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31살의 조성빈 감독이 27살 때 찍은 독립영화 ‘비행’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대니 보일의 ‘트레인스포팅’(1996)은 물론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1998)까지 연상케 하는 ‘청춘 X 누아르다’다. 27살 근수(홍근택)는 형과 탈북한 후 중국에서 헤어지지만 천신만고 끝에 남측에 정착한다.

그를 담당하는 보호관은 나이키 운동화를 선물하며 정부가 준 정착금이 든 예금통장을 관리해 주겠다고 하고 자장면을 시킨다. 중국집 라이더 지혁(차지현)은 나이키를 흘깃 쳐다본다. 온갖 범죄로 복역 경험이 있는 그는 현재도 배달 나간 집에서 물건들을 훔치는 등 질이 안 좋아 사장과 갈등한다.

근수는 의무적으로 미용학원에서 수강을 하는 등 열심히 살려 노력하지만 자장면 배달을 왔다가 나이키를 훔쳐 간 지혁을 때려 경찰에 붙잡힌다. 절도 증거를 못 내민 그는 꼼짝없이 가해자가 되고, 경찰의 주선으로 100만 원에 합의를 한다. 하지만 당장 그런 큰돈이 없기에 지혁에게 끌려다닌다.

보호관이 저녁을 사겠다고 불러 나간 자리에서 근수는 자신 같은 탈북자 출신 사업가 영기와 제 또래의 성일을 만난다. 영기는 택시 타고 가라며 5만 원을 내민다. 그렇게 친해진 영기와 성일은 어느 날 근수를 불러내더니 마약 운반을 제안한다. 지혁에게 돈을 갚아야 하는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밀린 급여 문제로 사장과 사사건건 부닥치던 지혁은 근수가 수십만 원씩 갚아나가자 허파에 바람이 들어 대놓고 대든 뒤 근수의 아파트에 들이닥친다. 그곳에서 며칠 묵는 조건으로 나머지 받을 돈을 면제해 주겠다는 것. 그날 밤 근수는 필로폰을 찾으러 외출할 때 지혁을 데리고 현장으로 간다.

근수가 운반해야 할 필로폰의 현금 가치가 무려 20억 원이나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지혁은 자신이 판매할 테니 영기에게 주지 말자고 제안한다. 망설였던 근수는 그러나 중국에서 헤어진 형을 찾으려면 돈이 필요하고, 데려오더라도 정착금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성일의 전화를 무시하고 잠적하는데.

제작진의 청춘 X 누아르라는 장르적 명명은 ‘미래가 불투명한 상실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허무주의’ 정도의 의미겠다. 청춘과 누아르를 미지수의 값, 비속어를 가리기 위한 장치, 서로 다른 객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등의 의미를 지닌 X로 연결한 것도 같은 맥락의 ‘트레인스포팅’의 연장.

제목은 ‘하늘을 날다’와 ‘잘못된 행위’의 중의적 표현. 근수와 지혁은 이제 막 비행을 통해 독립하려는 자란 새다. 하지만 완벽한 어른이라기엔 아직은 미숙한 데다 타고난 ‘흙수저’다. 다행히 잘 날더라도 포식 조류에게 잡아먹히기 십상인 것. 그래서 그들은 날긴 날되 非行 혹은 卑行을 선택하는 것.

지혁은 “왜 넘어왔니?”라고 묻고, 근수는 “그냥 형이랑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라고 답한다. 근수는 “너도 집에 전화 한 통 하는 걸 못 봤어”라고 가족이 있냐고 묻고, 지혁은 대답을 못 한다. 확실히 지혁은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나쁘다며 ‘빨갱이’라고 표현하는 무지렁이는 아니다.

조금 부족하고 불만스럽더라도 고향에서 형하고 살지 왜 탈북 하느라 형과 생이별을 하고, 여기서 그런 범죄를 저지르냐는 의미다. 근수의 ‘이런저런’은 암시적이고 함축적이다. 두 사람은 기능론과 갈등론, 혹은 저항이론과 재생산이론의 충돌이다. 그들은 갈등론자이자 저항이론가로 설정돼 있다.

저항이론자는 지배 계층에게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과정에서 재생산이 진행된다고 보는 반면 재생산이론자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종함으로써 재생산 과정이 진행된다고 믿는다. P. 윌리스에 따르면 학교 정책에 반발하는 문화가 곧 노동 계급의 문화의 기저를 형성하는 이데올로기인 저항이론이다.

그러나 저항이론도 재생산이론도 모두 한계는 있다. 그래서 윌리스는 간파와 한계라는 개념을 통해 학교가 제시하는 이론의 근간이 기득권층에 있음을 ‘간파’함으로써 육체노동을 선택하고 사회관계를 재생산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기능론과 갈등론은 누아르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기능론에 따르면 이 사회는 유기체다. 과연 모든 사람들은 이 구조주의적 유기체 안에서 저마다의 꼭 필요한 기능인이 돼 제 역할을 해낼까? 적어도 근수와 지혁을 보면 기능론은 잘못됐다. 근수는 북측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북 했지만 남측에서도 겉돈다. 남측에서 태어난 지혁은 더욱 처참하다.

하필이면 왜 탈북자일까? 갈등론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사이를 그다지 평화롭지 않게 본다. 갈등론이 두 계층이 누릴 수 있는 물질적 풍요가 이미 정해져있다는 결정론적 입장을 채택한다면 기능론은 그걸 깨뜨릴 수 있다는 낙관론에 선다. 감독이 결정론일지 기능론일지는 장르에 답이 있다.

이토록 이 영화는 이원론적, 혹은 이분법적이다. 지혁은 정말 ‘양아치’의 끝장을 보여준다. 그의 꿈은 호주 이민이다. 그곳에 가면 세탁소만 차려도 한 달에 300만 원은 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소외당한 그가 자본주의를 넘어서 백호주의가 만연된 호주를 유토피아로 여기는 아이러니.

그런데 근수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겼던 그는 근수의 형이 태국에서 보냈다는 편지를 읽고, 빨래방에서 세탁기 돌아가는 걸 보며 변한다. 근수와 지혁이 추격자들을 피해 맨발로 줄행랑을 치는 시퀀스는 이 영화의 주제다. 세상은 삭막하고, 길은 험난하다. 지혁의 끝 대사가 ‘빵’ 터진다. 1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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