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 25일 개봉된 ‘토르: 라그나로크’(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흥행세가 무섭다. 11월 2일(‘부라더’ ‘침묵’)과 3일(‘미옥’ ‘채비’) 개봉되는 한국영화 기대작들과의 대결만 팽팽하게 이어간다면 DC의 회심작 ‘저스티스 리그’와의 흥행대결도 꿈꿀 수 있을 듯하다. ‘토르: 라그나로크’에 관객들의 환호만큼이나 마블 중 가장 가볍다는 일부 매체의 혹평도 이어진다. 그 이유는?​

‘어벤져스’의 히어로 중 그나마 진지한 이는 100살이 다 돼가는 캡틴 아메리카다. ‘할배’답게 그는 어벤저스의 리더로서 사사건건 진중한 태도를 보이고 신중한 판단을 내리는 데 소홀하지 않는다. 정부가 어벤저스를 관리, 감독하기 위한 ‘슈퍼히어로 등록제’를 실시한다고 하자 이에 동조하는 아이언맨의 ‘아부파’와 갈라져 ‘독립군파’를 이끈 이가 캡틴 아메리카다.(‘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브루스 배너는 지나치게 학구적이고 내성적이며 피해의식에 젖어있다. 그의 또 다른 인격인 헐크는 말수가 적고, 오로지 분노만 불타오른다. 아이언맨은 영웅심 빼면 여자와 술밖에 모른다. 호크 아이는 로키에게 조종당할 만큼 정신력이 약하고, 블랙 위도우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다. 그래서 그나마 캡틴 아메리카랑 대화가 될 법한 유일한 인물은 인류가 아닌 천둥의 신 토르. 북유럽신화가 8세기쯤 본격적으로 완성됐다고 봤을 때 그의 나이는 최소한 1000살은 넘었다.​

그런 토르가 ‘토르: 라그나로크’에선 ‘몸개그’를 펼친다. 많이 가벼워졌다. 오프닝 액션 시퀀스에서 그는 불의 신 수르트와 싸운다. 오딘에게 한을 품은 수르트는 아스가르드로 쳐들어가 파괴하려 한다. 이를 막기 위해 지하세계로 온 토르는 수르트의 수많은 부하들은 물론 산만한 수르트와 악전고투 중이다.​

말로 수르트에게 약을 올려 화를 돋우는가 하면 엄청나게 뻐기면서 잘난 체를 하는 그는 영락없는 아이언맨이다. 여유를 부리며 으스대는 그가 믿는 구석은 묠니르.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수르트가 머리에 피어오르는 김을 참지 못해 공격을 하려 할 때 토르는 여유롭게 오른손을 뻗는다. 그러나 그 위급한 순간에 손에 잡히는 건 수르트의 분노의 열기뿐.

▲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스틸 이미지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묠니르가 날아와 토르의 체면과 생명을 간신히 지켜준다. 수르트를 혼미하게 만든 뒤 그의 왕관을 빼앗고, 이를 저지하려는 엄청난 숫자의 수르트의 부하들이 몰려오자 토르는 아스가르드의 수문장 헤임달을 부르지만 왠지 차원(혹은 공간)이동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거짓으로 헤임달을 다른 데 보낸 간신 스커지가 문을 관리 중이었던 것.

스커지는 천박한 여자들을 불러 모아 허풍을 떨기에 여념이 없고, 한 여자가 호기심에 헤임달의 장검 부르트강을 만진 덕에 간신히 토르가 아스가르드로 무사히 귀환한다. 그러나 아버지 오딘을 모셔오기 위해 로키를 앞세워 지구에 갔다가 돌아올 때의 귀향길은 귀양길이 된다. 오딘의 첫째 자식이자 그를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토르를 자신의 왕위계승의 걸림돌로 여기는 헬라 탓.

도망가는 토르와 로키를 쫓아 이동문 안에 쳐들어온 헬라의 공격에 형제는 아스가르드의 반대편에 있는 행성 사카아르에 불시착한다. 토르에게 묠니르는 신의 능력을 완성시켜주는 ‘만병통치약’이다. 그런데 헬라가 한 손으로 부스러뜨림으로써 그의 체면을 무참하게 구겼다. 잘생기고 벌크업의 근육질 몸매를 갖췄으며 무엇보다 신이란 존재이기에 지구 미녀 제인을 사로잡았던 토르는 이제 너드(똑똑한 척하지만 결국 멍청이)가 돼 ‘몸개그’를 펼치는 것이다.​

그는 사카아르에서 아버지의 친위대인 발키리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자신의 호위무사라고도 할 수 있는 스크래퍼142에게 정체를 밝혔음에도 무시당한 뒤 무기력하게 포획돼 검투경기장 안에 강제로 서게 된다. 뜻밖에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소코비아의 혈전 이후 퀸젯을 타고 홀연히 사라졌던 헐크를 만난다. 반가움에 친구 운운하지만 헐크는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붓는다. 토르의 체면은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힌다.

▲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스틸 이미지

감독은 헐크마저 망가뜨린다. 토르의 상징과도 같던 묠니르를 빼앗고 그의 매력을 완성하는 기다란 머리마저 짧게 쳐버린 것도 모자라 헐크의 헤어스타일도 유사하게 바꾼 것. 죽일 듯 싸웠던 두 사람은 숙소에서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다는 둥 미용실이나 목욕탕의 대화를 연상케 하는 ‘아줌마 수다’를 나눈다. 이들이 전 우주를 벌벌 떨게 할 만큼 엄청난 전사라는 게 웃기다.

이들의 대화 중 가장 치열한 주제는 ‘누가 더 강하냐’다. 마치 초등학생들이 모여 ‘배트맨이랑 스파이더맨이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라는 주제로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는 상황을 떠올리게 만든다. 적이거나 일시적 우방이었던 토르와 로키의 ‘어긋난 형제애’도 많이 바뀌었다. 번번이 골탕 먹었던 토르는 더 이상 로키에게 당하지 않고 역공을 퍼붓고, 로키는 영웅들의 너드 캐릭터에 방점을 찍는다.​

사카아르의 통치자 그랜드 마스터는 검투 경기를 즐기면서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행성의 주민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그에겐 잔꾀와 경제력을 제외하면 특별하게 뛰어난 능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에 임팩트 강하게 등장한 콜렉터의 형제라는 게 눈길을 끈다. 비범한 듯하지만 실수투성이인 그랜드 마스터는 토르를 얕잡아봤다 큰코다친다. 토르가 검투사들을 부추겨 일으킨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나는 것.​

▲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스틸 이미지

전공분야에서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진 신경외과의사 스트레인지는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오만함이 넘치는, 미완성 인격 중에서도 아주 꼴불견이었다. 그러나 대형교통사고 뒤 재활과정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로 거듭난 이후에는 동양의 철학을 통해 거의 성불한 인격체로 거듭난다. 영화 초반에 그는 아주 인상 깊게 잠깐 등장해 토르의 혼을 빼앗고, 로키를 괴로운 무아지경에 빠지게 만들며 큰 재미를 준다.​

와이티티 감독은 배우 겸 작가이기도 하다. 뉴질랜드 출신으로 성명에서 마오리 흔적이 묻어나는 그는 피터 잭슨에 대한 선망 혹은 콤플렉스가 없지 않을 것이다. 마블 시리즈의 세계관은 이미 지평을 넓힐 대로 넓혀놓은 상태다. 아마 감독은 이런 모든 환경과 마블의 정체성 등을 충분히 고려한 끝에 이번 결과물을 정답이라고 결론으로 내린 듯하다.

현재 지구촌은 한반도의 긴장상태와 다르지 않다. IS의 발악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 속에서 유럽의 경제위기는 진행 중이고, 난민문제를 비롯해 내전과 식량난, 그리고 인권침해 등의 사회적 국가적 문제들도 얽히고설켜있다. 과학이 최첨단으로 치닫고, 주식시장이 일취월장하는 만큼 음지의 그늘도 더욱 짙어진다. 영화라는 문화예술을 이끄는 사람들은 돈 많은 인텔리겐치아 중에서도 사회지도층이지만 그걸 즐기는 다수는 평범한 서민이다. 주머니가 가볍고, 내일이 불투명한 그들에게 필요한 영화는 당연히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다.

▲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스틸 이미지

슈퍼히어로 장르는 ‘꿈의 공장’이라는 영화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안정적인 경제적 효자다. 일부를 제외하면 돈을 들이면 들인 만큼 벌어들이는 익심형 상품이다. 지금처럼 세계 정서가 불안할 때 슈퍼히어로의 액션코미디만큼 속이 시원한 볼거리는 없다. 폭탄으로 머리칼 하나도 태울 수 없는 '금강불괴지신' 헐크와, 천둥을 다스리는 신이자 신의 세계의 왕세자인 토르가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고 ‘몸개그’를 펼치는데 안 재미있을 리가 없다.​

단순히 코미디의 향연만 펼치면 지나치게 가볍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관객의 상상력의 한계를 비웃는 풍부한 창작의 세계와 예측 불가능한 액션의 수위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인트로와 아우트로에 엄청난 스케일의 전투 몹신을 배치하고, 요소요소에 아기자기하거나 ‘어마무시’한 액션을 포진해놓은 것이다. 감독의 논리는 간단하다. 눈부신 비주얼 아래 화려한 액션과 배꼽 잡는 유머의 총동원!​

인트로와 아우트로에 삽입된 레드 제플린의 ‘Immigrant song’은 그 속도감과 편곡, 그리고 로버트 플랜트의 샤우팅 창법이 시퀀스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가사에선 ‘우리는 얼음과 눈의 땅에서 왔다’ ‘신들의 망치’ ‘발할라’ 등 토르와 딱 들어맞는 내용들이 언급된다. 토르는 게르만족의 북유럽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발할라는 발키리가 안내하는 죽은 영웅들의 영원하고 풍요로운 안식처다. 아마 오딘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비주얼과 유머감각과 음악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연상시키면서도 한층 업그레이드됐고, 슈퍼히어로들의 연합인 ‘리벤져스’라는 설정은 당연히 ‘어벤져스’를 대놓고 오마주하면서도 살짝 자아비판하는 모양새다. 검투경기는 ‘글래디에이터’나 ‘300’의 고대 그리스 혹은 로마의 역사의 레퍼런스다. ‘범죄도시’는 잔인하지만 한편으론 피식피식 웃기는 코미디가 넘친다. 두 영화의 장르나 만듦새는 전혀 다르지만 흥행의 배경을 이루는 관객의 의식은 비슷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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