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악질경찰>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상영 중인 ‘악질경찰’(이정범 감독)과 내달 3일 개봉되는 ‘생일’(이종언 감독)은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악질경찰’이 내러티브의 뼈대로 삼았다면 ‘생일’은 그 후유증 전체로 시퀀스를 채운다. 두 영화가 세월호를 꺼내든 이유는 유사하겠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좀 다르다. 

‘악질경찰’의 주인공은 안산 단원경찰서의 비리 형사 조필호와 단원고 여고생 미나. 고아와 다름없는 미나는 1년 전 세월호 참사로 단짝이었던 지원을 잃은 뒤 후배 소희와 함께 산다. 소희는 임신 중이고, 두 소녀는 학교에 안 다니며, 범죄를 일삼으면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간다.

동네 조폭과 합자해 한 건물을 사들인 필호는 자금이 부족하자 기철을 시켜 경찰의 압수 창고를 털려다 기철도, 비자금도 잃고 태성그룹 회장을 비호하려 한다는 검찰과 경찰의 의심을 사게 된다. 비자금을 찾고 누명도 벗으려면 기철이 죽기 전 남긴 증거가 필요하다. 그게 미나에게 있다.

미나를 만나기 전까지 필호는 피도 눈물도 도덕심도 정의감도 없는 무뢰한이었다. 단 한 가지 희망은 보였으니 동거 중인 연인에겐 진심이었다. 그런 인간성의 잔재가 미나의 분노를 통해 생득적인 에테르를 되찾는다. 태성 회장의 돈 가방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목덜미를 치는 것.

▲ 영화 <악질경찰> 스틸 이미지

일각의 지적대로 이 영화의 기승전결에 세월호 참사는 다소 억지스러울 수도 있다. 필호가 변전하는 계기 역시 썩 유려하지 못하다. 그러나 세월호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비난은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슈퍼 최루탄’이란 호평을 이끌어낸 ‘생일’의 문법을 택하는 게 지름길이었을 것이다.

‘악질경찰’이 집중하는 지점은 모든 사회적 분노다. 메가 비극 세월호를 치유해주지 못하는 데 대한 비분강개다. 재벌, 정부, 정치권의 기득권 중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 세월초 참사의 공범이란 시선이다. 필호가 인공 임신 중절 수술을 하려던 불법 의사의 추악함 때문에 정의로워지는 시퀀스를 보라!

필호와 미나의 과거는 드러나지 않지만 현재의 환경으로 봤을 때 기득권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노여움을 가질 법한 당위성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미나는 아이들의 무고한 죽음에 책임지지 않는 어른에게서 내일의 절망을 봤고, 필호는 과거에 공권력이 정당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경찰이 됐다.

‘생일’은 세월호 참사로 아들 수호를 잃은 정일과 순남 부부, 그래서 어리광도 부리지 않는 딸 예솔의 얘기다. 사고 당시 정일은 베트남에 있었고, 소식을 듣고도 곧장 달려올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순남은 그런 정일이 서운하다 못해 정이 떨어져 연락을 끊고 이사한 뒤 이혼 서류를 작성했다.

▲ 영화 <생일> 스틸 이미지

3년여 만에 돌아온 정일은 순남에게 외면당하고, 예솔에게 밀려나며, 수호를 추억하는 것조차 용인 받기 힘들다. 이 영화는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건 기본이다. 추모와 수호의 라임, 그리고 ‘수호천사’라는 생전의 그의 별명이 그렇다. 그런데 더 집중하는 곳은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다.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의 생일이면 모여서 추억과 추모와 위로를 나눈다. 유족은 보통 고인의 기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게 풍습이지만 이 영화는 생일에 집중한다. 그건 아이들을 아직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반어법이다. 이유는 나이도 어리지만 비상식적이고 의문투성이인 사고사기 때문이다.

유가족의 통증은 겉으로 보인다. 그런데 친구와 달리 살아남은 생존자의 비밀스러운 고통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감독은 ‘이웃’과 이웃하며 체득적인 취재를 통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만약 돈을 버는 게 주목적이었으면 왜 상업적 문법 대신 굳이 아프고 쓴 고행을 선택했을까?

정일은 베트남에서 중소기업의 고위직에 있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 우리 아버지들이 돈을 벌고자 중동으로 진출해 고생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를 뉴스로 접했지만 그 즉시 날아올 수 없었다. 그는 수호는 물론 순남과 예솔에게 평생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

▲ 영화 <생일> 스틸 이미지

성실하고 선한 그는 한눈 한 번 안 팔고 가족을 위해 외길을 달렸다. 그럼에도 순남은 이젠 도저히 그와 살 수 없다. 미움을 넘어 원망이 극에 달해 혐오스럽다. 예솔은 오빠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갯벌 근처에도 못 가고, 생선에 젓가락을 댈 수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하다.

헤어질 이유가 없지만 살 당위성도 없는 가족. 순남은 수호가 느꼈을 공포와 공황에 대한 자책의 죄악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지켜주지 못한 것도 미안한데 마지막 애원마저 들어줄 수 없게 만든 그 가난함의 근원이 정일과 이 사회라는 원망 탓에 앞뒤가 꽉 막혔다.

순남은 왜 망자들의 ‘생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호의 교실을 방문해 그곳의 아이들을 보고, 직접 ‘생일을 체험’해본 뒤 납득하고 수긍하게 된다. 각박한 이 사회는 기계론적 유물론에 치우치기 일쑤다. 자본주의는 그걸 더 부추기고 종용하지만 종교와 신화를 지우진 못한다.

사르트르‘파’를 제외한 야스퍼스 등의 실존주의자들은 다른 실존과 연관되는 개별적인 주체성만이 초월자(신)와 관계할 수 있다고 봤다. 누구나 신화와 종교를 확신하진 않지만 대부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동물로서 산다는 뜻이다. ‘생일을 해야’ 하고, ‘이웃’과 관계할 존재론적 이유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