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지평은 서울시 문화본부 문화정책과 미래유산팀 후원으로 ‘동서남북 서울미래유산 만보답사’란 주제로 네 차례 답사와 아카이빙을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전수정의 서울 프롬나드]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 문화지평(대표 유성호)은 서울미래유산을 둘러보는 답사와 아카이빙을 수행했다. 이번 사업은 문화지평이 서울시 문화본부 문화정책과 미래유산팀 후원으로 ‘동서남북 서울미래유산 만보답사’란 주제로 네 차례 진행했다. 문화지평은 이번 사업을 통해 △시 외곽 서울미래유산 자원 탐방 답사 △동서남북 시 외곽에 산재한 서울미래유산 영상·텍스트 아카이브 △서울미래유산 어반 스케치 및 온·오프 전시활동 등 다양한 아카이빙 활동을 했다. 네 차례 답사를 1인칭 시점으로 기록한다. <편집자 주>

사는 곳과 비교적 가까운 강북구 지역 답사다. 오전 9시 집결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넘쳤다. 이른 도착을 위해 8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한 번에 목적지에 닿을 수 있는 버스 편을 탑승했더니 수유역을 들렀다가 4.19민주묘지 쪽으로 올라가는 통에 예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만남 장소인 근현대사기념관 앞은 이미 북새통이다. 이번 답사가 아니었으면 아마 한산했을 것이다.

▲ 두 번째 답사 집합장소인 근현대사기념관 앞.

북한산둘레길 순례길과 흰구름길에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이라 유동인구가 아예 없진 않으나 근현대사기념관 방문만을 위한 인원은 손가락으로 충분히 헤아릴 수 있지 싶다. 위치가 애매하고, 크기도 마찬가지다. 마땅한 부지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고, 순례길 일대에 잠들어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한 시설임을 고려했을 때 이보다 더 뛰어난 장소 찾기가 쉽지는 않았을 테지만 여러모로 아쉬운 것만은 사실이다.

코로나 이후 적잖은 시설이 문을 닫거나 부분개관 형태로 운영을 재개했다. 그런 연유로 오늘은 내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건물 앞에 놓인 인물들의 흉상을 유심히 관찰했다. 놓인 순서를 두고 왈가왈부. 가나다순은 분명 아닌 듯하고, 태어난 순 혹은 돌아가신 순 같다. 가장 앞자리에 놓인 이준 열사에서부터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일련의 흐름이 읽힌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무사태평한 삶이 가능했을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이들은 굳이 제 이름을 역사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가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고, 숱한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대중 앞에 서기를 택하기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처음과 끝이 동일하면 참 좋을 테지만, 광복 이후 행보의 결이 달라진 사람들도 몇 눈에 들어왔다. 이승만 정권에 합류했으며, 민주화에 반하는 움직임에 동조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후대에 자신이 어떠한 평을 듣게 되리라 상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흉상 앞에 머문 시간은 짧았다. 허나 개별 인물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나라를 위한다는 뜻은 동일했으나 노선은 다채로웠다. 협동조합 등으로 새로이 주목받기 시작한 아나키즘 계열의 인물 또한 이 일대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었다. 죽음 앞에선 모두가 평등했다.

평범한 주택가에 스민 뜨거웠던 늦봄의 흔적 ‘통일의 집’

▲ ‘통일의 집’은 문 목사가 1994년까지 거주했던 가옥으로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논의의 현장으로서의 역사성을 갖고 있다. 2018년 문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복원해 ‘문익환 통일의 집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주택이 즐비한 뒷골목에 진입했다. 토요일 오전답게 골목은 조용했다. 모두의 휴식에 방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동시에 혹 다음에 혼자 방문을 하려면 길을 기억해야 한다며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게 된다. 딱히 랜드마크 삼을 무언가가 없다. 전형적인 주거지역을 지나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통일의 집' 역시 사람이 살다 떠난 장소다. 고로 평범한 집들이 옹기종기 자리 잡은 곳에 있다 한들 하등의 이상함이 없었다.

일종의 막다른 골목 앞에 통일의 집은 있었다. 한글 손글씨로 눈길이 쏠린다. 원래 주말에는 오후에 문을 여는 곳을 일찌감치 찾아가는 실례를 범했음에도 문익환 목사의 따님 문영금 통일의 집 박물관장이 부리나케 나타나시어 제 아버님의 삶을 설명해주셨다.

신앙이, 목회 활동이 곧 독립운동이자 민주화운동이던 시절이라. 이해가 갈듯 하면서도 조금은 아리송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 나는 내 삶을 어찌 살아야겠다는 명확한 다짐을 해 본 적이 이제껏 한 번도 없었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마 난 그 시절을 살았어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통일운동가이기 전에 목사이기도 했던 이 인물은 구약성서 번역에도 앞장섰다. 오래전 사용했던 성경에 좀체 와닿지 않았던 난해한 표현들이 살짝 떠올랐다. 어느 시점에선가 나 같은 사람도 이해하기 쉽도록 문체가 확 달라져 속으로 만세를 불렀던 적이 있다. 그런 걸 보면 알게 모르게 난 그에게 빚을 많이 졌다.

공간이 비좁은 관계로 알아서 3명, 5명 찢어서 실내를 둘러보았다. 다른 이들을 기다리면서는 주변에 전시된 편지글을 읽었다. 감옥에서는 글쓰기도 사치다.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흩어지기 마련인 생각을 붙들어 맸다가 종이와 펜이 주어지면 한 글자씩 꾹꾹 눌러 담았을 것이다. 생각은 마치 알코올이 발효하듯 농축된 상태였을 것이고, 일부는 종이 공간에 제약으로 인해 미처 적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농익은 감이 떨어져 가을내를 풍겼다. 편지에서 뭐라 설명하기 힘든 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통일의 집은 문 목사가 1994년까지 거주했던 가옥으로 강북구 인수봉로 251-38에 위치해 있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논의의 현장으로서의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평화통일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상징적 공간이다.

1966년 상공부에서 직원들을 위해 지은 약 90㎡(30평형) 면적의 단독주택으로 문 목사는 1970년 매입해 1994년 작고할 때까지 거주했다. 1997년에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건설노동자 공동체 ‘우리건설’에서 무료봉사로 내부 보수를 했다. 문 목사 부인인 박용길 장로 생전 ‘누구나 통일을 논할 때 쓰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통일의 집’이라 이름 붙였다.

2018년 6월 1일 문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의 모금으로 1990년대 초반 문익환 목사가 살았던 시기의 모습으로 복원해 ‘문익환 통일의 집’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박물관에는 2만5000여 점의 유품 중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문 목사는 호는 늦봄이며 1918년 만주 북간도에서 출생했다.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중학교, 일본 동경신학교를 다녔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 신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한국신학대와 연세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구약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신학대 교수로 재직 시 1968년부터 8년간 신구교 공동성서번역의 구약책임위원으로 일했다.

1976년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여섯 차례 총 11년 간 옥고를 치렀다. 1989년에 방북, 1993년에는 ‘통일맞이 7000만 겨레모임 운동’을 주장하는 등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힘을 쏟다가 1994년 1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반달’‧‘따오기’ 동요가 흥얼거려지는 ‘윤극영 가옥’

▲ 윤극영 가옥은 그가 1977년부터 1988년까지 살던 사택으로 서울시가 유족으로부터 매입해 ‘서울시 미래유산 보전사업’ 대상 1호로 지정한 곳이다.

또다시 걷는다. 막다른 골목 형태의 언덕배기였던 곳에서 도로변으로 내려오니 조금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구멍가게 형태이긴 하나 몇몇 상점들도 눈에 들어오고, 아무래도 가장 큰 변화는 버스가 오간다는 점이었다.

다음 장소인 윤극영 가옥은 이전에도 한 차례 혼자 방문했던 장소다. 앞서 통일의 집에 들렀다 나와서 그런지 당시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로 시선이 쏠렸다. 건물 외관이 독특했다. 특히 지붕 부분을 매끈한 직선 형태로 처리한 게 대체 이건 어느 나라의 형식을 채용한 건지 궁금증이 일었다. 1970년대에 이와 같은 지붕이 유행했던 걸까.

얼핏 보면 좁다 느낄 수도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앞서 본 통일의 집보다는 공간이 넓었다. 단순 면적 비교를 떠나, 입지 자체가 길에서 크게 들어오지 않은 장소에 있다는 거 자체가 달랐다. 같은 강북구고, 같은 주택이고. 하지만 두 인물의 삶은 사뭇 달랐다. 인물은 떠나고 남은 건물이 서로 달랐던 인물의 삶을 보여주는 듯했다.

요즘 아이들은 동요를 부르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마도 TV를 틀면 현란함이 하늘을 찌르는 대중가요를 얼마든지 접할 수 있어 그럴 것이다. 고로 윤극영이라는 이름 또한 아이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다. 반면, 내 어린 시절에는 동요가 주였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적잖은 노래가 윤극영 작사작곡이다.

반달, 따오기, 고기잡이, 고드름 등 안내 표지판에 기재된 노래 대부분이 나에게는 익숙하다. 가사를 정확히 기억은 못 하지만 다들 사정이 나와 비슷한지, 저마다의 스타일로 자신의 유년시절을 노래하는 시간을 가졌다. 몸은 어른이 됐으나 마음속엔 아직 작은 아이가 있었으니, 우린 모두 '어른이'였다.

현재 윤극영 가옥은 반달문화원에서 운영 중이다. 불과 10여 분 후에 어린아이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운영될 예정이라 하였음에도 상주하고 계신 선생님으로부터 공간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가옥은 작곡가 윤극영(1903~1988)이 1977년부터 1988년까지 살던 사택으로 강북구 인수봉로84길 5에 있다. 서울시는 윤극영이 타계한 뒤 고인이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이 집을 유족으로부터 매입해 ‘서울시 미래유산 보전사업’ 대상 1호로 지정했다.

윤극영은 1903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법합적문학교에 입학,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대학과 동양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성악을 전공했다. 유학을 하던 1923년 소파 방정환, 조재호, 마해송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이듬해인 1924년 우리나라 동요사에 빛나는 ‘반달’을 작곡했다. 이후 간도와 하얼빈 등에서 활동하다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윤극영 가옥은 1970년에 준공된 지상 1층의 조적조 적벽돌 건물로 연면적은 99.8㎡이다. 윤극영 가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곡집 ‘반달’을 만들고 초창기 아동문학운동에 크게 기여한 작곡가 윤극영이 말년에 기거했던 곳으로 지속적인 관리와 보존이 필요한 근현대 문화유산이다.

주민 스스로 삶의 질 향상하고 있는 ‘삼각산재미난마을’

▲ 제도권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과는 결이 다른 교육을 꿈꾸며 만든 대안학교 ‘삼각산재미난학교’

다음 장소는 동요로 마음 정화(?)를 이룬 직후 방문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코로나 여파 탓인지 아니면 단지 토요일 오전이어서인지 ‘삼각산재미난마을’의 삼각산재미난학교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너른 운동장을 지닌 대부분의 초등학교와 달리 삼각산재미난학교는 담벼락과 건물 사이의 간격이 좁았다. 굳이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건물의 면모가 한눈에 들어왔다. 야트막한 담 옆으로 놓인 화단은 알록달록했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삼삼오오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신이 원하는 꽃 등을 심었을 것이었다. 담을 끼고 옆으로 돌아가자 자전거 따위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이 등장했는데, 알록달록 채색이 된 덕인지 학교 하면 슬프게도 떠오르는 칙칙한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삼각산재미난학교는 일종의 대안학교다. 자녀 교육을 고민하던 이들이 공동육아를 시작했고,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제도권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과는 결이 다른 교육을 꿈꾸며 스스로 학교를 세웠다. 주민들의 움직임은 실로 놀라워 하나의 학교로만 그치지 않아 성미산 마을처럼 하나의 마을로 커가기도 했다. 다 함께 텃밭에서 친환경 농사를 지어 식사를 나누고, 공동으로 자금을 마련해 마을 주치의를 고용하기도 했다. 마을 밴드, 마을 극단 등을 구성해 마을 안에서 문화를 창출, 영위하는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모든 활동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다. 십시일반 갹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 2018년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인해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마을로 적잖은 돈이 투입됐다. 행정이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을 주민 스스로 역량을 키워 해결하게끔 만들겠다는 게 의도였고, 실제 주민 발굴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최근 서울시장은 서울시가 시민단체의 ATM기로 전락했다는 취지의 쓴소리를 했다. 예산은 계륵과도 같아서, 분명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은 하나 행정이 원하는 방향, 원하는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재갈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앞으로 서울시의 정책이 어찌 변화할지, 마을에서 활동해온 이들이 그로 인해 무엇을 얼마만큼 실감할게 될지. 돈을 보고 몰려들었던 이들이 떨어져 나가고 정말 마을을 고민하는 사람들만이 남는 결과를 낳을지 등은 두고 볼 일 같다.

삼각산재미난마을은 공동육아 및 대안학교 등 자녀양육의 문제를 주민 자치적으로 해결하고자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통해서 주민의 삶의 질을 주체적으로 향상한 마을이다. 북한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마을은 1992년 ‘품’이라는 청소년 문화활동으로 시작됐다. IMF 당시 상황들이 어려워지면서 공동육아를 고민하게 되었고 여성민우회 회원과 뜻이 있는 교사들이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보육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1998년에 공동육아협동조합 ‘꿈꾸는어린이집’ 조합원들과 대안교육단체, 장애인학부모 단체 부모들이 중심이 되어 마을공동체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3년부터 삼각산재미난학교가 만들어졌다. 학교를 중심으로 모여 카페를 열어 마을 배움터를 만들고, 밴드연습실, 목공소를 만들어 모이기 시작했다. 2011년 1월 사단법인 삼각산재미난마을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마을공동체 활동을 시작했다.

마을 내에는 삼각산재미난학교, 재미난 카페, 카페521, 마을목수공작단, 마을밴드 JnB, 스튜디오 느림보, 함께 놀자, 극단 진동 등 마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공간들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운영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다른 삶의 공간으로 승화한 '국립4.19 민주묘지'

▲ 죽음을 마냥 금기시하지 않고 삶의 공간 안에 죽음 또한 받아들인 '국립4.19 민주묘지’

국립 4.19 민주묘지. 국가보훈처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입구를 통과했다. 실외이기도 하고 원체 부지가 드넓어서인지 적잖은 인원이 들락거리는데도 크게 눈여겨보는 이가 없었다. 혁명이라 하면 서양의 것으로만 생각해 왔는데, 우리에게도 민중의 움직임은 여러 차례 있었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통치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이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냈다는 것만으로도 민주화, 경제성장을 스스로 이룰 역량이 부족하다는 식의 일제가 펼친 논리는 옳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1960년 전개된 뜨거운 역사가 오롯이 우리 자신이 일군 것은 물론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땅에서 전개되는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는 세력은 참으로 많다. 누가 정권을 창출하느냐, 얼마나 오랜 기간 정권을 유지하느냐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궁무진하다. 이승만의 하야 또한 그랬다. 허나 4.19 혁명이 미국의 입맛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었을 이승만을 미국이 포기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난 이곳의 공식 명칭이 '국립4.19 민주묘지'라는 사실을 이날 알게 됐다. 그전까지는 4.19 국립묘지, 4.19 공원 등 중구난방으로 불러왔고, 내가 어찌 부르건 주변 사람들은 내가 가리키는 장소가 어딘지를 찰떡같이 알아차렸다.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4.19에 대한 평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보다 앞선 1894년의 일이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계속해서 평가가 달라지고 있는 걸 보면 4.19 에 대한 평 또한 앞으로 계속 달라지지 싶다. 그래도 역사에서 꽤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여러 해 전 국립4.19 민주묘지 안에는 우람함을 뽐내는 조형물이 대거 설치됐다. 일종의 성역화 작업이 전개된 것이다. 지금 보아도 위압적인 조형물은 이곳을 참배하려면 정갈하게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네 주민들에게 이곳은 공원이다. 이른 아침이 아니었음에도 묘지 주변에는 트레이닝 복장을 하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이를 비롯하여 배드민턴을 즐기는 이, 유모차를 끌고 나들이 나온 가족 들이 제법 있었다. 서양의 공동묘지가 떠올랐다. 죽음을 마냥 금기시하지 않고 삶의 공간 안에 죽음 또한 받아들인, 이 또한 그와 같은 차원으로 이해해도 괜찮으려나.

김수근 건축의 정수 ‘덕성여대’ 초기 벽돌 건물군

▲ 덕성여대 쌍문동 캠퍼스에서 초기에 지어진 건물이 자연관(가정약학관), 예술관(미술학관), 도서관이다. 이 3개의 건물은 김수근 캠퍼스 건축 시리즈의 백미라고 일컬어진다.

답사가 끝을 향해 간다. 이제 남은 곳은 덕성여자대학교와 여운형 묘소 그리고 함석헌 기념관이 전부다. 덕성여자대학교로 향하는 길에 솔밭근린공원을 지나쳤다. 공원화되기 전부터 이 일대엔 소나무가 넘쳤다. 코로나가 세상을 뒤덮기 전에 도봉도서관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때마다 이곳을 한 바퀴 도는 호사를 누리곤 했다. 요즘엔 어느 지역을 방문해도 이 정도 공원은 널렸다고 하지만 집 주변에 이와 같은 공간이 존재한다는 건 진정 복이다.

덕성여자대학교는 이제까지 방문했던 장소들과 달리 행정구역상 도봉구에 속한다. 학교 앞 흐르는 우이천이 도봉구와 강북구를 가르는 경계다. 학교 입구에 큼직한 글씨로 외부인은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었다. 사람이 가장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했다. 일행 중 극소수의 인원이 사진을 찍기 위해 학교 안에 들어갔다. 난 지난 선거 때 개표를 위해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는지라 다른 이들에게 기회를 양보하기로 했다.(덕성여자대학교 하나누리관이 도봉구 개표소로 왕왕 쓰인다.)

덕성여자대학교가 답사 장소에 속한 까닭은 학교 건물이 건축가 김수근과 관련이 있어서다. 덕성여대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네모반듯한 붉은 벽돌이 김수근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학교를 드나들 적마다 나는 캠퍼스가 어딘가 모르게 투박하다는 인상을 받고는 했다. 김수근을 알아볼 정도의 미적 감각을 지니지 못한 탓이 아마 클 것이다. 건물의 밋밋함은 늘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해소했다. 너른 잔디가 깔린 공간(영근터) 카페에서 구입한 커피와 함께 즐기는 북한산 경치는 으뜸이다.

김수근은 김중업과 더불어 현대 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빛이 강하면 어둠도 짙은 법이라더니, 김수근의 경우 정권의 입맛에 부합하는 설계를 자주 선보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비판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인 남영동 대공분실은 해당 건물이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는 장소인지를 명확히 이해했기에 그와 같은 설계가 가능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건축적 능력을 드러냈을 뿐일 수도 있다. 허나 일제시대나 유신정권 체제에선 청렴한 말단 공무원도 부역자다.

덕성여대 쌍문동 캠퍼스에서 초기에 지어진 건물은 자연관(가정약학관), 예술관(미술학관), 도서관으로 이 3개동의 벽돌 건축군은 김수근 캠퍼스 건축 시리즈의 백미라고 일컬어진다. 각각 다른 건물이지만 사실은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건축됐다.

자연관(가정약학관)은 지하1층, 지상3층의 ‘ㅁ’자형의 중정형(비엔나숲) 건축물이다. 건물 중앙에 펼쳐진 중정은 특히 가을이면 타는 듯한 붉은 단풍으로 장관을 연출한다. 김수근은 중정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층수를 제한했다. 이는 교육적, 경제적 이유가 들어 있었다. 밖을 향해 내다보았을 때 멀리서 캠퍼스를 감싸고 있는 산들이 조망될 수 있도록 1층의 일부가 필로티로 꾸며졌다. 자연적 개방감이 있도록 중정을 만든 것이 큰 특색이다. 전체는 붉은 벽돌을 장식 없이 단순하고 경쾌하게 쌓아 올렸다.

예술관은 약학‧가정관에 이어 1982년 준공됐다. 2010년 1층 근린생활시설을 증축했고 2012년 건축물 명칭을 미술대학에서 예술관으로 바꿨다. 붉은 벽돌 등의 특징적 요소들로 인해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높다고 평가되고 있는 건축물이다. 대학의 중앙부는 남쪽으로 있는 캠퍼스에 접하며 강의동으로는 제일 남쪽에 위치하는 이 건물은 서쪽으로 백운대의 경관을 받아들여 중앙에 다목적의 마당을 형성했다.

남, 동, 북으로 세 개의 동을 구획해 ‘ㄷ’자 모양의 선적인 기능을 갖추되 공동의 장소가 될 수 있는 중앙을 형성했다. 도서관은 2012년에 건축물 명칭을 덕성여대 제1호(도서관)에서 덕성여대 도서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현재 건물 전체를 도서관 및 연구실로 이용하고 있다. 서울시 서울대 예술대학에 적용시킨 프로토타입을 응용해 캠퍼스 건축 시리즈의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이들 붉은 벽돌 건축군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 1947년 만들어진 몽양 여운형 묘소.

여운형 묘소까지는 우이천 따라 걸었다. 제법 맑은 물이 감탄을 자아낸다. 잘 조성된 산책로, 자전거 도로가 예전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근화교에서 머지않은 곳에 서서 바라본 풍경이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 등장하는 배경과 꼭 닮은꼴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상당수일 거다. 이제는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둘리가 빙하를 타고 떠내려 왔다는 하천이 바로 우이천이다. 쌍문동에 둘리뮤지엄을 세우고, 지역 행사에 둘리와 고길동, 또치, 도우너, 희동이 등 만화 등장인물의 등을 등장시키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관광자원으로 이를 활용하기에는 다소 역부족으로 느껴진다. 아무래도 새로운 시리즈물이 나오지 않고 있어서 같다. 둘리의 인기는 과거형이다. 슬프지만 이는 사실이다.

오전 9시부터 줄기차게 걸었으므로 배고프다는 아우성이 시작될 법도 하다. 그래도 여운형 묘소까지의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 크게 힘이 들지는 않았다. 굳게 문이 닫혀 있어 밖에서만 빼끔 쳐다보아야 하나 싶었는데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에도 몇 차례 엉뚱한 시간대에 들러 안을 들어가 보지 못했던 터라 이번 기회에 아쉬움을 제대로 달랬다. 생각보다 규모가 있었다. 주변에 심은 나무 하나하나까지도 묘소의 일환으로 본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남녀노소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인 1947년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만큼 선생의 영향력이 컸다는 뜻일지도.

광복의 기쁨도 잠시, 저마다 이제껏 그려온 이상향이 달랐고, 추구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가 상당했다. 극좌에서부터 극우에 이르기까지의 어마어마한 스펙트럼이 자아낼 수 있는 갈등을 봉합하고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구성하는 게 당대의 과제였다. 여운형 선생은 김규식 선생과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했다. 둘 다 중도파적 성향을 지녀 가능했다.

그는 일찍부터 깨인 인물이었다. 1908년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켰을 때 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렸을 정도로 뛰어난 안목을 지니기도 했다. 운동에도 능했던 그는 수차례의 암살시도를 비껴갔으나, 행운이 마지막까지 따르진 않았다. 한지근이라는 인물이 단독으로 그를 암살하였다고 하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공소시효가 지난 1974년 자신들이 여운형 암살에 관여했다는 인물들이 나타나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역사에 어떤 굴곡을 가져다줄지를 알았더라도 그와 같이 행동했을까. 자신의 믿음을 따랐을 뿐이라고 하기에는 여운형을 잃은 일은 우리나라의 분단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씨알 함석헌의 마지막 거처 ‘함석헌기념관’

▲ 함석헌 가옥은 ‘한국의 간디’로 일컬어질 만큼 인권 향상에 힘썼던 그가 말년을 보낸 곳으로 민주화운동과 민권운동에 평생을 보낸 그의 삶과 자취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다.

앞으로 40분을 더 걸어야 한다는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미 '충분히'를 넘어섰는데, 여기서 40분을 더 걸을 수 있을까. 다들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결국 도보로 이동하려던 계획은 전면 수정됐다. 마을버스의 도움을 받아 함석헌 기념관이 위치한 도봉구 쌍문동으로 향했다. 도봉구를 관통하는 가장 규모가 큰 도로인 도봉로에서 뻗은 오르막길이 정겹다. 도처에 널린 아파트가 이곳에서만큼은 잘 보이지 않는다. 향수를 자극하는 골목길을 5분 남짓 걸었을 무렵 함석헌 기념관이 나타났다. 갑자기 들이닥친 무리에 살짝 당혹감을 느끼셨을 법도 한데, 상주중이던 실장님이 차분히 공간을 설명해주셨다.

함석한 기념관은 2015년 기념관으로 조성됐으며,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거주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내부 공간은 넓지 않으나 생전 사용했을 유품들을 알차게 전시했다. 지하 공간은 주민 커뮤니티 활동과 더불어 게스트 룸으로 조성해 예약을 하면 숙박도 가능하다. 주차장 공간에는 아담한 전시실을 꾸렸는데, 지역 예술인들에게 무료로 빌려 준다고 했다. 선생이 직접 가꾸었다는 유리온실 속 식물들은 여전히 푸르른 생명력을 보이고 있었다. 사람은 떠나도 정신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전반적으로 집이 예쁘다는 분위기다. 나중에 시간 내어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이들이 많았다.

점심을 먹기에도 다소 늦은 시점이다. 다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쌍문역 방면으로 이동했다. 이럴 땐 집이 가까운 게 참 고맙다. 오가면서 자주 접한 풍경을 오늘 답사에서 대거 만났다. 익숙하기에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아니었다. 다양한 문화유산을 맛보려면 서울 한복판을 방문해야만 한다는 생각에도 조금은 변화가 생겼다. 흔히들 '고구려' 이야기를 하면 잃어버린 대륙을 떠올리는데, 우리가 거주하는 이 땅 안에도 고구려의 흔적이 널렸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들었다. 이미 지닌 것들의 소중함은 방기한 채 가지지 못한 걸 마냥 동경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진 말아야 한다.

이날 둘러본 곳 외에도 찾아보면 많은 이야기를 품은 장소들이 꽤 존재하지 싶다. 지금은 민자역사 추진 사업 중단으로 10여 년째 흉물처럼 방치되고 있는 창동역만 해도 100여 년의 역사를 지녔다. 삼엄한 일경의 감시를 피하되 필요하면 언제든 서울 중심부 진입이 가능한 창동 일대에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했다는 말은 여러 차례 들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남아 있는 흔적이 없다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면 흥미로운 시간 여행이 가능할 것이다.

글을 쓰고 사진을 정리하며 다시금 이틀 전으로 돌아갔다. 적당히 듣고 적당히 흘렸던 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완벽치 않은 나의 기억력이 있어 매번 고맙다. 글은 덜어내기와도 같다. 한 번 쏟아부으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던 생각들이 사라진다. 이제 글이 남았으므로, 아쉬울 때마다 이따금 꺼내 읽으련다.(전수정 문화지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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