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김일성 사망 해프닝 소주판매 사상 최고기록

‘김일성 피격 사망’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첫 보도(호외)는 1986년 11월16일 오후였다. 한국을 비롯한 미국과 일본의 첩보망이 북한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는 상황에서 터져나온 충격적인 보도내용은 이러했다.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한 것 같다. 사망시기는 14일 또는 16일께로 그의 죽음은 북한내부의 권력암투에 따른 피살일 가능성이 크다.”

이같은 보도를 접한 시민들은 ‘야, 김일성이 죽었대!’ ‘이거 통일되는 거 아냐?’하고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며 크게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김정일이 쳐들어올지 몰라.”하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김일성의 사망소식은 그날 주당들에게는 단연 최고의 ‘안주거리’였다. 심지어는 ‘오늘은 공짜’라는 간판을 내건 술집도 더러 있었다. 이 날 비워진 소주병은 소주판매 사상 최대를 기록했을 정도였다. 국민들을 들뜨게 만든 ‘김일성 사망보도’는 그러나 이틀만에 오보임이 판명됐다. 김일성이 18일 오전 10시 평양을 방문한 몽골의 바트문흐 대통령과 만나는 광경을 북한방송이 보도함으로써 ‘김일성 사망’은 희대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시민들은 또다시 술집에 모여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뭐야 우리를 갖고 노는거야 뭐야?”라는 등의 실의와 허망, 그리고 분노로 이어지면서 홧김에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16일에 이어 또한번 많은 소주병을 비운 날로 기록됐다. 실제로 당시 주류업계의 통계에 따르면 1일 판매고가 16일과 18일 이틀동안 최고치에 달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정부의 해명은 “북한 당국이 고도의 전략적인 책동으로 허위방송을 보내면서 우리 정보의 능력을 테스트해보기 위한 책략에 의해...”(86년 11월20일, 노신영 국무총리 발표)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이기백 국방부장관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조금 다르다. 이 장관은 김일성의 사망보도가 나던 날 오전 태릉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10시가 조금 넘어서 이 장관은 오자복 합참의장으로부터 ‘긴급 지휘보고’로 이 사실을 알았다. 당시 오자복 합참의장은 일행 몇몇과 골프를 하기 위해 태릉골프장에 와 있었고 이 장관은 그 다음 순서로 필드에 나서기로 돼 있었다.

오자복 합참의장의 보고내용은 “방금 한미연합사령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면서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기백 장관은 믿어지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 오자복 합참의장의 대답은 똑같았다.

이 장관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서둘러 국방부 집무실로 돌아왔다. 이 때가 오전 11시. 전방의 상태를 점검했다. 아직은 이렇다 할 북측의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장관은 전군에 경계태세 강화 지시를 내렸다. 그는 다시 무관 한 사람을 불러 윤태균(尹泰均 육사13기) 국방정보본부장한테 이러한 내용을 일러주라고 지시했다. 이어 그는 장세동 안기부장한테도 전화를 걸었다. 장세동 부장 역시 이렇다 할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CIA를 통해 방금 전 통보를 받았으나 뭔가 미심쩍은데가 많다는 대답이었다. 이 장관은 전화를 끊은 다음 청와대와 연결된 직통전화 버튼을 눌렀다. 마침 그 날은 일요일이어서 전 대통령이 쉬고 있을 것을 감안해 우선 안현태(安賢泰) 경호실장을 찾았다. 안 실장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재차 물었다. 이 장관은 일단 한미연합사로부터 보고받은 내용이라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김일성 사망’은 최고통치권자인 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기에 이르렀다.

전 대통령은 즉각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외무부, 통일원, 등 정부 주요기관 역시 비상이 걸렸다. 청와대의 비상회의는 저녁 8시에 시작됐다. 참석자는 국방부장관을 비롯해 외무부장관, 안기부장, 그리고 각군 참모총장 등이었다. 이 장관은 다시 한번 지휘보고된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 또 최광수 외무장관은 “해외에 주재한 모든 공관에 북한의 동태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보고했다.

북한 군부대 확성기 ‘김일성 총격으로 사망했다.’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김일성이 죽었다면 극도로 보안을 유지할 텐데 이상하다.”며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뚜렷한 묘책이 나오질 않았다. 더군다나 ‘人의 정보’이기 때문에 확인하지 않는 이상 100%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전방의 상황을 예의 주시할 뿐이었다.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채널인 미국의 DIA(국방정보부)와 CIA가 있지만 회신은 똑 같았다. “확실치는 않지만 사망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새벽 1시까지 마라톤회의는 계속됐으나 ‘도발가능성’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는 것 외에는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튿날 오전 9시 “16일 휴전선 북한 군부대 확성기에서 김일성이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전파방송이 있었다는 것이 국방부의 공식발표로 알려지게 됐다. 바로 이 시각 정재철(鄭在哲) 정무 제1장관이 야당 당수에게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당시 여당 쪽에서는 ‘김일성 사망’건으로 야당 쪽에 전쟁이 난다고 위기의식을 심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재철 장관이 브리핑을 할 때 살을 더 붙여서 설명했지요.”

국방부의 공식발표가 있자 국내외 관심은 더욱 증폭됐다. 경찰에는 갑호비상령이 내려졌고 북한의 남침을 위한 예비단계일 수도 있다며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강화했다. 야당 쪽의 확인 요구도 빗발쳤다. 정재철 장관의 브리핑이 있은 직후 이 장관은 국회로부터 호출당했다. 주무장관으로서 상세히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마침 국회는 이듬해 예산을 심의하기 위해 예결위가 열리고 있었다. 이 장관은 할 수 없이 국회에 출석, 국방정보본부에서 작성된 초안을 들고 읽어내려갔다. 그러나 초안 끝부분에 적힌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김일성의 사망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는 부분에 이르러 이 장관은 잠시 멈칫했다. 이 장관 스스로도 순간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김일성은 사망한 것 같다.”로 약간 수정발표를 했다.

결국 이 장관은 이 날의 순간적인 재치로 며칠 뒤 ‘허위정보’임이 판명났을 때 간신히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 그대로 발표했더라면 장관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병사의 실수’ 미 정보기관에 우롱당하고 항의도 못해

이 장관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 사망설’의 진원과 파장의 경로는 이러했다. 그 때 오산 공군기지 밑에는 NSA(미통신정보부대)의 감청소가 있었다. 그 감청소는 한반도 주변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모든 통신을 감청할 수 있는 곳이었다.

11월14일 밤 상황근무를 하던 감청소의 한 미군병사는 여느 때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한반도의 통신을 감청하고 있었다. 이 때 ‘임은 가시고...’라는 내용과 함께 장송곡이 흘러나오는 전파음에 귀를 기울였다. 발신 위치는 휴전선 이북이었다. 그 병사는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편에 속했으며 혹시 김일성이 사망했을 수도 있다는 예감과 함께 규정된 코드에 정보를 입력시켰다. 코드 분류는 첫째 ○(확인 필), 둘째 △(확인요하는 정보), 셋째 ×(첩보) 등이었다. 병사는 둘째번에 입력코드를 눌렀다.

바로 이 시각 미 본토 NSA본부 상황실의 정보코드에 빨간 불이 켜졌다. 한반도로부터 날아온 ‘김일성 사망’이라는 엄청남 정보를 접한 상황담당은 곧바로 백악관과 CIA에 자동적으로 연결된 코드를 눌렀다. 그런데 이 때 상황담당은 둘째번 코드를 누른다는 것이 그만 첫 번째 코드(확인 했음)를 눌러버렸다. 이때부터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됐던 것이다.

일본 주둔 미군기지사령부와 한미연합사에 이같은 내용이 즉각 송신됐다. 15일 오전 10시 일본으로부터 김일성이 일부 군사음모그룹에 의해 암살됐고 암살자들은 중공으로 도주했으며 북한은 중공측에 범인송환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결국 미군병사의 실수로 세계적인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미국정부에 항의를 했지만 딱 잡아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정보력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어서 더 이상 항의할 수도 없고 난감했지요. 할 수 없이 북한의 대남술수로 인해 그렇게 됐다는 궁색한 해명(앞의 노신영 총리 발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장관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1년여 국방부장관 재임시절 동안 그 때처럼 충격을 받고 난감했던 적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만큼 세계적 관심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로 ‘한 병사의 실수’라는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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