의 지침을 담아내기 쉽지 않은데 각 시퀀스는 무척 재미있고, 반전은 전율할 만하다. 천방지축의 케이트의 캐릭터는 압권이고, 작가 겸 조연인 톰슨과 산타 역의 양쯔충(양자경)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즐겁다. 내달 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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