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tbsTV 화면 캡처

대선에 지면 우리는 몽땅 형무소행

여기에서 김 장군은 앞서 얘기한 내용, 즉 김형욱씨가 김재춘씨에 이어 어떻게 중정부장으로 부임하게 됐는지 그 내막을 보다 자세하게 밝힌다.

1963년 7.6사건(중정에 의한 공화당 지지세력 암살기도 사건) 직후 박 의장은 그 책임을 물어 김재춘 부장을 전격 해임시켰다. 이튿날 오전 김 장군의 정책자문역 이재만씨가 허겁지겁 찾아왔다.

“위원장님, 방금 신임 중정부장이 신고하고 갔습니다.”
김 장군이 눈을 동그랗게 하면서 “아니 누군데?”하고 물었다.
“장경순입니다.”

김 장군은 속으로 ‘아니야, 이건 아니야. 지금 때가 언제인데...’라고 중얼거렸다. 김 장군은 서둘러 박 의장 집무실로 달려갔다. 박 의장은 혼자 집무실에서 상념에 빠져 있었다.

“각하 안됩니다.”
“뭘 말인가?”
“지금 중정부장은 신중하게 임명하셔야 합니다.”

김 장군의 말이 어이가 없었던지 약간 화가난 듯이 말했다.
“아니, 인사는 내 고유권한인데 무슨 참견이 많아요?”

김 장군이 자세를 가다듬고 말했다.
“각하, 선거가 두 달밖에 안 남았습니다.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중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과거 김종필씨나 김재춘씨는 자신의 프락치들만 심어놓는데 급급했습니다. 이번 민정이양 선거에서 각하가 당선이 안되면 멀지 않은 시기에 우리는 형무소에 들어가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형무소에 들어간다니?”

박 의장은 매우 놀라워했다. 사실 대통령 선거에서 패하면 나중에 군사반란이니 어쩌고 저쩌고 해서 감옥신세를 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참 생각하던 박 의장이 말했다.
“그럼 누굴 시켰으면 좋겠소?”

그러자 김 장군은 지체없이 말했다.
“몇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고향이 이북출신이어야 할 것, 과거 중정에 관여했던 사람일 것, 두뇌가 비교적 명석하지 않아야 할 것 등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박 의장이 다시 말했다.
“그런 조건에 맞는 사람이 누구요?”
“김형욱씨가 제격입니다. 그는 육사8기로 중정 창설때에도 관여를 했으며 이북출신에다 계파에 얽매이지 않고 각하의 뜻을 그 누구보다도 충직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당사자는 물론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부탁을 받은 바 없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박 의장이 말했다.
“김 장군 고집에 내가 한번 양보하지.”

결국 김형욱씨가 신고까지 마친 장경순씨를 취임 직전에 밀어내고 신임 중정부장을 맡게 됐다. 이어 김 장군은 박 의장이 원하는 대로 다가오는 대선에서 승리를 할 수 있도록 많은 역할을 했다.

선거 당일인 1963년 10월15일 박 의장 내외는 경주에 내려가 있었다. 여기에서 당선 소식을 전해들은 박 의장은 이튿날 오후 서울 장충동 공관으로 돌아왔다. 김 장군은 모처럼만에 공관에서 박 의장과 격의없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이 날 둘은 기쁨을 만끽하면서 날이 새다시피했다. 술이 거나해지자 박 의장이 말했다.

“고생 많았소. 그나저나 민정 출범하면 김 장군의 거취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각하, 원래 말씀드렸던 대로 저는 군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러지 말고 상공부장관이나 재경부장관을 맡아주면 어떻겠소?”

그러나 김 장군은 군 복귀를 다시 강조했다.

▲ 사진=tbsTV 화면 캡처

군출신 등용하지 말고 장기집권 초석 다져야

박 의장은 김 장군의 고집스런 성격을 잘 아는 터였다.
“김 장군, 거취문제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소. 대신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나가면 좋겠소? 기탄없이 얘기해주시오.”

김 장군은 기회다 싶어 평소 마음속에 있던 생각을 털어놨다.
“취임 이후 각하가 하실 일은 우선 국민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입니다. 혁명 초기에는 청렴하게 비춰졌는데 나중에 고급차를 타고 다니고 해서 이미지가 흐려졌습니다. 그리고 당장 군출신을 장관으로 등용하지 말고 과거 이승만 박사가 쓰던 인재를 활용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안될 경우 그 때 가서 군출신으로 바꾸면 됩니다. 그리고 장기집권의 초석을 다져야 합니다. 경제개발을 계획대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기집권을 해야만 합니다. 과거 정권이 조석으로 바뀌는 바람에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인적 자원을 많이 확보하는 일은 장기집권을 다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대통령 당선만 하더라도 기분이 좋은데 장기집권을 해야만 경제부흥을 이룩할 수 있다는 김 장군의 말은 박 의장의 기분을 한껏 고조시켰다.

“각하, 제 자신은 군복귀에 앞서 미국 하버드에서 1년간 연수를 하겠습니다.”
“하버드는 왜요?”
“수준높은 민간학문을 군발전에 활용할 생각입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박 의장이 말했다.
“김 장군, 이것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 하나 고르시오.”
박 의장은 도처에서 온 당선 축하화환들이 놓인 곳을 가리켰다. 김 장군이 선뜻 점을 찍지 못했다.
“저 것은 어떻소?”

박 의장이 손가락으로 감귤나무 화분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탐스럽게 감귤 몇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모처럼 친구같은 분위기속에 술잔을 들이킨 뒤 김 장군은 숙소로 돌아왔다. 감귤화분은 이튿날 약속대로 자신의 숙소에 배달됐다. 하지만 이 화분은 얼마 뒤 도난당하고 말았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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