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의 나라 ‘요르단(Jordan)’ [김권제 칼럼]

김권제 칼럼니스트l승인2020.01.05l수정2020.01.0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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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김권제의 생활어원 및 상식] 요르단(Jordan)의 수도는 암만이고 정식 국명은 요르단 하심 왕국(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이다. 남북으로 약 460km, 동서로 약 355km 뻗어 있고 북쪽은 시리아, 북동쪽은 이라크, 남동쪽과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은 이스라엘을 경계로 한다. 남쪽 아카바 만에 19km의 해안선을 끼고 있다.

국토의 동쪽 4/5가 시리아 사막의 연장인 사막 지역이다. 북부는 화산용암, 현무암, 모래 등으로 구성되고 남쪽은 사암층이 노출됐다. 요르단 강 동쪽 이스트뱅크 고원지대는 평균고도 600∼900m로, 아카바 만 근처에 최고봉 람 산(1,754m)이 있다. 세계 최저 해수면 아래 약 400m인 사해 호수가 있는 요르단 계곡은 지구대다. 지구대의 저변은 평탄하지 않고 요르단 강이 남쪽으로 흘러 사해에 들어간다. 사해 남쪽 지구대는 점차 높아져 그 10km 남방에서 해면과 같은 고도가 된다. 지구대 동부의 요르단은 표고 500m, 1,000m의 완만한 고원상을 이룬 암석 사막지대이다.

겨울은 북쪽 암만의 평균기온이 9℃, 남쪽 만의 알카바는 17℃이다. 여름 평균기온은 암만은 24℃, 알카바는 32℃이다. 지구대 서쪽은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에는 고온, 건조하고, 겨울에는 저온, 다습하여 500mm 정도의 비가 내린다. 동부는 스텝 사막지대로 강우량이 200mm 미만이다. 전 국토 가운데 5% 이하만 연간강우량이 400㎜ 이상이며, 4∼10월에는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요르단과 웨스트뱅크 사이를 흐르는 요르단 강은 동쪽 고원지대에서 흘러내려오는 수많은 샘과 시내가 합류된다. 그러나 많은 증발로 염도가 높아져 사해에 이르면 표면의 평균 염분함유량이 거의 300%나 된다.

역사를 보면, 이 땅에 약 50만 년 전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약 B.C 8천 년경에는 인류 최고의 농업이 행해졌다. 서아시아 문명이 발달하자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요르단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는 B. C 13세기 이후 존립했던 기드온, 암몬, 모압, 에돔 등이다. B.C 13세기경부터 이집트인이 정착하여 암만에는 구약성서의 암몬인의 나라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인 이 지역은 대부분 역사가 이스라엘과 겹친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B.C 1000경)에 지금의 요르단 동부 대부분은 이스라엘 왕국에 복속되었다. 그후 타 중동지역과 함께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에 차례로 넘어갔으며, B.C 330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싸우는 사이에 B.C 1세기경 페트라 유적을 남긴 아랍어 사용 나바테아인이 요르단 동남부에 왕국을 세웠다. 왕국이 발전했으나, 1세기~ 2세기에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7세기에 이슬람 제국 지배로 이슬람교가 전파되어 아랍화, 이슬람화되었다.

다바스커스의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며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시리아로부터 멀어지자 요르단 도시 문명도 차츰 쇠퇴하였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해 예루살렘에 도읍한 제국이 요르단 강 동쪽까지 영토를 넓혔다. 16세기에 요르단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다마스쿠스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로 오가는 길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의 탈주자인 체르케스인, 카프카스인 등 여러 지역 난민들을 요르단에 정착하게 했다.

제1차 세계대전시 후세인 왕의 아들 파이살이 아카바와 암만을 점령하여 세운 토후국 아미르는 1921년 영국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요르단은 1920년 트란스 요르단이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과 함께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1921년 영국은 하심가 출신 압둘라 이븐 후세인을 왕으로 임명해 트란스 요르단을 세웠다. 트란스 요르단은 밸포어 선언의 대상에서 제외된 후 1927년 입헌국가로 독립했다. 압둘라 1세(1921~1951)는 팔레스티나 전쟁에서 1946년 팔레스티나 동부를 점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탈랄 1세(1951~1952)에 이어 후세인 1세(1952~1999)가 즉위하며 지금의 국명으로 개칭했다. 1952년 국왕 후세인이 입헌군주제를 선포하고 친서방적인 외교노선을 폈다. 하지만 걸프전 당시 이라크 지지로 서방측과 관계가 소원해졌다. 1949년 독립한 이스라엘과의 휴전으로 요르단은 웨스트뱅크를 합병했으나 1967년 6일전쟁 후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

1950년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영토에 추가했으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뺐겼다. 중동 전쟁으로 이스라엘 점령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이 대거 유입되었다. 1970∼71년 정부군과 요르단 주둔 팔레스타인 게릴라 사이의 전투로 망가졌다. 1999년 2월 후세인 국왕 사후 아들 4대 압둘라 2세(1999~현재)가 계승했다. 국민들의 충성심이 높아 정치는 안정됐다.

요르단은 입헌군주국으로 최고 행정권은 왕에게 있다. 후세인 1세의 명으로 1976년 해산된 상 하원 국회는 1984년 다시 소집되었다. 상원은 왕이 임명한 30명, 하원은 선거로 선출된 130명으로 구성된다.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이며 개인의 신분과 관련된 문제에 관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이슬람 종교재판소가 있다.

사회복지제도는 낙후됐다. 연금제도는 노령, 장애, 사망시 혜택 받는다. 정부운영 보건시설은 주로 암만 등 도시에 집중되어 농촌인구 대부분은 혜택을 못받는다. 영양부족과 위생시설이 열악하고 나쁜 기후로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살모넬라, 이질 등이 만연한다. 평균수명은 남자 60세, 여자 64세 정도이다. 주택이 계속 건설되나 여전히 대다수는 단칸방에서 산다.

교육시설은 공립학교, 사립 또는 종교계 설립 학교, 난민 어린이용 UNRWA 운영 학교 등이 있다. 14세까지 의무교육이다. 고등교육기관은 암만 요르단국립대학교, 이르비드 야르무크대학교, 알카라크의 무타대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산업은 비국영이지만, 정부가 많은 산업부문에 공동소유자로 참여하며 정유, 인산염 채광, 관개와 전력, 수송, 통신 산업의 대부분을 소유한다. 미국 등 서방과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원조에 의존한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타 개발도상국들과 비슷하다. GNP의 주요 원천은 지역, 사회, 개인 서비스업, 무역, 건설, 제조업 등으로 노동력 중 1/2은 정부와 지역, 사회, 개인 단위 서비스업에 고용되어 있다. 암만에 집중된 제조업은 GNP의 1/10에 노동력의 1/15이 종사한다. 주요 생산품은 시멘트, 인산비료, 압연강, 담배, 맥주, 포도주이다.

전 국토의 1/20만 경작이 가능한데, 요르단강 지류에 댐이 건설되어 강 하곡과 동쪽의 고지대는 관개가 잘 되어 있다. 농업은 GNP의 약 1/20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상당 부분이 종사한다. 주요 작물은 토마토, 가지, 호박, 고추, 수박 등 채소류와 밀과 보리 등 곡류, 편두, 올리브, 바나나, 오렌지가 생산된다. 목초지가 거의 없어서 목축을 위해서는 우물을 파야 한다. 주 가축인 양과 염소에서 고기와 젖을 얻으며, 양봉도 행해진다. 극소수 삼림은 시리아와 가까운 동쪽의 고원지대에 분포한다. 1967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웨스트뱅크의 농경지를 잃어서 요르단 정부는 조림계획을 다시 세우고 일부 삼림지를 농경지로 바꾸었다.

광업과 채석업은 GNP의 1/20 미만으로 노동력의 약 1%가 종사한다. 주요 광물은 인산염이며 그외 구리, 석고, 망간광석, 고령토, 칼륨 등을 채굴한다. 가정난방과 원격통신에 태양열을 이용하고, 전력은 화력발전으로 생산된다. 건설업은 GNP의 1/20을 차지한다. 요르단 강 골짜기의 관개용 댐과 공장, 사해의 칼륨 공장, 알아카바의 비료 공장과 항만 시설, 라시디야의 대규모 시멘트 공장 등이 세워졌다. 요르단은 내륙국이어서 정부에서는 "IT가 요르단의 생존 방법"이라 정했다. 막대한 무역 적자는 해외의 요르단 노동자들의 송금과 관광수입, 보조금과 차관 등으로 메워진다.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암만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잇는 국영 철도가 있으며, 도로망의 약 3/4이 포장되어 있다. 유일한 항구인 알아카바가 아카바 만에 있으며, 암만, 알아카바, 지지아에 국제공항이 있다.

인구는 990만 명으로 15세 이하가 전체 인구의 2/3며 인구의 2/3 이상이 도시에 거주한다. 요르단 국민의 98%는 아랍인으로 북아라비아의 카이스족 또는 남아라비아 예멘족의 후손이다. 유대인과 영국인도 존재한다.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피난민은 난민구호기관의 원조로 생활한다. 1967년 이스라엘 전쟁 결과 요르단강 서안의 많은 요르단인이 동안으로 이주했다. 모든 난민은 요르단 시민권을 갖고 있고, 난민구제 혜택을 받기 위해 난민의 신분도 유지하고 있다.

공식어는 아랍어이다. 대부분 아랍어를 사용하며 도시에서는 영어도 통용된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90% 이상으로 대부분 수니파며 범 기독교도는 10% 정도로 추산한다. 그중 1/20이 그리스도교도이고 기타 기독교와 유대교 신자가 있다. 대부분 그리스도교도는 루마니아 정교회나 그리스 정교회 신도이다. 기독교는 침례교, 기독교연합교회, 요르단 성공회, 복음주의 자유교회 등이 있다. 아랍의 나라 중 종교의 자유가 있는 편이다.

제라시와 페트라의 유적, 사해 주변의 온천과 광천 등에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요르단은 고고학적 유적과 이슬람과 그리스도교가 조화를 이룬 유물들이 있는 나라이다. 주요 관광지는 로마유적 움까이스, 모세가 애굽을 탈출해 죽기전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했다는 느보산, 그리스-로마 시대 10개 위성 도시 중 하나로 보석, 비단, 상아 등의 매매처로 사막 대상의 경유지 제라시, 다수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벽화 및 바닥들이 발견된 기독교 도시 마다바, B.C 5000년의 도시가 발굴된 사해 북단의 에리코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남서방의 아카바만 부근의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가 유명하다. 나바테안들이 붉은 사암의 거대한 바위 틈새 좁고 깊은 협곡 속의 암벽을 파서 만든 웅장한 헬레니즘 양식 페트라는 1812년 스위스의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가 발견했다. 알 카즈네는 페트라 유적중 최고로 인상적이고 웅대한 2층의 건물이다. 시타델(Citadel)은 옛성터로, 암만의 전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요르단에서는 아랍 문화가 발전되어왔으며 최고 예술은 타 아랍 세계와 마찬가지로 구전예술과 문학예술이다. 민속문화는 노래, 민요, 이야기하기 등의 구전예술로 표현되어왔다. 가장 유명한 20세기 시인은 뛰어난 문체와 사상의 무스타파 와바 앗 탈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브라힘 아부 나아브, 파우다 투칸, 사미라 아잠 등 새로운 세대의 시인과 산문 작가들이 나타났다.

요르단은 지원제를 실시한다. 대부분 육군인 정규군 10만 명과 예비군 3만 5천 명에 왕실 근위병도 보유하고 있다. 요르단의 군사력은 중동 내에서 이스라엘에 버금 가는 것으로 평가되는 숙련도를 보이며, 실제 중동 전쟁에서도 이스라엘군과 대등하게 싸운 것으로 평가된다.

페트라의 나라 ‘요르단(Jordan)’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Jordan’은 요르단 강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강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의미있는 설은 강의 경사를 반영한 셈어 ‘Yarad(the descender)’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현대 요르단의 대부분 지역은 강 동쪽의 땅을 표시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Transjordan(across the Jordan)’이라 불렸다. 구약에서는 이지역을 ‘the other side of the Jordan’이라 했다. 이전 아랍 연대기에서는 셈어 ‘Yarden’에 해당하는 말로 요르단 강을 ‘Al-Urdunn’이라 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Yarad’에서 유래해 히브리어 성경의 ‘yarden<jordan(river)>’이 됐다. 이 말이 고대 그리스어 ‘lordánēs’로 유입됐고, 라틴어 ‘lordanēs’를 거쳐서 ‘jordan’으로 최종 정착을 하였다.

[김권제 칼럼니스트]
고려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김권제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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