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 [김문 작가]

김문 작가l승인2019.07.31l수정2019.07.3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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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이승만]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

-하와이에서 암상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면서요.
“제가 하와이에 머무는 시간(1913~1941)은 좌절과 얼룩진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태평양 지역에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사태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는 무력한 상황 속에서 교민사회의 파벌주의가 생기면서 반목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1915년 9월 안창호를 추종하던 극렬분자 오진국이라는 사람이 박용만이 묵고 있던 샌프란시스코 호텔방에 침입해 그를 저격했지만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는 또 나를 암살하기 위해 하와이행 배를 탔지만 도중에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습니다. 아마 도착 즉시 체포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소지품에서 암살계획을 알게 됐습니다.”

-하와이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어려움이 많았네요. 교육에 대한 계획은 순탄하게 진행됐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와이 정부가 1920년부터 사립학교 졸업생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특별전형을 치러야 한다는 새로운 규정을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립학교가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부모들은 한인사립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것을 꺼려 했습니다. 또한 하와이 정부는 모든 지역에 공립학교를 세우고 신설 학교들의 재정지원을 위해 인두세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엎친데 덮친 상황이 됐지요. 한인기독학원마저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때 국내의 3.1운동 결과로 탄생한 임시정부가 나를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하와이 교민사회와 의 관계는 달라지게 됩니다. 새로운 정치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지도자로 나서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학교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지요.”

-3.1운동 직후 국내와 중국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임시정부가 생겨났는데 다들 미국에 있는 이 전 대통령을 수장으로 추대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실 내가 선거운동을 해서 된 것도 아닙니다. 아마 우리 민족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공통적인 목표가 있었겠지요. 그 중에서 민족교육과 민주주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합니다. 또한 자유주의 혁명사상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와이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소식을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됐습니까.
“1919년 3월 29일 ‘국민회’로 전보가 왔습니다. 발신인은 현순(玄楯)이었습니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목사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 뒤 평화회의가 열리는 중국 상하이에 밀파된 뒤 미국 대통령 윌슨과 평화회의측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했지요. 그래서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에게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습니다. 한국독립을 찬성하도록 고조시키는 한편 한국과 파리와의 통신연락을 취하기도 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의 독립지사가 상하이에 모이자 이광수, 선우혁 등과 함께 프랑스 조계 바오창로(寶昌路)에 임시독립사무소를 개설하고, 총무로 위임받아 각국에 독립선언서를 발부한 장본인이죠. 전보에는 ‘진정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임시 의정원에 의해 조직됐다며 명단까지 첨부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이주영 건국대명예교수가 쓴 ‘이승만과 그의 시대’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들여다 보자.

3.1운동 직후 한반도 안팎에서는 여러개의 임시정부가 나타났다. 이승만은 모든 임시정부에서 주요 지도자로 추대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또 1919년 3월 21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노령임시정부(露領臨時政府)를 선포했다. 노령임시정부는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에 이어 이승만을 국무총리 겸 외무장관인 국무경으로 추대했다. 뒤어 4월11일에 선포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과 부통령이 없는 국무총리로 지명해 사실상 정부수반이 됐다. 그리고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는 최고 자리인 집정관 총재로 이승만을 뽑았다. 세 임시정부의 직책 가운데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 왜냐 하면 한성임시정부는 4월 16~23일에 전국 각지의 대표들이 비밀리에 모여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정통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규갑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로 조직되고 그 배후에는 아들처럼 아끼던 이상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것에 근거해 이승만은 1919년 6월부터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워싱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국가원수들과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 한국인의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리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공사관을 설치하고 그곳에 임시대통령으로서의 활동본부를 두었다.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시체운반선 타고 상하이로

-상하이에는 언제 가게 됩니까.
“그러니까 1919년 9월입니다. 노령임시정부와 상하이임시정부, 그리고 한성임시정부 등 3분된 조직을 통합하려는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내가 대통령에 추대되면서 상하이임시정부에서 부임하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당연히 상하이로 가야 했지요. 그런데 이 무렵 나는 일본경찰에 의해 30만달러 현상금이 걸려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에서였지요. 그러니 함부로 거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일단 워싱턴에서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당시 하와이에는 중국으로 가는 배 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하와이에 장의업체를 운영하는 미국인 친구 보스윅과 만나게 됐습니다. 사정 얘기를 했더니 1920년 11월 15일 중국으로 곧바로 가는 배에 비서 임병직과 함께 오르도록 해줬습니다. 밀항을 하게 된 것이지요. 비서와 저는 배표도 없이 몰래 배에 승선했습니다. 갑판 아래에 창고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중국인 노무자들의 시체가 담긴 관들이 가득했습니다. 발각되지 않으려고 관 사이에 몸을 우선 숨겼습니다. 어찌나 악취가 나던지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어찌합니까. 그렇게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아침 2등 항해사 앞으로 갔습니다. 항해사는 우리를 보자 선장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선장은 화를 내며 우리에게 노동을 명령했습니다. 비서는 청소일을 하고 나는 망보는 일을 했지요. 배는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한달 뒤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중국인 노무자들 틈에 통나무를 메고 육지에 무사히 상륙했지요.”

-그렇다면 대통령에 추대되고 나서 곧바로 상하이에 간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가게 됐는데 왜 늦어졌습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국무총리 임명통보 등 임시정부에 대한 내용이 현순 개인의 명의로 돼 있었습니다. 미주 한인들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소식 자체에 흥분돼 있었지만 과연 그 소식을 전해준 현순의 자격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국무경으로 행세하면서 공채발행권과 신임장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지났고 현순과 한동안 연락이 단절됐습니다. 또 소재와 설립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상하이쪽 정보의 혼란이 있었던 것이지요. 초기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은 5월말에야 미주 한인사회에 공표됐고 신임장도 그때 도착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쓴 ‘우남 이승만 연구’에 나오는 내용을 들여다보자.

1919년 5월 미주에서 이승만의 성가는 날로 높아갔다. 박용만에 이어 안창호가 상하이로 떠남으로써 미주에서 이승만과 정립했던 3대 세력 중 이승만 혼자 남게 됐다. 게다가 이승만이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국무경,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이어 조신민국 임시정부 부도령 선출까지 보도되면서 그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명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서 간행되는 ‘소년중국’은 일본이 해외 한인 독립운동가인 이승만, 이완, 이위종에게 30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자객을 파견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이후 이승만의 반일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주요한 선전재료가 되었다.

-상하이임시정부 등 해외활동과 국내 인사들간의 연락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해외에서의 활동에 대해 국내 인사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국내 일도 마찬가지이지요. 서로간의 인편 등을 통해 비밀연락이 잘 됐습니다. 일제가 까마득히 모르는 일도 많았습니다. 고종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가 독립의 여망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벌일 때 고종은 자신의 헛된 삶에서 마지막으로 용감한 태도를 보입니다. 일제의 서명요구를 거부했지요. 얼마 뒤인 1919년 1월 20일 고종이 숨을 거두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2002, 로버트 올리버 지음, 건국대 출판부), 이승만과 그의 시대(2011, 이주영 지음, 기파랑), 우담 이승만 연구(2005,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독립정신(2010, 이승만 지음, 동서문화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2009, 유영익 외 지음,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자동 회고록(2018, 푸른역사), 이승만 다시보기(2011. 인보길 엮음, 기파랑), 독부 이승만 평전(2012. 김삼웅 지음, 책보세).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2015, 김희곤 지음, 지식산업사)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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