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소네 케이스케의 동명의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김용훈 감독)은 해외에서의 수상과 호평대로 한국 하드보일드계에 한 획을 긋는 수준이다. 원작의 얼개가 좋고, 각색도 나름대로 훌륭한 데다 특히 군더더기 없는 연출이 매우 주목할 만한 감독의 탄생을 알린다.

중년의 가장 중만(배성우)은 아버지가 물려준 횟집 사업에 망한 뒤 호텔 사우나에서 야간 ‘알바’를 하며 생계를 잇는다. 그의 아내 영선(진경)은 국제여객터미널 청소부로 일하는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순자(윤여정)와 사사건건 부닥친다. 중만은 라커를 점검하다 나온 루이 비통 가방을 열어본다.

빳빳한 5만 원 권 뭉치들로 채워져 있다. 당황해 일단 보관창고에 잘 은닉해둔다. 그보다 어린 지배인은 고작 몇 분 지각하는 것으로 트집을 잡더니 결국 해고를 선언하고, 중만은 지배인의 눈을 피해 간신히 가방을 자기 집으로 가져와 숨긴다. 출입국관리소 공무원 태영(정우성)은 사채 빚이 있다.

연인이 사채를 빌려 튄 뒤 연락을 끊었기 때문에 잔인한 사채업자 두만(정만식)에게 독촉을 받으며 생명이 위험한 것. 그는 사고를 친 뒤 해외로 튀려는 친구 동팔이 가진 10억 원을 가로채기 위해 동생 붕어를 포섭한다. 그런데 붕어가 두만에게 그 사실을 귀띔해 태영이 난처한 상황에 봉착한다.

젊은 주부 미란(신현빈)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큰 빚을 지고 남편의 무시와 폭행에 시달리는 가운데 유흥주점에서 접대부로 일하며 빚을 갚고 있다. 손님으로 만나 연인이 된 중국 출신 불법체류자 진태(정가람)에게 자기 처지를 털어놓는다. 진태는 남편을 죽이고 중국으로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유흥주점 사장 연희(전도연)는 한 접대부의 매매춘을 요구하는 한 ‘진상’ 손님을 통쾌하게 제압한 뒤 그 접대부에게 봉투를 건네며 잠시 쉬다 오라고 친절을 베푼다.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 한 명이 태영에게 동팔의 사진을 보여준다. 자신이 고교 선배라는 그는 동팔을 잡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데.

원작을 안 읽었더라도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한 각 등장인물들이 후반으로 가면 밀접하게 얽히고설키리란 짐작은 누구나 가능하다. 그런데 그걸 엮고 풀어나가는 과정이 유려하다. 전도연은 ‘피도 눈물도 없이’로 돌아왔으며 정우성은 의외의 캐릭터를 만들고 배성우의 연기는 신뢰를 벗어나지 않는다.

무대가 되는 평택항은 주인공들과 동격이거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소비와 절제, 화려함과 소박함, 합법과 불법이 공존하고, 그게 다른 게 아닌 인과율이란 한 몸이란 점이 이 영화의 존재의 이유다. 탈레스 이후 철학자들은 삶의 궁극과 목적론을 탐구하고 고민했지만 자본주의로 인해 무의미해졌다.

삶의 목적은 행복인데 각자 행복의 기준이 뭣인가를 논의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돈이면 되는 세상. 의리도, 사랑도, 정의도, 도덕도, 법마저도 돈 앞에서는 모든 게 무의미한 무용지물인 세계. 그 속에서 저마다의 고민과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짐승들의 얘기는 처절하고 치열하지만 저열하다.

주인공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보기 드문 캐릭터도 아니다. 전부 허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못 봐줄 만큼 이상한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다윈주의자들이다. 적자생존, 자연선택과 자연도태. 형제들을 모두 잡아먹은 뒤 유일하게 탄생하는 샌드 타이거 새끼다.

인트로에선 커다란 루이 비통 가방이 클로즈업되고 카메라는 줄곧 그걸 훑는다. 도구나 사물이 내게 꼭 필요하고 썩 잘 어울려서 가치가 부여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비싸기 때문에 존귀함을 부여받는 풍토. 그게 명품의 정체성이고, 명품으로 부를 과시하려는 허영심이 통용되는 자본주의의 구도다.

순자는 특별하게 부각되진 않지만 꽤 중요한 인물이다. 자신만의 과거에 갇혀 살며 아무도 믿지 않으려 하지만 희망은 잃지 않았다. 낙심한 아들을 향한 “두 팔과 두 다리만 멀쩡하면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은 의례적인 위로가 아니라 종교적 믿음이다. 한국전쟁을 그렇게 이겨냈으니까.

두만은 가장 악해 보이지만 그의 모든 악행은 그저 ‘생활의 발견’일 따름이다. 그가 몸담은 세계에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형제를 잡아먹지 않으면 자신이 잡아먹힌다. 악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다 보니 악해진 것이다. 야비한 지배인과 비교하면 별로 나쁠 게 없다.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인물들이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 한 명으로 인해 한 포인트로 모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속임수 따윈 밥 먹듯 우습다. 마치 자신이 최후의 샌드 타이거라고 저마다 주장하듯 속고 속이며 거액의 돈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툰다.

기시감을 주는 각 인물들은 현실 대입이 가능하다. 태영은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챙기다가 실리도 명예도 모두 잃은 비리 공무원이다. 두만은 곧이곧대로 불법 사채업자로 볼 수도 있지만 일종의 지역 유지로 치환해도 무방하다. 정치 세력을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다. 깡패나 정치인이나.

우리는 흔히 육지의 최고 포식자는 사자, 바다의 그것은 상어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상위 포식자는 물론 특별한 천적이 있으니 바로 동족이다. 사람들은 법과 질서를 어겨가면서까지 생존을 추구하지만 결국 자연법, 진화론 혹은 운명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결론이 섬뜩하다. 1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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