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 1번지 창신숭인에 남은 일제강점 흔적 [문화지평 답사기]

문화지평l승인2019.09.05l수정2019.09.0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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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올 서울시 공익단체 지원사업으로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미디어파인 칼럼=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지난 6월 29일, 맹하(孟夏)로 접어들기 직전이라 날이 무더울 것을 걱정했는데 일기예보는 비소식이 있다. 땡볕이나 비 모두 답사팀에게는 반갑지 않은 존재다. 우려했던 비는 오지 않고 대신 낮은 구름이 볕을 적당히 가려준 덕에 시원한 답사를 했다.

서울시가 후원하고 문화지평이 실행하는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 5회차는 ‘창신숭인 지역 도시재생 현장과 일제강점의 흔적’을 주제로 진행됐다. 이번 답사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답사 중 하나다. 문화지평은 총 10회 서울시 보조금지원사업 중 4회를 3‧1운동과 임정수립 100주년을 기념한 답사를 기획했다.

비운 속에 운 좋게 살아남은 동대문서 답사 시작

▲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과해서 ‘운 좋게’(?) 살아남은 동대문.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동대문역에서 모였기 때문에 동대문의 역사를 먼저 들여다봤다. 남대문 화재로 인해 현재 사대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지위를 넘겨받은 동대문은 아이러니하게도 돈의문(서대문)처럼 전차가 다니는데 방해가 된다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양으로 진입할 때 동대문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입성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보존하게 된 것이다. 남대문으로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했다.

동대문에서 바라 본 창신동은 높은 곳까지 위치해 제법 있다. 주택이 어깨를 바싹 붙이고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서울서 인구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17세기 무렵 지방에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하고 흉년이 겹치면서 몰락한 농민들이 국가에서 구휼책을 내놓자 창신동 등 서울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일제하 경성부 인구 집중 과정 속에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한국전쟁 전후 창신동 비탈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이 판자촌이 들어섰다. 도시빈민들은 개인적으로 소유권 분쟁이 없는 낙산 기슭 산비탈이나 청계천 변의 공유지에 거처를 만들었다.

1961년 동대문에 평화시장이 세워졌다. 창신동 지역은 동대문 의류산업 노동자들이 몰려 살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평화시장 일대 의류 생산 공장들이 창신동 주거지로 이전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창신동이 봉제 마을로 탈바꿈하게 된다. 창신동은 동대문 의류산업 배후 생산기지로써 공간적 성격을 지닌다.

동대문 의류산업의 배후 생산기지 창신동

▲ 동대문에 평화시장이 세워지고서 창신동은 의류 노동자와 공장이 밀집하게 되면서 동대문 의류산업 배후 생산기지가 된다.

왜 이 지역에 원단과 봉제 등 섬유산업이 발달하게 됐을까. 동대문 상권의 시초는 배오개(이현, 梨峴) 시장이다. 고종의 홍릉 참배 편의를 위한다는 구실로 종로의 가가를 없애고 서대문부터 청량리까지 놓은 단선전차가 창신동을 지났다. 왕십리 등 성저십리에서 재배된 각종 채소들이 종루, 칠패시장 등 도성내로 팔려나갔으며 1905년 광장시장이 들어서면서 포목산업 메카로 떠올랐고 덩달아 창신동도 발전했다.

1900년대 초반 어영청, 훈련도감 등의 군인 봉급이 포목으로 지급되던 때 동대문 일대에 자연스레 물물교환 시장이 형성됐다. 이렇게 사고 판 옷감을 가공하는 가내수공업이 발달했고 봉제 산업의 마중물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대 이후 봉제공장이 창신동에 밀집하면서 지하와 1층은 봉제공장, 2‧3층은 주거공간으로 이용됐다.

서울시는 1968년 12월 주택난 해소와 판자촌 정비를 목적으로 하는 ‘서민아파트 2000동 건립계획’을 세웠다. 이때 창신숭인지구도 1,653㎡(500평)이 선정됐다. 이듬해 일대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낙산시민아프트 28개동을 지었다. 이날 해설을 맡은 이필용 역사문화해설사는 “시민아프트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더 늘어 출근길이면 어깨를 부딪치며 골목을 내려왔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인구가 많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초등학교 학생 수다. 1970년 당시 창신국민학교는 무려 122학급 1만166명의 학생 수를 기록했다. 이듬해 학생 일부를 떼서 명신국민학교로 분리했다. 창신초등학교 자리는 1902년(광무 6년)에 창건된 원흥사가 있던 자리다. 대한제국 황실의 보리사로 전국 사원을 총괄하는 절이었으나 10년 만에 폐사됐다.

창신동으로 오르기 전 일대 지형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낙산 아래 창신동은 도성으로 진입하는 흥인지문과 바로 인접해 있다. 조선 전기부터 도성을 왕래하는 인구가 많았다.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됐다. 또 낙산 일대 아름다운 풍광 아래 조선시대 세력가들의 별서, 정자와 가택이 세워졌다.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에 사대부들의 활터인 청룡정이 있었다.

지금도 고스란히 남은 항일과 일제 강점의 흔적

▲ 창신동과 숭인동 여러 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채석장 흔적. 일제 강점의 아픈 상흔이다.

창신동과 숭인동 곳곳에 속살을 드러낸 채석장 흔적이 남아 있다. 낙산 지반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1901년대부터 20년대 후반까지 조선통독부 등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기반을 다지기 위한 대형건축물을 짓는 데 사용됐다. 지금까지 고스란히 속살을 드러내고 남은 일제 강점의 흔적이다. 창신3동 돌산 일대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합법적 주거 공간으로는 이용되지 않았지만 토막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공업화로 인구의 서울 이동과 주택난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형필지를 작게 쪼개서 개발하는 도시형한옥 사업이 본격화 됐고 창신동 역시 1920~30년대 이미 신축 도시형한옥이 등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시형한옥하면 빠트릴 수 없는 이름이 있다. 정세권(1888~1865)이다. 일제 강점기 부동산 개발업자로 북촌과 익선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 전역에 한옥 큰 필지를 쪼개서 팔았다.

혹자는 그를 집장수라고 폄하하지만 전통 한옥에 근대적 생활양식을 반영한 개량한옥을 대량 공급해 주택난을 해소한 인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운동에 재정을 보태 민족자본가로 칭송받고 있다.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된 후 고문을 당하는 등 일제 강점에 저항한 애국 건축가로 후대에 기억되고 있다.

이번 코스에서 일제 강점의 흔적 하나를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코스 말미에 들른 안양암에 있는 비석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인 배정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안양암 입구 좌측 자물쇠 없는 창살로 막아 둔 곳에 비석 몇 개가 서 있다. 그 중 커다란 오석에 한자로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이라고 적혀 있는 정체모를 비석 좌측 편에서 뚜렷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화부인회10주년기념비(1939년)로 이름 붙은 이 비석에 배 씨는 삼화부인회 고문으로 돼 있다.

안양암은 불교계 대표적 친일파 이태준이 2대 주지를 지낸 곳이다. 창씨개명 접수장소로 안양암을 내 줄 정도였다.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 되면서 밀정교육을 받고 고종에게 접근하는 등 대표적인 여성 친일파였다. 오욕의 역사도 역사다. 삼화부인회의 비석이 서 있는 안양암은 독립운동 교육장소로 좋은 장소가치를 갖는다. 이유는 배정자와 같은 여성으로 동시대를 살면서 항일운동의 전위에 섰던 남자현과 삶이 극명하게 대별되기 때문이다.

1920년 독립신문 논설을 보면 배 씨의 죄상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배정자는 작년 하얼빈에서 다수의 동포를 적에게 잡아주고, 협잡을 하고 봉천으로 도망하여 와서 봉천 동포의 사정을 적 영사관에 고하야 동포의 밧는 곤난이 막심하외다. 아아 이 가살의 요녀 배정자는 ’나는 만주에 잇는 백만의 조선인의 모(母)라 함니다. 아아 언제까지나 져 호(妖女)의 슈(生命)을 그대로 두겟슴닛가.’

백남준‧김광석‧나운규 등 예인들의 숨결도 느낄 수 있어

▲ 창신동 130-54는 요절한 가수 김광석이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 다만 단독주택이 아니라서 정확한 집을 특정하진 못했다.

창신동 일대는 근현대를 살아간 걸출한 예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묘미도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은 창신동에 커다란 집에서 자랐다. 지금은 백남준기념관이 아담하게 들어서 있지만 과거에는 대로에 있는 대문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본채가 나왔을 정도의 큰 집이 있었다. 창신동 197번지 지역 대지 9917㎡(3000평)에 한옥을 짓고 살았으니 크기를 짐작하고 남는다. 백남준기념관 지번이 197-33이니 한 필지 땅이 33개 이상으로 쪼개져 팔렸다는 의미다.

백남준이 유명해 진 것은 1963년 세계 최초의 비디오 아트인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개인전을 열면서 부터다. 피아노와 TV, 선혈이 낭자한 황소머리가 전시장에 등장했고 피아노 한 대를 때려부수는 퍼포먼스는 세계인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백남준은 세상을 떠나기 전 한 인터뷰에서 “창신동에 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곳이다. 길을 건너서 동대문아파트 뒤로는 박수근 화백이 세 들어 살았던 곳도 있다.

창신동 꼭대기 쯤에서 안양암으로 내려오는 길에 독특하게 생긴 집합건물에는 요절한 가수 김광석의 흔적이 서려있다. 창신동 130-54에 아파트 같기도 하고 연립주택 같기도 한 건물에 김광석이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살았다. 그가 죽은 후 2013년까지 부모가 관리하다가 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아리랑’을 만들어 한국 영화사의 큰 확을 그은 나운규가 만든 영화사 ‘나운규프로덕션’도 창신동에 있었다.

도성 출입 쉬운 성저십리 고관대작‧부자들 집 즐비

▲ 친일파 임종상의 집터로 추정되는 창신동 641 지역을 위성으로 본 사진. 주변 집들 면적과 비교가 된다.

백남준이 살았던 집처럼 이 지역엔 권력자와 부자들의 대형 집이 많았다. 동묘 맞은편 숭인동 72번지는 철종의 부마이면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박영효의 집 상춘원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과 일본관리만 출입이 허락됐다. 그래서 일명 귀족회관이라고 불렸다. 박영호는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과 저자도를 소유하는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갑신정변 실패로 재산 일체가 몰수됐다가 고종 말년에 다시 찾았다고 전해진다.

일본에 고액의 국방비를 헌납한 친일파 임종상의 집도 창신동 일대에 큰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집은 대지 2만1000여㎡(약7000평), 건평 1300여㎡(400여평)의 규모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당시 30만원의 거금을 들여 궁궐처럼 단청을 했기 때문에 일명 창신궁으로 불렸다. 창신동 641 지역으로 추정된다. 임종상은 당대 경성서 세금을 두 번째를 많이 내던 고리대금업자였다. 이밖에도 창신동에는 한일은행 창업자 조병택, 해동은행 중역이었던 김성환,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이근호와 민영린 등 부호들의 집이 즐비한 부자촌이었다.

도시재생 일환으로 탄생한 이음피움봉제역사관

▲ 창신숭인 도시재생사업 일환으로 만들어진 이음피움봉역사관. 답사날 마침 지역 작가의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어서 함께 할 수 있었다.

서울시는 2015년 당시 1116여개 업체, 3300여 명의 종사자가 밀집한 창신동 봉제골목에 봉제박물관과 봉제거리를 2017년까지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계획대로 봉제박물관은 ‘이음피움봉제역사관’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이날 답사팀이 찾은 봉제역사관에서는 마침 봉제마스터 경력 30여년의 김종임 작가와 함께 하는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김 작가는 답사팀을 위해 청바지 천을 이용한 명함집 만들기를 지도했다. 김 작가는 창신동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전통의상인 철릭을 다양한 소재와 디자인으로 현대화시켜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홍지효 부관장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봉제역사를 되돌아보고 지역 특성을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김종임 작가 같은 지역 활동가들이 개인, 단체 체험 프로그램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지도하고 있으니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답사는 백남준 집터에 세워진 백남준기념관에서 마쳤다. 식사는 인근에 있는 ‘장가네시골보리밥’이다. 답사의 묘미는 함께 땀 흘린 답사동지들과 나누는 한끼 식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면 ‘답사는 경후식’이 제격이다. 장가네시골보리밥은 창신동에 가면 늘 찾는 집이다. 마당에 파라솔이 있어서 야외에서 식사를 하는 묘미가 있는 집이다. 이번 답사에는 전동 휠체어를 탄 이경윤 나눔마켓 대표가 있어서 더 없이 조건이 좋은 집이다.

‘장가네시골보리밥’은 화려하진 않지만 풍성한 나물 반찬에 구수한 된장국의 조화가 좋은 집이다. 마찬가지로 제철 채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비빔재료가 계절마다 조금씩 바뀐다. 보리밥과 나물은 무한리필이다. 다만 주문은 사람 수 대로 해야 한다.

한편 이번 답사는 경기도 평택시에서 민관협치를 담당하고 있는 이필용 역사문화해설사가 진행했다. 꼬불꼬불한 창신동 골목을 헤집고 나가기 위해 노트패드를 안고 땀 꽤나 흘렸다. 문화지평은 이 지역을 몇 차례 답사했는데 그 동안은 박광규 역사문화해설사가 진행했었다. 박 해설사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지역역사와 골목에 스며 있는 숨은 이야기를 잘 안다. 그러나 해설사가 바뀌면 관점이 틀려진다. 문화지평은 그런 관점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단체다.

▲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에 답사객이 많지 않은 날이었다. 적은 인원이라 해설에 대한 몰입과 집중이 좋았던 날이기도 했다.

■ 코스

흥인지문 - 문구골목(한옥지역) - 창신시장 - 이음피움봉제역사관 - 창신동절개지 - 창신소통공작소 - 회오리마당 - 김광석 거주지 - 안양암 - 백남준을 기억 하는 집 <글=김범준 작가·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사진=권택상 사진작가>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아카이빙(2019)
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 다수 진행

문화지평  moonwhajipyu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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