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독립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김희정 감독이 ‘열세살, 수아’,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설행-눈길을 걷다’에 이어 ‘프랑스 여자’로 내달 4일 관객과 만난다. 40대 중반의 미라(김호정)는 20년 전 배우의 꿈을 안고 프랑스에 갔다 쥴을 만나 결혼한 뒤 국적을 바꾸고 정착해 살다 서울에 돌아온다.

연기와 연출을 함께 공부했던 후배 영화감독 영은(김지영)과 연극 연출가 성우(김영민)와 매일 단골 카페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과거를 회상하는 일상을 보낸다. 그런데 그녀는 현재에서 갑자기 과거로 옮겨가는가 하면 또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현재로 되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의문이 발생한다.

아카데미 시절 영은은 동급생 혜란(류아벨)과 단짝이었고, 혜란은 동급생 성우와 사귀었다. 하지만 성우의 진정한 사랑은 미라를 향하고 있었다. 미라는 파리로 떠나기 전 성우와 함께 바다로 여행을 다녀오고 그 사실을 안 혜란은 배신감에 치를 떨다가 결국 미라가 떠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들의 술자리에 혜란과 외모도 성격도 비슷한 신인 연극배우 현아가 합석한다. 그러나 해럴드 핀터의 연극 ‘배신’을 소재로 영은과 현아가 신경질적인 대립을 한다. 영은은 또 미라와도 심하게 말다툼을 한다. 7살 어린 간호사와 결혼한 성우는 그러나 여전히 미라를 사랑한다며 잠자리를 원하고.

처음엔 여자들의 심리 상태를 소재로 한 드라마려니 지레 짐작하고 관람하다 보면 어느새 ‘이거 뭐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는 지점부터 작품은 판타지로 흐르더니 후반부의 충격적인 반전과 결말은 그야말로 미스터리 스릴러의 재미의 절정을 안겨준다. 독립영화가 아니라 상업적 문제작이다.

영은과 성우는 미라가 프랑스 여자 같다며 와인이 어울린다고 말하지만 정작 미라는 맥주만 마신다. 쥴은 미라의 후배인 어린 수희와 바람이 났고, 그래서 이혼했다. 성우에겐 과거엔 혜란이, 지금은 아내가 있지만 여전히 미라를 사랑한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그녀와 자고 싶을 따름일지도 모른다.

이런 설정은 부유하는 현대인을 의미한다. 스스로 어딘가 소속되고 싶으며, 실제 소속됐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디아스포라를 말한다. 미라는 “쥴이 나랑 결혼한 건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아시아 여자였기에”라고 술회한다. 신기함은 이내 식상함으로 이어지기 마련.

그들은 ‘서울은 너무 빨리 변한다’면서도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고 말한다. 사람 빼곤 다 변하지만 사람은 변하는 게 쉽지 않다. 이 작품에서도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다툰다. 미라가 8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은 또 변했다. 20년 전 받은 팔찌를 아직도 손목에 걸친 자신은 그대로인데.

주인공들의 단골 카페는 일종의 게토(유대인 거주지)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은 변함없는 생각과 열정으로 카페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연극, 영화, 인생 등을 논하지만 이제 그들은 20년 전에 발을 담갔던 강물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다. 저 멀리 큰 세상으로 흘러갔거나 그들이 흘러갔거나.

혜란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성우와 미라와의 관계가 원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녀는 평소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데 대해 분노했다. 성우가 한눈을 팔았기 때문도, 미라가 자신을 배신했기 때문도 아닌, 자신이 누군가의 확실한 ‘한 사람’이 아닌 데 자괴감을 느꼈고 생이 허무했던 것.

영은은 고통은 친구와 나누면 덜 수 있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낙관론자인 반면 미라는 인간은 철저하게 혼자라는 회의론자다. 그래서 영은에게선 삶이란 모든 게 잘 돌아가도록 신이 미리 장치했다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 사상이, 미라에게선 쇼펜하우어의 음울한 냉소주의가 엿보인다.

미라는 더 나아가 허버트 스펜서의 불가지론을 향한다. 스펜서는 사실주의 감각이 뛰어난 현실주의자였던 만큼 예술 정신과 시적 정서는 취약했다. 중간에 삶을 포기한 혜란을 제외하면 미라의 친구들은 모두 자신의 예술적 취향과 꿈을 이뤘거나 달리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현아마저도 꿈은 있다.

과거의 미라는 친구들 중 가장 진보적이었기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이었다. 하지만 기껏(?) 사랑 때문에 영화배우라는 꿈을 쉽게 포기했다. 그건 곧 바빌론에 유수된 유대인을 뜻한다. 느부갓네살은 강제로 유대인을 잡아왔지만 미라는 스스로 예술의 자유를 버린 채 사랑의 속박에 체포됐다.

그녀가 진보랍시고 행동하는 건 고작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리본공작소에서 노란 리본을 만드는 학생들 옆에 누워 트럭의 진동을 느껴보는 정도다. 그녀는 철저하게 변했다. 무기력해진 예술혼, 타성화된 혁명정신, 개괄적인 일반화. 그래서 매번 행동은 택일적 고의로 주변인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이 작품은 독립영화라고 하기 애매하다. 사이즈를 떠나 내용이 독립적이면서도 상업적 구문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품처럼 툭 던져 관객들로 하여금 가볍게 들어오게 하더니 어느새 미스터리 판타지로 진로를 변경해 진지하게 몰입하도록 만드는 솜씨가 웬만한 블록버스터 뺨을 때릴 정도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어. 여자, 남자, 그리고 배우”라는 대사와 미라의 유학은 당연히 감독의 자화상을 그린다. 수미상관으로 모든 의문점을 매조지는 지점에선 소름 끼칠 정도의 전율을 느끼게 한다. 주인공들의 의문과 의심이 확장될수록 작품의 매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재미까지 갖춘 수작.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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