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A.I.가 인간의 영역을 위협하는지에 대한 논제가 거론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이 시대 SF의 걸작은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리들리 스캇의 ‘블레이드 러너’다. 그 외에도 인간과 인공지능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영화는 작가들의 단골 메뉴로 자리매김했다.

‘바이센테니얼 맨’(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1999). 2005년 미국. 부자인 리처드는 집안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로봇 앤드류를 구매한다. 그런데 이를 조립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가 실수로 흘린 마요네즈 한 방울이 복잡한 회로 속에 떨어짐으로써 지능과 호기심이 생기고 이후 인간에 가깝게 진화한다.

앤드류는 창작품으로 돈까지 벌어들이는 가운데 점점 인간에 가까워지더니 리처드의 작은 딸 아만다에게 연정까지 품는다. 그러나 아만다는 사람과 결혼하고, 유일하게 자신을 가족으로 인정해 준 리처드가 사망하자 앤드류는 세상 어딘가에 자신과 비슷한 로봇이 있을 거라 믿고 그를 찾으러 떠난다.

마지막 여행에서 자신과 비슷한 ‘여성’ 로봇 갈라티를 발견한 앤드류가 그녀를 쫓아가 만난 사람은 안드로이드 제작의 대가 올리브 박사. 앤드류는 그동안 작품 활동으로 번 돈을 모두 올리브에게 투자하고 올리브는 최첨단 기술로 그의 외형은 물론 신체의 내부까지 인간과 거의 똑같게 재창조해 준다.

▲ '바이센테니얼맨'

‘진정한 인간성과 인격이 뭣인지, 그리고 이성과 감성과 창의력이 과연 인간만의 고유한 것인지’라는 담대한 질문을 던진다. 앤드류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달리 가족으로 인정하는 리처드를 통해 사랑을 웅변한다. 앤드류의 여정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한 인격체의 자아성찰의 로드무비다.

이보다 더 슬프고 주제가 더 깊은 영화는 ‘A.I.’(2001)다. 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하려고 기획했으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넘겨받았기에 일부 큐브릭 마니아들에게 ‘왜곡됐다’는 불평을 듣긴 했지만 다수는 스필버그 최고의 걸작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의 편리함에 대한 이기심이 이룬 과학의 발전이 만든 온실가스가 빙하를 녹여 가난한 나라는 멸망하고 부유한 나라만 살아남은 먼 미래. 하비 박사는 사이버트로닉스사를 통해 로봇공학 발전의 마지막 관문이자,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는 감정이 있는 10살 수준의 로봇 데이비드를 창조해낸다.

사이버트로닉스사는 기능을 시험하기 위해 자사 직원인 헨리와 모니카 부부의 집에 입양시킨다. 마침 이들은 외아들 마틴이 불치병으로 사실상 뇌사상태에 빠진 터라 치료 약 개발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그를 냉동 무덤에 보관한 채 슬픔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던 터라 데이비드로 위안을 받는다.

▲ 'A.I.'

인간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데이비드는 모니카를 엄마로 여기고 모니카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점차 그에게 모성애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마틴이 극적으로 기사회생해 집에 돌아오자 데이비드는 폐기처분될 위기에 처해지고, 그런 데이비드를 살리기(?) 위해 모니카는 인적이 드문 숲속에 버린다.

데이비드는 슈퍼 토이 테디 베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로봇폐기대회를 벌이며 광분하는 사람들도 보고, 인간의 노리개 역할을 하는 지골로 로봇 조도 만나는 가운데 그는 오로지 모니카가 얘기한 피노키오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파란 요정을 만날 꿈을 버리지 않는다.

여정 끝에 도착한 바다에 잠긴 뉴욕에서 그가 만난 사람은 그를 만든 창조자 하비 박사. 그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인간이 아닌 로봇임을 깨닫고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 속에서 파란 요정 석고상을 만난 그는 2000년 동안 인간이 되게 해달라며 기도하는데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와 인류는 멸망한다.

종교와 창조, 과학과 감성, 그리고 환경 파괴 등에 대한 담론이다. 박사는 무책임한 창조주에 대한 은유이자 이기적인 인간의 환유다. 모니카는 마지막 휴머니즘과 양심이다. 인류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 속에 환경을 파괴하고 수많은 종을 멸종시키고 있음에도 조금도 미안한 구석이 없다는 반성.

▲ '바이센테니얼맨'

인공지능(AI)은 인격을 갖출 수 없을까? 과연 인간성은 인공지능보다 지적일까? 인류는 기계가 생명력이 없다는 이유로 조금의 고마움과 미안함조차 갖지 않으며 동식물에 대해선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다. 심지어는 극한 생계의 위협이 없음에도 집에서 키우던 동물마저 아무렇지 않게 잡아먹는다.

천륜을 어긴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는 요즘이다. 큐브릭과 스필버그는 이 파멸의 시대를 예고한다. 그래서 조는 “여성이 두렵다. 나랑 자고 나면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라고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간성이 파괴된 사람보단 목적과 기능에 충실한 기계가 낫다는 강렬한 자아비판이다.

두 영화는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해 자아를 지각하지 못하는 로봇의 인격적 멀미를 통해 암울한 인류 폐망의 디스토피아를 예고하고 인류 본연의 원초적 노스탤지어를 긴 여정으로 푼다. 앤드류는 인류가 자신을 로봇으로 규정한 데 대한 인정으로 쌓인 내성을 창의력으로 극복해나가며 사람이 된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의적 판단을 파란 요정이란 희망에 기댄 오랜 선구자적 각성을 통해 최후의 인류가 된다. 앤드류는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하지만 데이비드는 ‘넌 누구냐’는 질문에 ‘데이비드’라고 초지일관한다. 두 로봇을 존재자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건 부모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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