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미국 DNI 리더 요원 맥콜은 아내를 잃고 작전 중 사망 처리돼 은거하던 중 어린 콜걸을 돕기 위해 러시아 마피아들을 일망타진한 바 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아내가 남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소설 100권을 단골 서점에서 구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점 여사장의 딸이 유괴되자 터키에 가서 구해온다.

현재 그의 직업은 보스턴의 콜택시 운전기사. 잠을 잘 못 이루는 그는 한밤에도 일을 하는데 온갖 군상들을 마주한다. 어느 날 매무새가 흐트러지고 눈물 범벅인 젊은 여자를 집에 데려다준 후 태웠던 고급 건물로 되돌아온다. 재벌 2세들이 인턴사원을 성폭행하고 촬영한 걸 알고 그들을 단죄한다.

단골손님인 80대의 유대 노인 새뮤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헤어진 누나와 재회하고, 누나의 초상화의 소유권을 되찾는 게 여생의 목표다. 맥콜은 자신의 정보망을 이용해 그의 소원을 이뤄주려 노력한다. 은퇴한 뒤 벨기에 브뤼셀에서 살던 동료 콜버트가 아내와 함께 자살로 위장된 채 살해당한다.

동료 중 맥콜과 가장 친한 수전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브뤼셀로 날아가지만 호텔에서 괴한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다. 또 수전 살해 용의자인 용병 2명이 숙소에서 거금을 남긴 채 폭사한다. 맥콜은 후배였던 데이브를 만나 이 일련의 사건들을 논의한 뒤 승객으로 위장한 암살자의 습격을 물리친다.

그는 수전의 남편 브라이언이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잽싸게 그를 빼돌린 뒤 진범 추적에 나선다. 한편 거리에서 마약을 팔던 이웃 청소년 마일스는 맥콜과의 약속을 지키려 깡패들과의 관계를 청산한 뒤 맥콜의 집에서 페인트칠을 하던 중 맥콜을 암살하려는 괴한들이 침입하자 큰 위기에 처하는데.

터미네이터(종결자)도 프레데터(포식자)도 아닌 ‘이퀄라이저 2’(같은 값, 안톤 후쿠아 감독, 2018)다. 법이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얘기.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대놓고 주장한다. 영화 후반부에 충격적인 반전으로 드러난 진범이 자기 합리화를 주장하자 맥콜은 똑같은 응징을 선언한다.

그가 읽는 책 중에서 크게 강조되는 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다. 부처의 어릴 적 이름을 한 주인공을 통해 ‘동시 동등의 인정’이란 주제와 강을 통한 해탈을 설파하는 이 책은 이퀄라이저라는 제목과 맞닿아 있다. 맥콜의 원래 집이 바닷가에 있다. ‘싯다르타’의 강을 바다로 살짝 변형한 것이다.

보스턴은 문화도시이자 공업도시다. 초인적인 전투능력을 지닌 동시에 꽤 심도 있는 서적에 탐닉하는 맥콜의 상징성이다. 해안 도시인 보스턴과 맥콜이 아내 생전에 빵집을 운영하며 살았던 해안 시골마을의 집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클로즈업되는 책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동성애를 유비적으로 앞세워 집착 등의 허망한 욕망은 부질없는 것이고 오직 창조적 예술만이 숭고하다는 것과 더불어 기억을 통해 시간의 상실을 막을 수 있다는 주제는 확실한데 이 작품 도처에 산재해 있다. 먼저 “모르는 사람을 도와준다고 공허함을 채울 순 없다”라는 대사.

그는 자비를 들여 터키까지 날아가 목숨을 걸고 유괴된 서점 주인의 딸을 구해준다. 그게 끝이다. 마찬가지로 처음 본 젊은 여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성폭행 범죄자들을 폭행한다. 피해자들에겐 자신의 무용담을 알리지도 않는다. 그는 과거를 잃었기에 외롭고 그래서 분리불안을 겪고 있다.

공식적으로 그는 죽은 사람이다. 시간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다. 그는 훌륭한 그림 솜씨를 지녔음에도 깡패들과 어울려 마약을 파는 마일스를 위해서도 목숨을 건다. ‘잃어버린~’의 주인공 마르셀이 사랑을 찾아서 오랜 시간을 방황하다 예술의 소중함을 깨달았듯 자신이 못다 한 꿈을 본 것.

그래서 그에게선 예술이 가장 위대하다는 니체가 엿보인다. 막강한 전투력에 의외의 지성까지 갖췄지만 예술적 영감은 제로다. 또한 베르그송의 순수지속도 드러난다. 그가 결혼반지를 아끼고, 해변 집 의자에 앉아 아내를 회상하는 건 그의 과거가 끊임없이 현재로 흘러들어온다는 순수지속을 뜻한다.

그건 결정론적 인과론이 아닌 시간의 지속이자, 지성적인 직관이다. 베르그송을 완성하기 위한 창조적 직관은 마일스를 구해줌으로써 이룩한다. 마일스 역시 마찬가지. 그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권투 천재였던 형인데 강도에게 가방을 안 빼앗기려다 총에 맞았다. 그는 형을 ‘신의 손’이라 부른다.

그건 곧 자신이자(예술) 맥콜(전투력)이다. 처음엔 “그림 그려서 먹고살겠어요?”라고 부정적이었던 마일스는 맥콜의 “총을 든다고 다 남자가 되는 건 아냐”라고 마치 프루스트가 마르셀을 통해 동성애와 예술을 대립시킨 것처럼 설득하자 서서히 변해간다. 그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를 그린다.

새뮤얼이 백인들의 편견 때문에 거짓말쟁이가 되고, 유대 여인 파티마의 정원이 동네 아이들에 의해 엉망이 되지만 맥콜과 마일스에 의해 모두 해결된다는 설정은 드레퓌스 사건을 곱씹게 만드는 동시에 흑인의 자존감을 느끼게 한다. 사무엘은 구약의 이스라엘 최후의 사제로 여호와의 부름을 받았다.

파티마는 성모 발현의 성지다. 두 유대인을 통해 하느님은 인도유럽어족보다 인류의 조상으로 추측되는 흑인을 더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맥콜은 마일스에게 “엄마도 백인도 원망하지 마”라고 훈계한다. ‘잃어버린~’의 모티프는 프루스트가 엄마에게 굿나이트 키스를 못 받은 데 대한 트라우마다.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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