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리 언크리치 감독, 2018)는 건국신화가 없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스타워즈’를 만든 미국이 그동안 업신여겼던 멕시코와 그들의 아즈텍 문명을 대놓고 동경한다는 고백록이다. 중미의 신화를 가져와 가족, 예술, 창작, 꿈, 기억 등의 키워드를 아름답게 펼쳐낸다.

멕시코의 작은 마을 산타 세실리아에서 대대로 신발을 만들며 살아온 리베라 가문의 소년 미겔은 전설적인 뮤지션 에르네스토를 우상으로 여기지만 가족의 결사반대에 부닥쳐 구두닦이로 산다. 고조할아버지가 음악을 하겠다며 아내 이멜다와 어린 딸 코코를 두고 집을 떠난 뒤 객사했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토의 비디오와 영화를 보며 직접 만든 기타로 독학해 상당한 실력을 갖춘 미겔은 가업을 잇는 데는 도통 관심 없다. 그에게 친구는 떠돌이 개 단테뿐이다. 그는 곧 다가올 망자의 날 축제의 음악 경연 대회에 참가해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으려 하지만 할머니는 그의 수제 기타를 부숴버린다.

그는 우연히 제단에서 고조할아버지의 얼굴이 찢긴 사진의 접힌 부분을 펼치고는 깜짝 놀란다. 거기엔 에르네스토의 기타가 있었던 것. 자신이 에르네스토의 고손자인 걸 확인한 그는 공동묘지에 숨어들어 에르네스토의 기타를 훔친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생령으로 변한다.

1년에 한번 있는 망자의 날에 저승의 유령들이 제사 음식을 먹고 가족을 살피기 위해 이승으로 건너가려면 금잔화 다리를 건너야 한다. 미겔은 때마침 다리를 건너온 가족 유령들과 만나 산 자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이멜다 고조할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다리를 건너 저승으로 간다.

이멜다를 비롯해 전 가족 유령은 그가 음악을 하는 걸 반대하며 금잔화 잎으로 축복을 줌으로써 이승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그러나 미겔은 ‘절대 음악은 안 된다’는 조건부에 반항해 그들의 축복을 거부하고 저승 세계로 숨는다. 그리고 에르네스토의 친구였다고 주장하는 사기꾼 헥토르를 만난다.

저승에도 망자의 날 축제가 있는데 음악 경연 대회와 에르네스토의 콘서트다. 미겔은 경연에서 우승함으로써 에르네스토를 만나 그에게 뮤지션으로서의 축복을 받고자 출전한다. 우여곡절 끝에 에르네스토를 만나지만 그의 음악의 꿈을 저지하고 이승으로 돌려보내려는 가족들의 훼방이 지속되는데.

세계사는 곧 유럽의 역사이듯 지구촌의 헤게모니는 유럽에서 전개돼 미국으로 전달됐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중남미의 피라미드를 이집트의 그것과 비교하며 스페인 등 서구 열강이 파괴한 마야, 아즈텍, 잉카 문명의 우수성을 설파하고 있다. 이 작품은 상술이지만 그걸 인정한다는 점에서 고결하다.

먼저 기억이다. 사람은 추억으로 산다는 통설이 있다. 경험과 그에 대한 기억은 모든 유기체의 생존의 방식이고 인간에겐 기억 중에 추억이란 특수한 상념의 개여울이 있기에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다른 동물에도 미래가 있긴 하지만 그걸 설계하고 예측하며 기대할 순 없다.

사후세계가 엄존한다는 설정은 거의 모든 종교와 신화를 따른다는 점에서 별로 새로울 건 없지만 가족의 기억이 망자를 영생하게 한다는 발상이 심오하다. 그건 망자적 시각이지만 곧 생존자들에게 요청하는 간구다. 셸리 케이건은 사후세계는 없다며 모든 종교와 신화의 영혼불멸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도 철학의 ‘마야의 베일’, 금강경의 ‘여몽환포영’, ‘장자’의 호접몽론을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이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활용해 사후세계도 이승과 별다름 없이 존재하고 진행되고 있지만 가족 중 산 자가 기억해 줘야만 영혼을 지속시킨다는 조건부 낙관론을 펼친다.

다음은 예술. 다분히 이성과 의지보다 감성이 중요하다는 주정주의 이념이 그득하다. 이멜다는 음악을 사랑했지만 딸 코코가 생기자 모든 열정과 희망을 코코로 옮겼다. 그녀는 남편이 명성 때문에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고 원망하지만 사실 남편은 가족의 생계와 자기 꿈을 동시에 이루려고 선택했다.

이 작품은 그 예술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굉장히 경건하게 숭앙한다. 멕시코 민요 ‘라 요로나’를 통해 로마(라틴)도, 에스파냐(라틴 음악)도 아닌, 중남미의 라틴 예술의 서정적 인력을 찬양한다. 미겔의 음악을 향한 열정과 고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러키, 즉 발전을 규정짓는 내재적 본능과 힘이다.

그의 의지는 ‘의지는 주인, 지성은 안내인’이라는 쇼펜하우어고, 주지주의를 비판한 베르그송의 ‘생명의 자유로운 창조적 진화인 생의 비약’이다. 주의주의 색채가 강하다. 생령을 이승으로 되돌리기 위한 관념론이 축복이라면 유물론은 멕시코의 국화인 금잔화라는 점이 재기 발랄하다. 멕시코의 찬가!

할리우드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결론은 가족이다. 가족이 양 극단의 대척점에 선 배경은 인식론의 차이나 오해에 있지만 결국 반목도 화해도 모두 사랑으로 가족을 지키려는 목적론을 향하고 있다.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유기견이 ‘신곡’의 작가 단테인 것은 ‘영혼의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를 뜻한다.

저승의 하늘을 나는 퓨마인 수호정령 알레브리헤의 이름이 페피타(씨앗)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단테와 함께 이승에 온 그는 귀여운 고양이로 변한다. 거리의 유기견과 유기묘 등을 사랑하라는 아름다운 메시지다. “세상은 기억으로 돌아간다”며 “가족보다 소중한 건 없다”고 매조지는 아름다운 동화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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