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코미디를 표방하지만 꽤 진지한 인생의 메시지를 담은 ‘시동’(최정열 감독)의 흥행 성패 결과에 따라 강혜정 프로듀서-류승완 감독 부부의 제작사 외유내강의 프로덕션 시스템이 큰 영향을 받을 듯하다. 전작 ‘엑시트’로 큰 재미를 본 외유내강이 그런 연출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게 확실히 입증됐다.

또한 ‘꼰대’와 청춘을 가르는 시금석도 될 듯하다. 이런 스타일에 ‘손발이 오글거린다’면 ‘아재’고 거리낌 없이 재미있다면 젊은이다. 서울 변두리. 배구선수 출신 홀어머니 정혜(염정아)는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진학하라고 하지만 고교 중퇴자 만 18살 택일(박정민)은 어떻게 독립할까 고민 중이다.

눈이 어두운 할머니와 둘이 사는 상필(정해인) 역시 유사한 처지의 둘도 없는 친구다. 그는 친한 형 동화의 소개로 고리대금업 회사 면접을 보게 돼있다며 택일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하지만 택일은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무작정 버스를 타고 도착한 군산터미널에서 가출 소녀 경주(최성은)와 대면한다.

시비가 붙지만 택일은 권투를 할 줄 아는 경주에게 일방적으로 당한다. 자신을 제압한 뒤 사라진 그녀를 쫓다가 ‘짜장면 홀에서 3000원’이란 간판으로 보고 장풍반점에 들어간 인연으로 배달 직원으로 취업한다. 공 사장, 주방장 거석(마동석), 배달 직원 구만 등이 한식구로 숙식을 같이 하며 산다.

경주는 찜질방에서 만난 또래의 소녀 2명과 합숙소를 마련한다. 그런데 그녀들이 남자들을 데리고 오자 반발한다. 경주는 겁 없이 그 오빠들에게 대들었다가 당한 뒤 쫓겨 장풍반점 앞까지 오게 된다. 택일과 구만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고 그 인연으로 그녀도 장풍반점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연출 스타일이 기존의 상업적 구문론과는 많이 다르다. 만약 의도했다면 향후 천재적 연출가로 성장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외유내강 같은 탄탄한 프로덕션 시스템이 완성도에 방점을 찍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단점은 스토리와 편집, 그리고 각 캐릭터들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

연기력에 시비를 걸 만한 배우들이 없음에도 시작부터 절반까지는 각 캐릭터가 유려하지 못하고 뻣뻣하고, 동선은 부드럽지 못하고 직선적이다. 키치적이고, B급영화 스타일이며, ‘허무개그’의 분위기마저 풍긴다. 그래서 어색하지만 신선하고, 매끄럽지 못하지만 기존과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택일이지만 거석 형, 아니 마동석이 결정적으로 영화를 살렸다. 사사건건 반항적인 택일을 한주먹에 기절시킬 정도의 완력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거석은 그 체격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짐작게 한다. 그런데 정작 필요할 때 그는 비겁하게 몸을 사린다.

경주가 입사한 날 환영식을 하자며 노래방에서 트와이스 노래를 부르고 새우깡 봉투를 끌어안고 살다시피 한다. 하지만 평소엔 말이 없거나 시니컬하기까지 하다. 알고 보니 그와 공 사장에게는 엄청난 사연이 있었다. 그런 거석의 말 못 할 인생사의 파란만장함을 마동석이 풍부하게 담아냈다.

두 사람의 숨겨진 사연은 택일, 상필, 정혜, 경주, 구만 등 이 작품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루저’로서의 거미줄 같은 삶의 방사상 안에 걸려있다. 정혜는 한일합섬이란 회사 로고가 선명한 유니폼을 입고 뛰던 현역 시절의 사진을 집에 걸어놓고 있지만 택일은 ‘후보 주제’라고 그 커리어를 비웃는다.

상필은 금융 일을 한다지만 사채업자다. 은행 문턱을 넘을 수 없을 만큼 형편이 안 좋아 고리를 무릅쓰고 사채를 빌려 쓰는 서민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서민이라니! 구만은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상필의 어머니는 10년 전에 죽었지만 할머니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데다 상필을 못 알아본다.

시동은 시작이지만 유지돼야 차량이 계속 운행될 수 있다. 주인공들은 작은 스쿠터나 조금 오래된 경차다. 거석 형은 배기량은 높지만 고급 세단이 아닌, 트럭이나 견인차다. 차종이 그렇듯 거기에 승차할 사람들도 다 서민이다. 그들이 가는 길은 꽃길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땀내 나는 산업 도로다.

택일이 정혜로부터 받은 학원비로 신 중고 스쿠터 전면에 벤츠 스티커를 붙이는 식이다. 마음은 메르세데스를 타고 싶지만 현실은 언덕마저도 오르지 못하는 중고 스쿠터다. 그래도 그들은 가야 한다. 택일의 ‘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라는 대사다. 인생에 상류나 하류는 없다. 의식이 만들 뿐.

재벌의 삶도 빈자의 삶도 모두 소중하다. 샥스핀을 먹는 사람이나 자장면을 먹는 사람이나 그게 입맛에 맞으면 행복이고, 배불러서 흡족하면 그만이다. “학교가 뭐가 중요해, 사람답게 살면 되는 거 아냐?”라는 절규가 그렇다. 남이 한다고 할 게 아니라 내 적성과 사정에 맞춰 사람으로 살면 된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는 광고 카피가 연상된다. 게 맛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듯 관객이 인생을 모를 리 없는데 왜 자꾸 많은 영화가 인생을 가르치려 들까? 왜 상필의 할머니는 멀쩡한 등을 켜지도 않은 채 밤을 까는 것일까? 안다고 항상 염두에 두는 건 아니다. 그래서 확인시키려는 것이다.

관객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알지만 잊고 있던 것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 무릎을 치게 돼있다. 감독은 ‘세상만사의 작동원리를 코스모스에 종속시킴으로써 낙천주의를 합리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라이프니츠를 깨달은 걸까? ‘계속하다 보면 어울리는 일이 된다’는 질서의 순리가 따뜻하다. 1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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