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로망>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로망’(이창근 감독)은 인류 공통의 관심사인 생과 사, 부부관계, 가족관계 등을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로 풀어낸 휴먼 드라마다. 잔잔한 시냇물처럼 흘러가다 물살이 조금 센 강물로 증폭되더니 험한 파도 같은 감정의 출렁임을 유도한 뒤 결국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 것’으로 매조진다.

충청북도 소도시 한 단독주택. 결혼 45년 차 75살 남봉(이순재)과 매자(정영숙) 부부는 아들 진수(조한철)와 정희(배해선) 부부 그리고 손녀 은지(이예원)를 데리고 산다. 아직도 남봉은 개인택시를 운영하고 있지만 박사인 진수는 아직도 교수 임용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고, 정희가 대신 돈을 번다.

어느 날 귀가한 남봉은 집안에 연기가 자욱한 걸 보고 깜짝 놀란다. 매자가 가스레인지에 뭔가를 올려놓고 깜빡 잊은 것. 매자는 남봉을 보고 “누구세요?”라고 묻는다. 남봉은 방에서 매자의 진료 카드를 발견하고 병원을 찾아간다. 이미 기억력과 인지능력이 급강하한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상황.

매자의 증상이 심각해지자 남봉은 진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자를 요양원에 보낸다. 하지만 살림이 엉망이 되고, 죄악감이 들자 다시 데려온다. 이번엔 정희가 반발하지만 남봉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봉은 택시 외관이 상한 걸 발견하고 블랙박스를 확인한 뒤 자신에게도 치매가 온 걸 깨닫는다.

▲ 영화 <로망> 스틸 이미지

정희는 둘째를 임신했다. 아버지에게 제 의견 한 번 표현 못하고, 무능력하기만 한 진수에게 지친 데다 매자의 치매 뒷바라지도 견딜 수 없던 정희는 은지와 함께 친정으로 간다. 뒤늦게 진수도 그들에게 달려가고 집안엔 남봉과 매자만 남는다. 어느 날 남봉은 매자와의 특별한 여행을 준비하는데.

남봉과 매자 부부는 수십 년 전 남존여비의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남봉은 단 한 번도 아내에게 따뜻했던 적도, 진수에게 부드러웠던 때도 없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생일을 챙겨준 적도 전무하다. 매자와 진수는 그런 권위에 감히 도전할 엄두도 못 냈다.

이들과 달리 진수와 정희 부부는 상당히 현실을 반영했다. 진수는 나름대로 배울 만큼 배웠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교수 임용에서 번번이 미끄러진다. 정희 앞에서 고개를 못 들고, 아버지 앞에선 주눅 들어 주도적이었던 적이 없다. 은지보다 철이 없고, 오직 엄마만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 같다.

연애 시절 남봉과 매자에게도 꿈이 있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남봉의 꿈은 매자와 결혼해 토끼 같은 자식을 낳는 것이었고, 소원은 돈을 벌어 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다. 매자 역시 토끼 같은 자식 굶기지 않고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게 소원이었고, 남봉을 그 꿈의 매개자로 믿었다.

▲ 영화 <로망> 스틸 이미지

첫 딸 진숙에 이어 아들 진수가 태어났다. 남봉이 꿈에 그리던 개인택시 면허증을 받고 이제 먹고살게 됐다며 친구들과 축하주를 마시던 날 세 가족은 연탄가스에 중독됐다. 매자는 진수는 구했지만 진숙은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내내 괴로운 여생을 살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치매에 걸렸다.

아마 그녀의 기억장애와 인지장애는 세월이 아닌 내면의 고통이 만든 산물일 것이다. 치매가 발병하면 그녀는 은지를 진숙으로 부르며 ‘정상’ 때와 달리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은지가 할머니라 부르면 서운해하면서도 ‘진숙아’라고 다정다감하게 부르며 온 세상을 얻은 듯한 미소를 띤다.

영화를 관통하는 한국적 가족의 정서는 요즘 세대에겐 의아할 것이다. 요즘의 테제는 ‘어떻게 끼니를 때우나’가 아니라 ‘뭘 먹고 행복함을 느끼나’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자식을 걱정하는 직접적인 방식보다는 어떻게 승진하고 성공함으로써 명예와 부를 거머쥐느냐의 자본주의적 이념이 만연됐기 때문이다.

남봉의 택시는 한 인간의 인생으로 대상화된다. ‘하늘 카센터’를 운영하는 친구 최가는 낡아빠진 택시를 버리고 새 걸 장만하라고 성화다. 하지만 남봉은 “마누라는 바꿔도 이 차는 안 바꿔”라며 “오래되면 폐차냐? 고치고 또 고치면 되지”라고 일갈한다. 늙는다고 쓸모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은유.

▲ 영화 <로망> 스틸 이미지

최가는 택시에 선루프를 만들어주겠다고 하지만 남봉은 거절한다. 남봉은 매자와 여행을 떠나 차 안에서 밤하늘을 보는 게 불편하자 “천장에 구멍을 뚫을 걸 그랬나?”라고 아쉬워한다. 카센터 이름이 ‘하늘’이다. 남봉은 “하나보단 둘이 낫다”고, 매자는 “둘보단 하나가 낫다”고 각각 의견을 달리한다.

남봉은 그래도 부부가 동병상련하는 게 의지가 된다는 자신의 발병의 합리화고, 매자는 자식에게 고통을 덜 주자는 희생정신이다. 여기서 삶과 죽음의 인식론이 대두된다. 남봉은 “꾸준히 다니면(살면) 세월이 보상해주겠지, 생각했는데 오리발을 내미네”라고 지난한 삶의 끝이 허망함을 한탄한다.

또 “이만큼 살았으면 벌 받을 만큼 받았잖아”라고 말한다. 삶이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라는 이 명제는 우리 윗세대가 꽤 험한 가시밭길을 걸은 것도 모자라 현재 다수의 젊은이들이 험난한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하는 현실을 대변한다. 제목의 원뜻은 통속소설이나 낭만이지만 여기선 소원과 꿈이 된다.

낭만으로 만난 부부의 삶은 어느덧 통속소설이 되고 꿈은 사라진다. ‘박사 아들’ 진수는 그냥 박사일 따름이고, 소원은 멀어져 카센터 ‘알바’를 한다. 부모로 사느라 힘들었던 사람들을 위한 레퀴엠이자 힘들 사람들을 위한 응원가다. “낚시 재밌냐?”라는 남봉의 질문이 진한 여운을 남긴다. 4월 3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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