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덴마크의 시골마을 스키비 주민들은 1978년부터 생산과 소비를 공유하는 공동체 스반홀름을 운영하고 있다. 외부에서 일을 하더라도 이 공동체 안에서의 경제적 여건은 동일한 게 원칙이다. 아나키즘 자치구역이다.

‘아나키스트’를 제작했던 이준익 감독은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 혹은 왜곡된 역사교육의 수정이란 소명의식을 지닌 듯하다. ‘사도’와 ‘동주’에 이어 ‘박열’(메가박스(주)플러스엠 배급)로 그가 돌아왔다.​

개인의 자유와 경제생활의 유대를 추구하는 무정부주의 이념인 아나키즘은 고대 그리스 스토아철학의 창시자인 제논의 사상에서부터 시작돼 18세기에 구체적인 이념으로 굳어져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박열은 일제 강점기 탄압을 극복하고 국가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선택했거나 원래 그런 사상을 지닌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만 17살에 3·1운동에 참여했다 탄압을 피해 도쿄로 넘어온 지 3년이 지난 때.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내레이션으로 박열(이제훈)의 시 ‘개새끼’가 흘러나오며 영화는 시작된다.​

열은 홍진유(민진웅)가 운영하는 어묵주점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한국인과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흑도회를 결성, 상하이에서 폭탄을 들여와 황태자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여기서 그는 1살 연하의 후미코를 만난다.​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은 후미코는 할머니를 따라 조선에 가 식모로 일하며 온갖 학대와 멸시 속에서 살다 도쿄로 돌아와 ‘개새끼’를 읽고는 자신의 사상이나 취향과 딱 들어맞음을 느끼곤 흠모하던 터. 진유를 통해 열을 만난 그녀는 다짜고짜 동거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동지 겸 연인인 두 사람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간토에 대지진이 발생함으로써 일본의 정국은 혼란해진다.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내무대신 미즈노(김인우)는 재일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 대량학살이 일어나고 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조선인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고 군인 경찰 민간인으로 결성된 자경단이 조선인 학살에 나서 6000여 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생긴다. 그 와중에 흑도회가 경찰의 추적을 받고 그들은 자경단에 잡혀 죽느니 감옥이 그나마 낫다는 판단에 순순히 잡힌다.​

미즈노는 정적들은 물론 국제적 여론이 간토대학살에 대해 문제 삼고 나오자 황태자 암살 혐의가 있는 열을 희생양으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여론과 재판을 조작할 음모를 꾸며 예심판사 다테마스(김준한)에게 이를 지시한다. 열과 후미코를 번갈아가며 심문하던 다테마스의 심경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그는 이대로 재판을 진행할 수 없다며 전문의에게 두 사람의 정신감정을 의뢰하는가 하면 살아날 수 있는 방향으로 진술을 유도한다.​

그러나 기꺼이 사형선고를 받겠다는 두 사람의 고집은 요지부동. 다테마스의 눈에 그들은 공명심에 불타는 사이코거나 아니면 광기에 휩싸인 정신착란자다. 하지만 그는 서서히 그들이 왜 그토록 죽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그 죽음으로 얻고자 하는 게 뭔지 깨달아간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열과 후미코는 천황과 황태자라는 상징성이 일본 제국주의와 그걸 통해 이득을 얻는 기득권세력을 존재하게 만드는 근원이고, 그로 인해 대중이 핍박받고 노동력 등을 착취당하게 되므로, 모든 악의 원천인 천황제도가 없어져야한다는 논지를 펼친다. 천황이 없었다면 조선침략도 없었다는 논리다.​

다테마스는 재판을 연기해야한다고 반발하지만 미즈노는 앞당겨 하루라도 빨리 사형선고를 이끌어내야 들끓는 국내외의 여론을 잠재울 수 있다고 강행군을 지시한다. 그 와중에 조선의 신문기자 이석(권율)과 일본인 변호사 후세(야마노우치 타스쿠)가 두 사람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데.​

이 감독은 카메라의 잔재주나 화려한 미장센보다는 배우의 표정이나 몸짓, 그리고 거기서 우러나오는 내면의 감정에 집중하는 작가다. 이번에도 그의 고집은 어김없다. 이제훈은 내내 투박하고 지저분하며 자유분방하면서 무모하다. 보헤미안 같은 삶을 살고, 그게 화면에서 그대로 묻어나오는 류승범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곳곳에 포진돼있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작가적 상상력보단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기에 초반에는 좀 지루하다. 동료들이 풀려나고 열과 후미코만 감옥에 남으면서부터 영화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두 주인공의 미즈노와의 힘겨루기가 다테마스와 간수 등과의 기싸움으로 옮겨가면서 활발하게 살아 숨 쉰다. 그 드라마의 힘의 원동력은 열과 후미코의 대사와 정신병자 같은 행동에 있다. 때론 슬프고, 때론 웃긴다.​

‘동주’가 단순한 항일애국 영화가 아니었듯 ‘박열’ 역시 그런 노선을 걷는다. 열과 후미코가 ‘일제가 일본 국민을 위해서가 아닌, 소수의 기득권층을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한 것에 대해 반발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이유’는 바로 혁명에 있었다. 왕이나 귀족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추구한 것이다.​

무정부주의는 철학적 주권주의와 한 몸이다. 루터가 권력화 된 기존의 종교체제에 반기를 들었듯 특권화 자본화를 반대한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사실상 사라졌다. 외국에선 잘 안 쓰는 자본주의라는 이념에 밀려난 것이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반대에 있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와 친한 것도 아니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오히려 민주주의와 밀접하다. 다만 지구의 모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과 달리 정부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게 아나키즘이다. 당연히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이념이지만 어차피 세상엔 다양한 이념과 철학과 종교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것에 대한 각자의 선택의 자유 역시 허용되는 게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열은 툭하면 단식을 하고,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분노한다. 후미코는 다른 죄수를 시켜 강간하겠다는 간수의 협박에 “너 먼저 들어와”라며 옷을 벗어던지고, “같은 일본인으로서 봐주겠다”며 유리한 진술을 유도하는 다테마스에게 “박열과 똑같이 해달라”고 추상같은 태도를 보인다.

곧 사형선고를 받을 것을 안 박열은 후미코와 함께 고향땅에 묻히기 위해 다테마스에게 부탁해 혼인신고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고는 마지막 정사까지 나누는 여유를 보인다. 이 모든 태연함과 침착함은 바로 그들의 변하지 않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이 감옥에서 전향한 빨갱이만 수백여 명”이라는 간수의 협박에 꿋꿋하게 신조를 지켜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왠지 91년 전이 아니라 현재의 풍경 같다. 미즈노를 비롯한 일본의 기득권 세력은 박열 일행을 ‘빨갱이’라 부르며 분노와 살해의 대상으로 삼는다. 마치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빨갱이’라 이단시하며 무분별한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를 애국이라 칭하는 일부 단체를 연상케 한다.​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행복을 헤도니아와 에우다이모니아로 구분했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처럼 비현실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최소한 박열과 후미코는 부나 출세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인 헤도니아가 아닌,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느끼는 희열이나 성취감의 행복을 뜻하는 에우다이모니아의 삶을 살고, 그 속에서의 장렬한 죽음을 추구한 선구자였다. ‘모든 것을 초월한 완벽한 사랑’과 함께 이 감독이 그리고자 하는 주제다.​

이제훈은 인생의 영화를 만났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이다. 최희서는 여배우의 패러다임을 바꿀 기세다. 연기 못하는 배우를 연기하는 건 매우 힘들다. 그런데 그녀는 한국말을 잘 못하는 일본여자 역할을 정말 미쳤다는 표현이 적확한 혼신의 연기로 소화했다. 129분. 12살 이상. 6월 2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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