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경제침탈과 민족의 저항 [문화지평 답사기]

문화지평l승인2019.05.13l수정2019.05.1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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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올 서울시 공익단체 지원사업으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를 진행한다.

[미디어파인=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1910년 일제는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합병하고 500년 조선왕조와 제국의 수도였던 ‘한성’을 ‘경성’이라는 한낱 식민지 도시로 전락시켰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수도가 경기도 한 도시로 편입되는 굴욕의 역사가 버젓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은 무력에 의해 국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성은 강제합병 이전 개화기를 맞으면서 도시개조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896년 11월 서대문 밖에서 독립문 정초식을 열렸고 1년 뒤 준공됐다.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의 상징성을 담은 환구단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다. 1896년에는 한성의 도로 폭을 규정하는 내부령을 발표했고 지금의 세종로 사거리에서 숭례문까지와 광통교에서 숭례문까지 두 대로의 폭을 55척으로 정했다.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정국을 경운궁으로 옮긴 것은 도로 형성에 큰 변화를 줬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길을 내는 도시구조 재편을 꾀했다. 방사형 도로는 당시 서구 대도시들이 많이 사용하던 방식이다.

이 때 북쪽으로는 세종대로를 통해 경복궁에 이르는 길, 동쪽으로는 을지로, 동남쪽으로는 소공로, 남쪽으로는 숭례문에 이르는 길들이 방사형체계로 발달했다. 이들 중 소공로는 격자형 구조 도로를 대각선으로 이은 ‘N’자형 도로로 지금도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숭례문에서 ‘N’자형 소공로 거쳐 남대문로 답사

▲ 문화지평은 지난달 20일 3‧1운동 100주년기념 ‘일제의 경제 침탈과 민족의 저항’이란 주제로 숭례문 광장부터 광통교까지 1차 답사를 진행했다. 답사 출발지인 숭례문 앞 단체 사진.

2019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선정된 된 문화지평의 1차 답사가 지난 4월 20일 있었다. 숭례문으로부터 소공로를 거쳐 광통교 근처인 을지로 입구까지 진행됐다. 3‧1운동 100주년기념 ‘일제의 경제 침탈과 민족의 저항’이란 주제로 해설을 들으면서 세 시간 가까이 걸었다.

숭례문 광장과 중앙일보까지 거리에선 남대문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1907년 8월1일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들어갔다. 이때 시위대 1연대 1대대 대대장 육군 참령 박승환이 자결했다. 박승환의 시위 1대대는 남대문 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박 참령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다”는 유서를 남겼다. 글귀가 쓰여 있었다. 박 참령 이외에도 제2연대 1대대 부위 오의선과 참위 이충순을 비롯 정교, 사병 등도 자결했다.

박 참령이 자결한 총성 한방은 무장 저항으로 이어졌다. 반납했던 총기를 다시 들고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가 총을 들었다. 일본군은 숭례문(남대문) 누상에 기관총 3문을 설치하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엎친데 덮쳐서 시위대의 탄약이 바닥났다. 일본군은 수류탄에 신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력에서 차이가 났다.

이는 일본군 전사자는 4명인데 반해 한국군은 장교 13명, 사병 57명이 전사한 결과로 이어졌다. 단 하루 반나절의 전투였다. 그러나 남대문 전투의 항쟁의지가 지방 진위대로 전해지면서 저항이 계속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나아가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기존 유생 의병장 형태가 평민이 주도하는 분위기로 바뀌는 전기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실제 전투 경험이 있는 군인 출신 의병장들과 의병으로 인해 전투력과 기동성이 강화됐다. 이는 1908년 격렬한 의병전투로 이어졌고 일제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해 1909년 남한대토벌 작전을 펼친다. 이때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로 거처를 옮겨 독립군이 됐다.

외세와 도성 내 최초 시가전 ‘남대문 전투’

▲ 남대문 근처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촉발된 남대문 전투와 관련된 유적지를 나타내는 표지석이 많이 설치돼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화단에는 ‘대한제국군 서울시가 전투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부영빌딩 앞에는 ‘정미의병 발원터’ 표지석이 있다. 호암아트홀 한쪽모서리에는 ‘이충순 자결터’, 중앙일보사 앞에는 ‘시위병영터’ 표지석이 보인다.

이들 모두가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촉발된 남대문 전투와 관련된 유적지다. 한양도성 안에서 외세와 최초로 전투를 벌인 흔적들인 동시에 무력(武力)에 의해 무력(無力)해 지는 대한제국의 서글픈 역사를 기록한 터다.

숭례문 안쪽 남대문시장은 광해군 때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만든 선혜청이 있던 곳이다. 지방서 올라오는 대동미 출납을 위해 북창, 남창, 별창, 동창, 평창 등을 두었다. 북창동, 남창동과 평창동은 지명으로 아직 남아 있다.

1608년(선조 41년)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됐다. 물산이 모이는 곳에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교환을 하는 장터가 자연스레 생겨나고 결국에는 시장으로 발전하는 데, 남대문시장이 대표적이다. 지방 특산물 등을 매매하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1911년 3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내부대신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남대문시장은 정식 근대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남대문 시장은 1900년대 초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남대문시장 입구에 선혜청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 건너편에 있는 부영태평빌딩. 부영이 삼성생명으로부터 사들인 빌딩이다. 옛 삼성 본관 옆이라 삼성의 상징과도 같은 빌딩이라서 매각 때 말도 많았다. 그 빌딩 앞에는 ‘전환국(典圜局)터’란 표석이 있다. 화폐 발행을 담당하던 관청이 있던 자리다. 전환국의 환은 화폐단위가 되기도 했다.

대한문 앞 ‘황제의 길’...소공로엔 대관정 터 남아

▲ 대한문 건너편 플라자호텔에서 이필용 해설사가 환구단, 철도호텔, 소공로 등에 설명하고 있다. 멀리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이 보인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는 근대적 도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대한문 앞 도로를 정비했다. 고종이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황제의 길’을 새롭게 내기 시작한 것이다. 고종은 환구단을 거쳐 소공로를 뚫어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개설했고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도로 역시 구체화시켰다.

프라자호텔서 조선호텔 쪽을 바라보자 사적 157호 환구단 정문이 보였다. 이 대문은 수유리 그린파크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2007년 재개발 과정에서 환구단 정문으로 밝혀져 이전 복원된 것이다.

환구단 일대는 일제 강점기에 경성을 찾는 외국인들을 위한 호텔이 많았다. 지금도 호텔들이 운집해 있는 것도 그런 역사성을 담고 있다. 서울역과 남대문이라는 교통과 물산의 중심지로 인해 금융업, 숙박업이 자연스레 연동돼 발전한 것이다. 소공로를 지나 남대문로로 접어들었다. 소공로는 작은 공주골이란 뜻이다. 이곳은 조선 태종 둘째 공주인 경정공주가 살던 집이 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영에서 호텔을 짓기 위해 죄 사들여 지금은 소공로가 완전히 죽었다. 호텔 터를 파헤치니 대한제국의 첫 영빈관이었던 대관정 터 유구가 발견됐다. 시는 호텔 1개 층을 박물관으로 기부채납 받고 신축을 허가했으나 아직까지 착공에 들어가지 못했다. 차라지 호텔신축이 안됐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다. 소공동 오랜 건축물도 살리는 차원에서.

남대문로는 일제강점기 ‘경성 월스트리트’

▲ 을지로입구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하나은행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동척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열사가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나 열사를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

일본의 경제적 침탈 본거지는 남대문로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은행(한국은행), 신세계백화점 옆 건물인 SC제일은행에는 조선저축은행, 한국은행 소공별관 자리는 조선상업은행, 롯데 애비뉴엘에는 조선신탁주식회사, 식산은행(롯데백화점), 동양척식회사 등을 비롯해 경성취인소, 대한천일은행 등을 은행과 주식관련 기관이 밀집했던 금융 1번지였다. 이 밖에도 시청 을지로별관에는 제국생명, 신한은행 광교빌딩은 한성은행, 광교약국 자리는 동일은행 등이 있었다.

이들 중 동척으로 불리는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대한제국 경제수탈의 ‘주범’격이었다. 1908년 일본이 대한제국 토지를 확보할 목적으로 세운 법인이다. 영국이 인도를 집어 삼킬 목적으로 만든 동인도주식회사와 성격이 같다. 일제는 동척을 통해 1912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한반도 토지 40%를 차지했다. 일제는 동척을 통해 토지를 싼 가격으로 일본인과 친일 세력에게 팔아 넘겼다.

이를 보다 못한 나석주 열사가 1926년 동척에 폭탄을 던졌다. 을지로입구역에서 명동으로 들어가는 하나은행 옆 골목 초입에는 나 열사의 동상이 있다. 나 열사는 의열단 단원으로 식산은행에도 폭탄을 투척한 전력이 있다. 동척에 던진 폭탄은 불발됐고 조선철도회사로 가서 일인을 저격했다. 동상에 세워진 곳은 일경에 쫓기다 나 열사가 자결한 곳이다.

나석주 열사 등 일제강점 저항 흔적도 많아

▲ 이번 답사를 이끈 이필용 역사문화해설사. 이 해설사는 서울KYC한양도성길라잡이, 문화지평 역사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답사는 지금은 우리은행 종로지점이 들어서 있는 조선상업은행종로지점(광통관)에서 마무리했다. 조선상업은행은 민족계 금융사인 대한천일은행의 후신이다. 일제 강점 직후 민족계 은행을 없애려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1950년 한국상업은행, 1999년 한일은행과 합병하면서 지금의 우리은행에 이른다.

이날 해설은 이필용 역사문화해설사가 맡았다. 이 해설사는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 전문가지만 역사문화에 해박해 서울KYC한양도성길라잡이, 문화지평역사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경기도 따복공동체지원단,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경기도따복공동체지원센터 등에서 일했고 현재는 경기도사회적기업협의회와 용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사무국장을 겸임하고 있다.

■ 답사코스

숭례문 - 상평창(남대문시장 입구) - 전환국(삼성생명) - 정미의병표석(부영빌딩) - 시위병영터(중앙일보) - 프라자 호텔 - 원구단(조선호텔) - 대관정 - 소공로 - 한국은행 - 식산은행(롯데백화점) - 동양척식회사(외환은행 본점) - 경성취인소 - 우리은행 종로점 <글=김범준·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사진=권택상 사진작가>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 다수 진행

문화지평  moonwhajipyu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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