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아빠는 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김건모는 ‘핑계’에서 ‘내게 그런 핑계를 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네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라고 노래했다. ‘맹자’의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비롯된 역지사지란 한자성어는 자신과 반대에 처한 사람의 입장에서 상황을 헤아리면 생각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교훈이다.

일본 작가 이가라시 다카히사의 소설 ‘아빠와 딸의 7일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아빠는 딸’(김형협 감독)은 아버지와 딸의 영혼(몸)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골자로 한 코미디 겸 감동 드라마를 표방하는 아주 전형적인 틀을 지녔다. 플롯은 전혀 새로울 게 없지만 시퀀스의 디테일에서 차별화를 시도했다.

원상태(윤제문)는 중견부장쯤 됐을 47살의 나이에 화장품회사 재고처리반 과장에 머물면서 한참 아래인 주 대리(강기영)의 지원을 넘어선 간섭을 받는 무능한 인물로 아내(이일화)와 고1 외동딸 도연(정소민)과 함께 살고 있다. 문제는 도연과의 불화다.

▲ 영화 <아빠는 딸> 스틸 이미지

웬일인지 도연은 상태와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든다. 자신의 속옷과 아빠의 속옷을 세탁기에 함께 넣고 돌렸다고 엄마에게 짜증내고, 눈앞에 아빠를 두고도 엄마를 통해 의사를 전달한다. 상태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공부”라며 그냥 대학만 들어가면 자신의 소원은 더 이상 없다고 도연을 닦달한다.

도연은 공부가 별로 내키지 않는다. 친구 진영(도희)과 노는 게 재미있고 스쿨밴드 야누스의 리더인 짝사랑 오빠와 어떻게 맺어졌음 하는 게 소원이다. 그런 두 사람이 외가에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뒤 영혼이 뒤바뀐다. 외할아버지(신구)는 집 앞의 신령한 은행나무 탓이고, 일주일간 싸우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조언한다.

이제 두 사람은 7일 동안 뒤바뀐 몸대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자고 약속한다. 아빠와 딸이 서로의 사회(학교)생활을 이해할 리 없다. 그 생소하거나 적응이 안 되는 서로 다른 ‘체험 삶의 현장’을 겪으며 비로소 서로의 고충과 애환, 그리고 갈등의 원인을 알게 돼 결국 화해한다는 스토리는 100% 예측이 가능한 클리셰다.

▲ 영화 <아빠는 딸> 스틸 이미지

하지만 영화는 진부한 감동의 억지라는 허점을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한 코미디로 보완한다. 오랜 조연으로 연기력을 다진 윤제문에게서 믿고 보는 연기 어쩌고 하는 건 영화 자체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니 차치하고, 정소민이 의외로 존재감으로 매력을 발산하며, 조연과 카메오의 활약이 적재적소에서 의외의 재미를 풍성하게 꾸며준다는 게 주안점이다.

도연이 된 상태의 고교생활은 청소년 관객이 타깃이다. 상태는 자신이 도연에게 큰소리쳤던 것처럼 공부가 쉽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범생이’로 생각한 경미(허가윤)의 옆자리에 일부러 앉는다. 그리고 곧 있을 중간고사를 대비해 그녀와 진영에게 자신의 집에서 함께 공부를 하자고 부른다.

그러나 결과는 꼴찌에서 두 번째. 그리고 놀라운 반전은 우등생인줄 알았던 경미의 성적이다. 여기서 영화는 우리 청소년들의 고민을 대변해준다. 경미의 부모는 딸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부모의 사랑에 목마른 경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어필은 공부였기에 해도 해도 안 오르는 성적이었지만 거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영화 <아빠는 딸> 스틸 이미지

그건 도연과의 극명한 대비다. 도연은 부모로부터 과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녀도 한땐 “커서 아빠랑 결혼할 것”이라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자신의 능력은 아빠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게 밝혀졌을 때 아빠를 실망시킬 게 두려워 자꾸 피하다보니 어느덧 남보다 더 멀어진 것이었다.    

딸에게 엄마는 같은 여자라 때론 라이벌이지만 결국 친구다. 그러나 남자인 아빠는 한번 멀어지면 아예 적조차도 될 수 없는 이방인일 따름이다. 그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 입장과 그걸 조건으로 자식에 대한 자신의 기대치를 요구하는 지배자의 위치란 주종관계로 맺어질 땐 서로 불편해지기 마련이라는 설정이다.

도연의 상태로서의 ‘미션 임파서블’은 이 땅의 가장을 향한 응원가이자 위로의 테라피다. 직장생활은커녕 대학의 자유로운 캠퍼스의 낭만조차 겪어보지 못한 도연의 ‘첫’ 출근은 아빠가 회사에서 얼마나 외로운가를 확인하는 것으로 일관된다. 나머지 6일은 그런 아빠를 위한 잔 다르크의 살신성인에 가까운 혁명운동인데 그건 사실 모든 직장인들을 위한 자아선언의 용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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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성적인 코드도 담았다. 도연의 몸에 들어간 상태에게 짧은 치마를 입은 채 무장해제한 매무새의 여고생이 넘치는 학교는 난감하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방에서 밤을 새우는 진영이 불편하니 ‘브라’를 벗겠다고 하자 당황해 만류하는 상태에게선 묘한 ‘롤리타 신드롬’의 냄새가 폴폴 풍긴다.

더불어 모처럼 몸에 ‘신호’가 온 아내가 맥주로 말초신경을 워밍업한 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상태의 몸을 한 도연을 더듬을 때 어쩔 줄 몰라 공포에 시달리는 장면 역시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성적인 판타지에 불을 지필 시퀀스다.

▲ 영화 <아빠는 딸> 스틸 이미지

영화가 특히 공을 들인 지점은 음악이다. 야누스 오디션에서 도연의 몸을 한 상태는 기타를 치며 강산에의 ‘삐딱하게’를 거칠게 불러 남학생은 물론 여학생까지 사로잡는다. 평소 아빠에겐 까칠한 도연이었지만 학교에선 마냥 수줍고 얌전한 소녀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태의 몸이 된 도연은 노래방에서 씨스타의 ‘나혼자’를 안무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위기의 재고처리반에 희망을 안겨준다.

일본 소설이 원작이지만 영화는 다분히 중국의 철학과 한국의 정서에 기반을 둔다. 역지사지의 반대말은 아전인수다. 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상황을 만든다는 의미다. 상태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해달란 것 다 해주는데 그깟 쉬운 공부를 왜 못 하냐”고 윽박지르고, 도연은 “왜 만날 어린애 취급하냐”고 인격을 주장한다.

▲ 영화 <아빠는 딸> 스틸 이미지

상태가 “아빠가 밖에서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아느냐”고 하소연하면 도연은 “아빠도 내 인생 살아보면 그런 말 안 나올 것”이라고 날카롭게 응수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가장 기초적 조직이 바로 가정인데 현대사회에서 가정파괴는 매우 자주 있고, 그만큼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 중의 하나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이야 나름대로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의 가정마저 평탄하지 못한 배경은 바로 아전인수다. 이 영화의 에필로그 에피소드는 끝까지 아전인수가 얼마나 위험한지 주제의식을 웅변한다. 115분. 12살 이상 관람 가. 1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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