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2017년 개봉돼 138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스릴러 코미디 ‘해피 데스데이’(크리스토퍼 랜던 감독)는 아이디어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영화다. 소재 자체는 타임 루프라는 기존의 영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지만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코미디 장치와 반전이 썩 훌륭하다.

기숙사에서 로리와 함께 사는 여대생 트리(제시카 로테)는 어머니를 여읜 충격으로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다. 생일 파티 중 가면을 쓴 괴한의 칼에 숨지지만 다시 생일날 아침에 카터의 남학생 기숙사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가고 로리가 선물한 생일 축하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이렇게 그녀는 매일 똑같은 삶을 반복하며 2월 18일 자기 생일 속에 갇혀 살게 된다. 초반엔 미칠 듯이 괴로웠지만 반복될수록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나중에는 은근히 즐기기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매일 만취해 카터와 함께 잤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알고는 카터에게 끌리게 된다.

그녀는 사실 지금까지 매우 독선적으로 살아왔다. 부와 미모와 지성을 자랑하는 대니얼이 이끄는 여학생클럽의 일원으로서 뚱뚱하거나 못생겼거나 가난한 여학생들을 업신여기는 등 안하무인이었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트리도 무시했고, 유부남인 병원의 그레고리 교수와 불륜까지 저지르고 있다.

그뿐 아니라 남자관계가 복잡하다. 그레고리와 카터에게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지만 외면당한다. 자신을 죽인 살인범이 쓴 가면은 베이필드 대학의 마스코트라 교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고리의 사무실에서 뭔가를 뒤지던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문제의 가면을 발견하는데.

3번의 반전은 예측 가능한 것도 있지만 매우 기발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허탈한 면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테의 퇴폐미를 살린 캐릭터와 주변 에피소드가 주는 재미가 썩 괜찮다. 주제는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 그리고 불친절 등이다. 트리는 아버지의 축하 전화를 무시하는 등 외면한다.

엄마의 죽음이 아버지 탓은 아님에도 멀어지려 안간힘을 쓰고, 하나밖에 없는 딸을 애틋하게 사랑하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몰라준다. 룸메이트로서 그녀는 로리에게 최악이다. 그럼에도 로리는 정성껏 케이크를 만들어주지만 소용없다. 다이어트에 집착하고, 그렇게 가꾼 외모로 남학생들을 유혹한다.

이는 현대인들의 불친절함과 이기심에 대한 비판이다. 지혜나 지성은 훌륭한 것이다. 현대인에게 높은 교양은 훌륭한 덕목이고, 그들만의 상류 리그에서 필수 사항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갖추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게 있으니 돈과 외모다. 돈은 곧 혈통과 사회적 지위 등 계급을 만들어주는 조건이다.

매일 괴한에게 살해당한 뒤 숙취에 휩싸인 채 처음 만난 남학생의 방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옷을 입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간 뒤 그날 밤 만취해 또 죽는 일이 왜 하필 그녀에게만 일어날까? 또 그런 타임 루프의 의미는 뭘까? 과연 그녀의 타임 루프는 몇 번이나 일어날까? 대체 끝낼 수는 있나?

카터의 방에는 ‘오늘은 네 남은 인생의 첫날’이란 문구가 적혀있다. 인생은 짧고 단 한 번뿐이니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자는 의욕적인 주의주의다. 그렇다면 여학생클럽 회원들은 허영심과 이기주의에 달떠 지금까지 헛되게 살아왔다는 결론이다. 트리에게 내일은 없고 고통의 오늘이 반복되는 이유다.

감독은 대놓고 프로메테우스와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빌려왔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죄로 헤파이스토스에게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만들게 해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아내로 선사했다. 그 후로 인간(남자)은 세상에 없었던 온갖 불행에 시달리게 됐다.

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보다 똑똑한 척(그의 이름은 ‘앞서 생각하는 자’)한 죄로 코카서스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매일 낮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혔지만 밤새 간이 회복되는 바람에 죽지 못하고 영원한 고통에 시달리다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에 의해 구원받은 후에 제우스에게 용서받는다.

그렇다면 여학생클럽은 당연히 판도라다. 영화를 보는 재미는 과연 매일 트리의 간을 쪼는 ‘독수리’의 정체부터 그녀가 구원을 받을 수는 있을지, 그리고 타임 루프를 깨뜨려주는 헤라클레스는 누구일지 등에 있다. ‘노동과 나날’은 불의가 만연된 세상에서 정직한 노동과 정의를 되찾자는 교훈시다.

헤로도토스는 동생 페르세스가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고도 욕심을 부리는 것에 분노해 농사도 할 수 있는 제철이 있듯 인간도 할 일과 안 할 일을 가리는 법도가 있다고 꾸짖고 있다. 트리는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학생인데 자신의 ‘노동’은 등한시하고 유부남과 불륜을 저지르는 등 문란하게 산다.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의 집에 있던 봉인된 금단의 항아리를 개봉하는 바람에 시기, 사기, 각종 질병 등 인류를 괴롭히는 모든 재앙들을 세상에 내보내는 큰 실수를 하고 서둘러 뚜껑을 닫지만 마지막 남은 희망을 꺼내주는 바람에 그나마 속죄를 한다. 트리를 타임 루프에서 구해줄 희망은 누구?

전형적인 캠퍼스 호러의 외형을 가장해 막상 전개되면 타임 루프의 상징성과 살인자의 정체를 찾는 미스터리 스릴러가 된다. 원래 회의주의였던 트리가 낙관주의로 변해 나체로 캠퍼스를 누비는 등의 재기 발랄한 코미디가 더해져 상큼한 재미를 준다. 단 평행세계를 도입한 속편은 흥행에 실패했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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