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부력’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로드 라스젠 감독이 취재를 통해 접한 동남아시아의 노예노동 실상을 고발하기 위해 만든 영화다. 다큐멘터리처럼 시작되지만 중반 이후 의외의 반전으로 흥분을 안겨준다. 국내의 신안군 염전 노예 사건부터 ‘가버나움’(2018)의 교훈까지 담은 시사성과 재미가 충만하다.

캄보디아 빈농의 다자녀 가정의 14살 소년 차크라는 가난과 중노동이 지긋지긋하다. 한 친구의 태국에서 1달 막노동을 해 30여만 원을 벌었다는 말에 혹한 그는 밀입국을 결심한다. 유사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인 틈에서 만난 유부남 케아와 함께 입국 경비 60만 원이 없어 다른 공장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그곳은 공장이 아닌 폭력적인 선장 롬이 운행하는 어선이었다. 노동자들은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며 돈도, 휴식도, 제대로 된 음식도 보장되지 않는 노동에 시달린다. 롬은 탈진한 노동자를 치료해 주기는커녕 그냥 수장하고, 말을 안 듣거나 반항하는 노동자 역시 마구 폭행한 뒤 수장한다.

유일하게 믿고 의지했던 케아가 롬을 죽이려 했다가 외려 죽임을 당한 뒤 노동자들은 차크라를 노골적으로 따돌린다. 그들이 잡는 해산물은 사람이 먹을 만한 게 못 돼 동물 사료로 판매한다. 그런데 가끔 먹을 만한 활어가 잡히면 차크라는 잽싸게 챙겨서 롬에게 상납함으로써 그의 환심을 산다.

그러나 케아가 죽은 뒤 한 동료 노동자가 그 일을 가로채는가 하면 편안한 잠자리까지 빼앗는다. 늦은 밤 그 노동자가 뱃머리에서 볼일을 보는 순간 차크라는 둔기로 때려 바다에 빠뜨린다. 다음날 아침 롬이 노동자들을 불러놓고 살인자를 색출한다. 차크라가 자백하자 롬은 왠지 크게 기뻐하는데.

차크라 역을 맡은 실제 14살의 삼 행은 이 데뷔 작품으로 2019년 마카오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남자배우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who caught my fish’ 캠페인과 연계해 식탁에 올라오는 해산물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생산됐는지 폭로하려 한다. 해상의 노예노동과 더불어 아동 착취를 고발한다.

제목은 중력과 대립되는 의미와 더불어 회복력도 뜻한다. 차크라의 폭압에 대처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적응력이다. 그물에서 쏟아낸 해물 속에서 긴 봉 하나를 발견해 그걸 무기처럼 쓰던 그는 후에 사람의 다리뼈를 발견해 그걸로 바꾼 뒤 엄청나게 용감해진다. 롬의 서슴없는 무참함을 답습한다.

인트로의 차크라는 무거운 비료 자루를 어깨에 맨 채 하염없이 걷는다. 땀에 전 그의 티셔츠의 등엔 11이란 숫자가 크게 씌어있다. 그는 노동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뭐 하러 자식들은 잔뜩 낳았어요?”라고 항의한다. ‘가버나움’이다. 아동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건 롬만 아니라 부모도 마찬가지.

11은 무책임하게 아이를 ‘생산’하는 캄보디아 가족의 숫자인 동시에 차크라가 동네에서 즐기는 축구의 정원이기도 하다. 무지한 부모 탓에 가난한 다자녀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하지만 성공한 축구 선수만큼 돈을 벌고픈 그의 욕망이다. 또 나무에 오르는 건 그가 짝사랑하는 부잣집 소녀와 연결된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지만 차크라는 ‘포기는 하지 말자’로 비튼 듯하다. 그물이 스크루에 걸리자 롬은 노동자들에게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다. 다들 우물쭈물할 때 제일 어린 차크라가 나선 뒤 보란 듯이 해결해낸다. 니체다운 요소가 많아 서늘한 작품이다.

노동자들에겐 정당한 보수도, 휴식도, 음식도 없다. 언제까지 그런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할지도 막연하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처음엔 “여기 오래 있지 않겠죠?”라며 희망을 품었던 차크라는 그게 틀렸다는 걸 깨달은 뒤 먼저 적응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봉과 사람의 뼈가 조력의 동력이다.

태국과 캄보디아는 불교의 힘이 강한 나라지만 이 작품엔 ‘ㅂ’도 등장하지 않는다. 니체의 가치전도. 태국에 가면 일확천금을 벌 수 있을 줄, 그러면 부잣집 소녀와 데이트를 할 수 있을 줄, 지긋지긋한 가족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차크라. 그러나 현실을 접하곤 모든 가치관을 바꾼다.

그가 선택한 건 니체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전쟁이었다. 위버멘시(극복인)였다. 항해사가 볼일을 보러 가면서 대리운전을 시키자 빠른 눈썰미로 운항 시스템을 깨우치는가 하면 우악스러운 뱃사람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워 나중에는 다스리기까지 한다. 그는 롬의 충복을 자처한다.

니체가 신을 죽였다면 이 작품은 애초부터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폭력 혹은 재력이 지배하는 권력이 전지전능하다고 설정했다. 롬은 “늙은이는 아는 건 많은데 오래 못 버티니 앞으로 어린놈만 데려와야겠다"라고 한다. 부조리한 권력에 항거하는 지식인보다 복종적인 아이가 낫다는 지배 논리.

따라서 차크라의 적응은 불합리한 관습을 따르는 걸 굳이 마다하지 않았던 몽테뉴의 처세술이다. 현실을 한탄하고 절망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 토마스 홉스가 제창한 경험론적 사회계약설. 또한 경험론을 더욱 발전시킨 데이비드 흄의 인과율 비판에 이른다.

감독은 대사를 절제함으로써 긴장감과 현사실성을 극대화했고, 선상의 폭력을 과장하지 않음으로써 되레 폭력의 일상성을 부각했다. 후반부에 차크라의 폭력성이 짙어지는 시퀀스를 강도 높게 그림으로써 사람들이 환경으로 인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웅변한다. 놓치지 말아야 할 문제작! 2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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