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간보다 엄마를 더 미워했는데…” [김주혁 칼럼]

김주혁 미디어파인 주필l승인2020.03.19l수정2020.03.27 23:14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미디어파인=김주혁 주필의 성평등 보이스]

▲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스틸 이미지

“엄마! 엄마!”
“너 왜 그러니?”
“엄마, 민석이 오빠가 잠깐 할 말이 있다고 자기 방으로 오라 그랬는데…. 엄마, 나 너무 아파. 무서워, 엄마!”
“됐어, 뚝 그쳐.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마, 너. 에휴, 다 큰 계집애가 어떻게 처신을 했길래.”
“엄마 그게 아니야, 아니야.”
“(‘찰싹!’ 뺨을 때리며) 떠들지 말고 입 다물어, 너! 창피한 줄 알란 말이야.”

15살 소녀가 집에서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2층에서 음악 감상 중이던 엄마에게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자 엄마는 딸을 달래주기는커녕 책임을 묻고 입막음에 급급한 반응을 보인다. 이나영(문유정)과 강동원(정윤수)이 출연한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나오는 장면이다. 유정에게는 성폭행 가해자보다, 매정한 엄마가 더 트라우마로 남아 버렸다.

▲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스틸 이미지

엄마를 증오하며 마지못해 살아가는 유정은 어느날 고모인 모니카 수녀의 손에 이끌려 교도소에 찾아간다. 예쁜 부잣집 여자와 고아 출신 사형수 남자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된다. 전혀 다르면서도, 살기 싫다는 생각만은 닮은 두 사람은 경계와 탐색의 과정을 거쳐 서로에게 끌리게 된다. 마침내 비밀로 간직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털어놓는다. 유정은 “나 세 번 자살하려고 했다. 15살 때 친척 오빠에게 강간당했다”고 고백한다.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윤수의 눈물이 유정의 상처를 아물게 한다. 윤수의 불행한 과거와 기구한 운명은 유정의 심금을 울린다. 서로를 의지하면서 그들의 절망감은 행복감으로 변해간다. 사는 게 지옥 같았던 두 사람은 어느새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았다. 매주 목요일 10시부터 1시까지 3시간의 면회시간은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Maundy Thursday’다. ‘세족(洗足)식이 있는 성목요일’을 뜻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와 함께 성폭력에 대한 우리사회의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폭력과 관련한 대표적인 편견은 피해자 책임(유발)론이다. 남성의 성충동을 자극한 여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이다. 잘못됐다. 살인, 강도와 마찬가지로 성폭력도 책임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있다. 또 괴한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많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아는 사람이 가해자인 경우가 훨씬 많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2019년 성폭력상담 912건 중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798건(87%)이다. 성관계에 있어서도 상대방의 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

▲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스틸 이미지

여러분은 만일 딸이 사촌오빠 등 아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소문이 두렵거나 지인을 처벌하기가 부담돼 영화의 엄마처럼 행동할 것인가? 아니다. 정답은 경찰에 신고해 사법처리를 받게 하는 것이다. 아는 사람끼리도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면 사법처리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확립해야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예방할 수 있다. 물론 당당한 대처에 앞서 “많이 힘들겠구나.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는 위로가 당연히 선행돼야 한다. 그래야 치유가 가능해진다.

◇명대사 “엄마는 안 죽을 거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그래서 왔어. 엄마를, 엄마를 용서하려고. 죽을 때까지 미워하면서 살려고 그랬어. 정민석 그 인간보다 엄마를 더 미워했는데, 지금 이렇게 용서해 주려고 온 거야. 혹시 하느님이 계시면 내가 엄마를 용서하는 게 나한테는 죽기보다 힘든 일이라는 거 아실 테니까. 나도 이렇게 희생 하나 바치면 무슨 기적이라도 일으켜 주실까봐. 그 사람 죽지 않게 해주실까봐. 엄마, 죽지 말란 말이야. 나 욕하고 괴롭혀도 좋으니까, 살아만 있으란 말이야.”(윤수의 사형 집행 결정 소식을 들은 유정이 엄마가 입원한 병실로 찾아가서 과거 성폭행 때 위로받지 못한 상처를 얘기하며)

▲ 김주혁 미디어파인 주필

[김주혁 미디어파인 주필]
가족남녀행복연구소장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양성평등․폭력예방교육 전문강사
전 서울신문 선임기자, 국장

김주혁 미디어파인 주필  myhappyhome7@naver.com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여백
미학적 포토갤러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5가길 28, 10층 1016호(적선동, 광화문 플래티넘  |  대표전화 : 02-734-8802  |  팩스 : 02-6383-0311 ㅣ 발행일자 : 2015년 1월 1일
등록번호 : 서울 아03542  |  등록일자 : 2015년 1월 20일 ㅣ제호 : 미디어파인 ㅣ 발행인 : 문수호  |  대표이사 : 이창석   |  주필 : 김주혁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창석
Copyright © 2020 미디어파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