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침묵>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침묵’(정지우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의 제목이나 포스터만 보고 ‘그저 그런 치정과 법정 드라마려니’ 했다간 큰코다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감독은 물론 주연부터 조연까지 모든 등장인물들과의 두뇌싸움을 펼칠, 그리고 지적인 유희를 즐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태산그룹 회장 임태산(최민식)은 20대 무남독녀 미라(이수경)와 둘이 사는데 인기가수 유나(이하늬)와 약혼한 사이다. 유나는 미라와 친해지려 하지만 아버지에게 적대감을 가진 미라가 유나를 곱게 받아들일 리 만무. 돈이면 못 할 게 없다는 생각을 가진 태산은 정관계에 깊은 인맥을 형성해놓고 심지어 측근을 대통령으로 만들 계획까지 갖고 있다.

조용한 저녁. 여의도 근처 한강에 띄운 요트에서 태산은 유나에게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피아제 명품시계를 선물한 뒤, 컵라면 두 개를 가져온다. 그때 유나의 휴대전화에 미라의 ‘만나자’는 문자메시지가 뜬다. 그렇게 유나는 강남의 한 클럽으로 가지만 몇 시간 뒤 청담동 집의 주차장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 영화 <침묵> 스틸 이미지

사건현장 관리실은 의문의 화재로 데이터가 지워진 상태. 과거에 태산을 기소했다가 퇴직당할 뻔했던 검사 동성식(박해준)은 회식 중 유나의 사건 소식을 뉴스로 접하자 사건현장으로 출동한다. 그렇게 성식과 태산의 악연은 또 이어진다. 경찰과 검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미라를 지목하고, 태산은 거대로펌 장평에 사건을 의뢰한다.

미라가 변호사 접견을 거부하자 태산은 대학생 때 미라의 가정교사를 했던 초보 변호사 최희정(박신혜)을 접견변호사로 섭외한다. 미라를 만난 희정은 “기억이 안 난다”는 그녀의 무죄를 믿는다. 그리고 태산은 아예 희정에게 이 사건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돈과 경력이 아쉬운 희정에겐 큰 기회다.

사건은 불리하게 진행된다. 예전에 미라가 만든 한 컴퓨터게임이 마치 이번 사건을 예고라도 했듯 무척 잔인하다는 내용이 온라인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누리꾼마저 미라를 진범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이 과정에서 유나가 전 남자친구와의 잠자리를 녹화한 섹스비디오가 나돌면서 사건은 더욱 복잡하게 꼬인다.

▲ 영화 <침묵> 스틸 이미지

유나에겐 스토커 같은 팬 김동명(류준열)이 있다. CCTV 설치기사인 그는 유나의 주변에 CCTV를 몰래 설치했었다. 희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명의 전자제품 가게를 찾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다. 동명은 CCTV로 이 광경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희정은 밤늦도록 기다리다 허탕을 치고 돌아선다.

태산은 수족 같은 정승길(조한철)을 유나의 매니저 겸 미라의 운전기사 등으로 부려왔다. 승길 역시 가까운 곳에서 희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희정이 차를 돌리자 승길은 승용차로 가게 문을 부순 뒤 동명의 녹화자료를 챙겨 나오지만 경찰에 포위당하고 체포되기 전 자료를 근처에 숨긴다. 굉음과 경찰의 출동에 현장으로 되돌아온 희정은 우연히 승길이 숨긴 자료를 발견하고 복원작업에 들어간다.

갑자기 태산이 희정에게 중요한 정보를 귀띔해준다. 최근 피아제 측에서 연락이 왔는데 유나에게 선물했던 그 시계를 웬 남자가 가져와 환불해갔고 그가 바로 승길이라고. 희정은 승길을 증인으로 법정에 세운 뒤 자극적인 발언으로 그의 흥분을 유도한 끝에 감정에 북받친 그로부터 엄청난 발언을 이끌어내는데.

▲ 영화 <침묵> 촬영 현장

말미에 이르면 다수의 관객들은 손수건을 꺼내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 감독에게 뒤통수를 크게 한 대 맞았다고 혀를 내두를 것이다. 드라마의 큰 틀은 예상했지만 디테일이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한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유주얼 서스펙트’도 ‘식스 센스’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아웃포커싱된 태산이 서서히 인포커스로 처리되며 시작된다. 여기에 태산이란 인물의 내면세계가 담겨있다. 그의 성장과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십중팔구 어렵게 자랐고, 힘겹게 성공을 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가치관은 돈 하나로 통일된다. 그는 성식과 말다툼을 벌일 때 “돈이 진심이다. 사랑도 가족도 친구도 돈이 떨어지면 다 떠난다”고 일갈한다.

그는 대통령마저도 자신의 돈으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검찰총장쯤이야 문제 될 게 없다. 그 자리를 미끼로 성식을 매수하려는 그의 면모는 무서우리만치 일방적으로 확연하다. 과연 그는 유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긴 한 걸까? 또 “걔는 내 돈을 다 써야 만족할 것. 누가 안 보면 갖다 버리고 싶다”고 거침없이 흉을 보는 미라에게 진정한 부성애를 갖추기나 한 걸까?

▲ 영화 <침묵> 스틸 이미지

미라를 제외하면 모든 인물이 ‘흙수저’ 출신이다. 유나는 아름다운 외모에 명품으로 치장하고 재즈를 부르는 지적인 매력까지 뽐낸다. 하지만 연예인이다. 모든 게 연기다. 그녀도 화가 치밀면 쌍욕쯤은 우습다. 게다가 젊은 남자와 섹스비디오까지 찍을 정도로 천박하다. 당연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을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려왔을 것이고, 최소한 삼촌 나이의 갑부 태산을 만나자 애인을 헌신짝처럼 차버리고 그에게 찰싹 붙었다.

성식도 비뚤어져있기는 마찬가지. 자신을 매수하려는 태산에게 “이게 대한민국 검사를 무엇으로 보고”라며 분기탱천한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 다니고, 편의점에서 홀로 밥을 먹을 정도로 꽉 막혀있고 그래서 친구도 없다. 게다가 검사를 자부심이 아닌 특권의식으로 치부하며 재벌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에서 우러난 편견이 강하다. 그가 미라나 태산을 잡아넣으려 한 건 소명감이 아니라 시기와 질시의 발로였다.

▲ 영화 <침묵> 스틸 이미지

희정 역시 가난하다. 대학생 때 등록금을 내기 위해 재벌집 딸의 고액과외를 했고 검사나 판사가 아닌 변호사의 길을 택한 건 뭔가 결여돼 있거나, 지나치게 가난했기에 빨리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못하다. 친구와 단칸방을 함께 쓸 정도로 어렵다.

▲ 영화 <침묵> 스틸 이미지

미라는 가장 잘못 자란 재벌가 2세의 전형이다. 처음 만난 유나를 “엄마랑 하나도 안 닮았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아버지에겐 “병신 새끼”란 욕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타고난 재물을 물 쓰듯 탕진하는 데 거침이 없을 정도로 올바르게 봐줄 구석이 하나도 없다.

▲ 영화 <침묵> 스틸 이미지

승길은 그냥 태산의 개다. 태산이 돈만 주면 마치 뼈다귀를 던져준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개처럼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문다. 동명은 전형적인 스토커이자 성도착증 환자다. 어떤 이는 ‘왜 이렇게 어긋난 사람들만 등장하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뉴스를 보고, 밤거리를 둘러보면 현실은 의외로 가깝다.

인간의 다양하고 복잡한 심리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게 놀랍다. 그 심리의 다변화를 그토록 심도 깊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경이롭다. 영화는 세 번의 반전을 찍는다. 관객은 첫째 반전에 ‘그럴 줄 알았다’며 유나에게 집중할 것이다. 둘째 반전에 사람이 어디까지 악해지면 그토록 지독한 악마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면서 온몸에 소름이 끼칠 것이다.

▲ 영화 <침묵> 스틸 이미지

그리고 세 번째 반전.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데 위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치정극-법정극-미스터리 서스펜스 등으로 계속 변주되던 플롯은 결국 최루드라마로 매조진다. 어쩌면 영화는 잔혹한 인간 내면의 이기주의와 아전인수 등의 추악한 심리에서 출발한 성장드라마일 수도 있다. 정말 정 감독은 뛰어난 얘기꾼이다. 시나리오만 따지면 올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태산의 요트의 이름이 프랑스어로 ‘축제’다. 희정이 희망적인 첫 수임을 따낸 날은 그해 첫눈이 왔다. 스토리도 결론도 결코 희망적인 축제는 아니지만 각 인물들이 한 뼘씩 성장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정의와 선과 사랑의 기준을 깨우쳐간다는 점에선 낭만적이다. 휘몰아치는 쇼트 덕에 125분이 절대 길지 않다. “넌 감당 못해” “아니, 할 수 있어”란 대화가 주제다. 피아제와 컵라면의 아이러니는 맥거핀이자 알레고리다. 15살 이상. 11월 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