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1987>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현대 한국사에서 박종철이나 이한열은 플루타르코스의 ‘대비열전(영웅전)’의 주인공과 다름없다. 만약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이 없었다면 노태우의 6·29선언과 이에 따른 국민투표에 의한 직선제 개헌이 있기나 했을까? 비록 그해 12월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 바통을 김영삼이 이어받긴 했지만, 그 후 김대중에 의한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뤄지기나 했을까? 만약 노무현이 없었다면 지난해의 촛불집회가 불을 지핀 박근혜 정권의 만행에 대한 처단과 정권교체가 이뤄지기나 했을까?

‘1987’(장준환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은 바로 그해를 되짚어보고 분명히 상기하자는 영화다. 1987년 1월. 대공수사처 남영동 분실에서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죽는다. 당황한 담당 경찰들에게 박 처장(김윤석)은 담담하게 ‘뭐 그런 걸로 호들갑이냐’며 증거인멸을 위해 화장을 지시한다.

박 처장이 이토록 자신감에 넘치는 건 전두환 대통령과 안기부장(문성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자신이 무소불위의 실세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경찰 상관도, 검찰도 무서울 게 없다. 그의 부하가 당일 당직이었던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를 찾아가 화장명령서에 사인을 요구한다.

수개월 전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서 일방적으로 경찰 공안과 공조한 이유로 낯이 뜨거운 최 검사는 갈등하는데 박 처장 측이 지나치게 안하무인격으로 밀어붙이자 반발해 철저한 부검 등의 원칙수사를 지시한다. 경찰과 검찰은 물론 안기부와 청와대까지 압력을 행사하자 최 검사는 동아일보 윤 기자(이희준)에게 고급 정보를 흘린다.

▲ 영화 <1987> 스틸 이미지

당황한 경찰은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고 발표했다가 비웃음을 사고 결국 박 처장은 자신의 심복인 조 반장(박희순) 등 2명을 희생양으로 내세운다. 둘은 사망과 직접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선 후 특사로 빼주겠다"라며 1억 원이 든 통장을 건네는 박 처장의 말을 믿고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수감된다.

박 처장은 정권연장을 위해 재야 운동가인 김정남(설경구)을 간첩으로 조작해 김대중과 김영삼의 정치생명을 끝장낼 음모를 꾸미는 중이다. 정남은 한 절에 은신 중이다. 조 반장이 수감된 교도소엔 정남과 함께 활동했던 이부영(김의성)도 있다. 노동조합을 설립하려다 파면될 뻔했던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은 정남과 부영의 연락책 노릇을 하고 있다.

특이한 외모 때문에 검문을 받기 쉬운 그는 연세대학교에 합격한 조카 연희(김태리)에게 카세트녹음기를 사준 뒤 편지전달 심부름을 맡기고 있다. 연희는 삼촌은 물론 시위를 하는 대학 선배들에게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인물로, 갓 입학해 만난 선배 한열에게 첫눈에 반한 상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30년 전의 역사, 또는 요즘 젊은이는 별로 관심이 없을 과거사, 혹은 ‘보수’는 몹시 불쾌할 ‘선동’이 적절한 자료화면과 섞여 매우 진지하게 사실적으로 전개되는 카메라워크 등의 연출력이 세련됐다. 있는 사실에 그럴듯한 픽션 및 가공인물을 더해 드라마의 내용과 사이즈를 키우고, 스릴러 요소와 버무려 서스펜스로 부풀린 솜씨가 ‘지구를 지켜라’ 이상이다.

▲ 영화 <1987> 스틸 이미지

박 처장은 평안남도 지주집안 출신이다. 아버지가 양자로 거둬 키운 의붓형이 나중에 공산당을 몰고 와 반동 부르주아라며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상처 때문에 ‘빨갱이’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을 갖고 한국전쟁 때 월남한 인물. 그는 자신이 애국자라는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부하들에게도 그걸 수시로 주입하고 확인한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봤듯 장 감독은 진보와 개혁의 성향이다. 이 영악한 작가는 강 사장(백윤식)에게 나름의 당위성을 부여했듯 박 처장을 일방적인 악인으로 그리는 패착을 범하지 않는다. 북측에 있을 때 박 처장은 선의를 베푸는 부자였다. 하지만 그 희생정신의 결과는 가족의 죽음과 몰락이었다. 남과 북,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흑과 백을 확연하게 가르는 패착을 감독은 영민하게 피해 간다.

분명히 영화에서 박 처장은 나쁜 사람이지만 그의 이데올로기와 행동에는 나름의 경험과 신념이 담겨있다. 만약 북측을 김일성이 지배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토록 ‘빨갱이’에 치를 떠는 악귀가 되진 않았으리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영화엔 따로 주인공이 없다. 굳이 손꼽으라면 단연 박 처장이지만 모두가 주인공이고 그래서 수많은 유명 배우들의 연기솜씨와 매력을 즐기는 재미가 매우 강력하다. 특히 김윤석과 조우진의 연기는 엄청난 빛을 발한다.

할리우드의 멜 깁슨이 메가폰을 잡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를 찬양했다면 장 감독은 정남이라는 민주화의 상징성을 교회 유리에 새겨진 예수와 겹치는 기법을 통해 당시 군홧발과 총으로 장기 집권하려던 전두환 일당을 향해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친 수많은 ‘박종철’에게 헌사를 보낸다. 대표적인 민중가요인 ‘그날이 오면’을 소재로 연희가 “그날 같은 건 안 온다. 꿈꾸지 말고 정신 차려”라며 “가족을 생각하라"라고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한열이 “나도 그러고 싶지만 잘 안 돼.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라고 힘없이 답하는 장면은 인상 깊다.

▲ 영화 <1987> 스틸 이미지

연희는 대표적인 당시의 국민이다. 아닌 걸 알고 있지만 힘이 없기 때문에 바꾸려 나서지 못하는 나약한 국민. 대다수는 사실 그랬다. 하지만 그게 바로 패배의식이고 노예근성이라는 걸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라는 한 마디가 웅변한다. 모든 출발은 ‘하나’부터다. 처음부터 ‘전부’일 순 없다. 한 사람이 변화를 위해 움직여야 1만 명, 100만 명이 된다는 메아리가 긴 여운으로 남는다.

연희와 한열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운동화다. 운동화는 민주화운동과 자유를 상징한다. 더불어 둘이 번갈아 한쪽의 운동화를 잃어버린 뒤 서로에 의해 새 운동화를 신는 건 보수와 진보 중 특정한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모든 이념과 정서는 어느 한쪽이 틀린 게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를 뿐이니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해 보조를 잘 맞춰야 한다는 의미다.

박근혜 정권은 역사를 왜곡하려는 등 국정농단을 일삼다 국민의 심판을 받는 중이다. 역사가 왜 중요한지, 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는지 그 진중성을 외치는 영화다. 옥에 티. 이한열은 7월 5일 숨을 거뒀고, 연희가 즐기는 유재하의 유작은 8월 말에 발표돼 11월 1일 그가 요절한 뒤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의 음악은 여전히 진보적이고 감동적이며 영화적이다. 이런 가슴 뭉클한 영화에 유재하보다 나은 국내 대중음악을 찾기란 쉽지 않다. 129분. 15살 이상. 12월 27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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