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혹시 당신이 결혼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가 ‘내가 아니면 이 사람은 잘 살지 못할 것 같아서’라면, 저는 그 결혼을 적극 말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구원자 환상’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지혜씨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술 중독자여서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부모님은 매일 같이 부부싸움을 했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너희들만 아니면 내가 (벌써 집을 나가서)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다”며 넋두리를 했습니다. 지혜씨는 어머니가 언젠가 자기 형제들을 버리고 집을 나갈까 봐 늘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힘들지 않도록 집안일과 동생들을 챙겼고,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도 도맡아했습니다. ​​그리고 일찍 돈을 벌면 부모님의 부담이 덜어질 거라는 생각에서 간호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지혜씨는 대학의 사회과학 독서 동아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의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당시 중학생이었던 남편이 나서서 산업재해로 인정받고 보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들 때문인지 남편은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이 깊었고, 다른 학생들을 어린애처럼 여기는 편이었습니다. 지혜씨는 그런 남편이 안쓰럽기도 했고 또 믿음직스럽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지혜씨에게 특별히 잘해준 기억은 없었습니다. ​동아리 술자리에서 만취한 남편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은 지혜씨의 몫이었습니다. ​졸업 후 취업한 남편이 지혜씨를 노골적으로 귀찮아했지만, 직장생활이 힘들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지혜씨는 졸업을 얼마 앞두고 임신이 되어, 아무 준비도 없이 졸업을 하자마자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혜씨를 아끼는 사람들은 모두 걱정했지만, 지혜씨는 남편이 '임신중절을 요구하지도 않고 결혼까지 해준 것'이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시집식구들은 갑자기 나타난 지혜씨와 아이를 전혀 반기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집안의 기둥인 남편 때문에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은근히 반감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런 시집 환경에서 초임 간호사로 삼교대 근무를 하고 게다가 젖먹이 아이를 키우기란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혜씨가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돌아온 것은 남편의 폭력과 시집 식구의 비웃음이었습니다.

지혜씨는 남편에게 오래 전부터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최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지혜씨에게 처음 든 생각은 ‘이제 내가 필요 없어진 건가?’였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이제 와서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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