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는 거대한 국가산단 미래유산도 도처에 풍성 [서울미래유산 답사기]

전수정 문화지평 칼럼니스트l승인2022.01.09l수정2022.01.0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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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지평은 서울시 문화본부 문화정책과 미래유산팀 후원으로 ‘동서남북 서울미래유산 만보답사’란 주제로 네 차례 답사와 아카이빙을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전수정의 서울 프롬나드]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 문화지평(대표 유성호)은 서울미래유산을 둘러보는 답사와 아카이빙을 수행했다. 이번 사업은 문화지평이 서울시 문화본부 문화정책과 미래유산팀 후원으로 ‘동서남북 서울미래유산 만보답사’란 주제로 네 차례 진행했다. 문화지평은 이번 사업을 통해 △시 외곽 서울미래유산 자원 탐방 답사 △동서남북 시 외곽에 산재한 서울미래유산 영상·텍스트 아카이브 △서울미래유산 어반 스케치 및 온·오프 전시활동 등 다양한 아카이빙 활동을 했다. 네 차례 답사를 1인칭 시점으로 기록한다. <편집자 주>

구로디지털단지역. 이름이 낯설다. 별 고민 없이 구로 어딘가 이겠거니 생각했고, 1호선 구로역에서 내리면 되는 줄로만 알았다. 뒤늦게 지하철 노선도를 펼쳐 확인을 하는데 왜 이리도 비슷한 이름이 많은지, 외려 구로역은 저만치 떨어져 있고 가까운 곳에 가산디지털단지역이 보인다. 하나는 2호선이고, 다른 하나는 7호선이다. 하마터면 엉뚱한 곳으로 갈 뻔했다.

역 밖으로 나왔을 때 맞닥뜨린 풍경은 더더욱 낯설었다. 여전히 내 머릿속 구로는 공장에서 내뿜는 매연으로 자욱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한 때 손가락질 당했어도 여전히 규모가 좀 있다 싶으면 볼 수 있는 통유리로 뒤덮인 건물들이 즐비했다. 인간의 노동력이 전적으로 중시되는 제조업은 치솟은 임금으로 인해 더는 이 땅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는 걸 깜빡했다. 보다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눈길을 돌린 사업체들을 대신해 일명 지식 산업들이 구로 일대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지 아마도 꽤 됐을 듯.

답사 시작장소 구로디지털단지역도 미래유산

▲ 구로디지털단지역은 옛 명칭이 구로공단역으로 서울미래유산이다. 답사팀이 육교 아래서 출발 전 일정에 대해 듣고 있다.

난생 처음 이 동네를 방문한 나로서는 높디높은 건물에 일종의 위압감을 느꼈지만 이곳에서 직장생활 하는 이들은 아마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게 분명하다. 잠시나마 인원이 모여 설명을 들을 장소가 마땅치 않아 처음부터 고전했다. 길을 가로 막을 순 없어 택한 고가 아래는 수시로 지나가는 국철과 자동차, 오토바이 굉음으로 정신이 혼미해지기 그만이었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시대의 흔적을 따르는 길은 부지런함을 요구했다. “상당히 많은 수의 미래유산을 보유한 지역”이라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욕심이 생겼지만 그에 걸 맞는 체력을 갖추지 못한 나는 차분히 다른 이들의 꽁무니만을 좇았다. 그렇게 한동안 걷다가 닿은 곳에는 그리스 동상을 흉내 낸 거 같아 보이는 여성의 동상이 있었다.

우러러 보길 바라는 의도에서 이토록 거대하게 세운 건 설마 아닐 테고, 양손에 들린 횃불과 공 모양(지구본이다!)의 무언가도 의미를 잘 모르겠고. 여러모로 의아해 하는 나에게 들린 말은 “수출의 여인상”이었다. 주로 남성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나라 지키는 일에 앞장서는 것과, 여성들이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통해 수출품을 만들어 국가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애국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 거대한 한국수출국가산업단지 일명 구로공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출의 여인상’. 이 동상은 과거 수출한국의 첨병 구로공단은 여성근로자를 상징한다. 구로공단은 신산업으로 무장한 구로디지털밸리로 변모했다.

일명 ‘산업 역군’으로 오늘도 복무하는 여성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라고 살짝 생각하였으나, 이내 실질적인 노동 환경의 개선은 않고 오로지 이미지만을 부각시키는 게 과연 옳은가 싶은 반감이 일었다. 동상 하단에 새겨진 글에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 前 대통령을 찬양하는 뉘앙스의 문장이 포함된 것을 보면, 이 또한 시대가 달라졌다는 증거 즈음으로 받아들여도 되려나 싶었다. 1974년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10주년을 기념해 제작했다. 공식명칭은 ‘한국수출산업단지 근로여인상’이다.

잘 해보려는 마음이 지나쳤던 거다, 대한민국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빚진 바가 크다는 식의 평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름 없는 이들이 감내해야 했던 희생에 대해서는 다들 망각이라도 한 건지 말을 아낀다. 충분히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올곧은 평가가 힘든 것일 수도 있다. 생각이 많아지려는 찰나에 다음 장소로의 이동이 시작됐다.

서울은 도처가 아파트 단지다. 약 50년가량만 거슬러 올라가도 아파트 형태의 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말은 현재를 세우기 위해 과거를 파괴했다는 의미다. 구로 일대는 더더욱 그랬다.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아 불모지와도 같았으리라는 걸 한 때 구로, 금천 지역까지 ‘시흥’이라 불렸단 이야기를 들으며 짐작할 수 있었다.

나름 인천과 가까우면서 안양천을 비롯한 하천도 있다는 사실이 생산지로서의 강점으로 여겨졌다. 공장을 지었고, 자연스레 사람이 모여 들었다. 그 중에는 앞날이 불투명한 룸펜도 상당수였겠으나, 일종의 투자 차원에서 합류한 이들도 꽤 됐다. 낮에는 먼지가 그득한 공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벌겋게 충혈된 눈을 부비며 못다한 공부에 열을 쏟았던 여공들도 즐비했다.

▲ 신경숙 작가의 소설 ‘외딴방’은 열여섯에서 스물까지 구로공단이란 열악한 환경에서 문학의 꿈을 키웠던 소녀 신경숙의 사랑과 아픔을 생생하게 담은 자전소설이다. 외딴방의 배경인 구로공단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에이스테크노타워2 건물이 옛 동남전기 자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작가 신경숙의 ‘외딴방’이라는 작품 이야기가 시작됐다. 정읍에서 서울로 올라온 작가는 이 근방에 짐을 풀었고, 산업체 부설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에이스테크노타워2’라는 정체불명의 글자가 부착된 건물이 놓인 장소에 있었던 동남전기라는 회사에서 일을 했다. 소설의 문장들은 젊었던 신경숙의 삶을 반추케 했다.

외딴방은 열여섯에서 스물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문학의 꿈을 키웠던 소녀 신경숙의 사랑과 아픔을 생생하게 담은 자전소설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나`’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작가가 된 현재시점에서, 유쾌함보다는 잔잔한 아픔이 앞서는 스산했던 소녀시절의 일들이 하나하나 기억의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부유하지는 못했지만 늘 따뜻한 온기가 배어 있었고 귀함을 받고 살았던 그가 도시로 올라와 낮에는 전자업체의 공원으로,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급의 학생으로 생활하며 겪게 되는 일들과 내면의 갈등이 차분하고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래서 처연함이 더한 문체로 그려진다. ‘외딴방’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마을에 섞이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진, 도심 언저리의 낮고 작은 보잘것없는 방인 동시에 소녀시절이 상처 많은 내면의 모습이기도 하다.

신경숙은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거기서 여고를 다니지 못했고 6개월 동안 집에 있었다. 맏이 오빠가 서울에 가있었는데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데 정부에서 산업체 특별 학급이라는 학교를 만들었다. 낮에 일을 하고 밤에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학교였다. 내가 가게 된 회사는 동남전기 주식회사라는 앰프 만드는 회사였다. 거기서 학생들 10명을 학교에 보내줬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지금은 이마트가 된 장소에서 서울에 갓 올라온 그는 직업 훈련을 받았을 것이고, 굴다리 건너편 버스 차고지와 꽤 가까운 곳이 지친 몸을 뉘였을 집이었을 것이며, 여전히 각종 분식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구로 시장에도 그의 발길은 닿았을 것이다. 시대가 고됐고, 모두가 힘겨웠다. 그 시절을 잘 버틴 모두에게 박수를!

남구로시장과 사뭇 다른 구로시장

▲ 구로시장은 과거 여공들이 즐겨 찾던 공간으로 가리봉시장과 함께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성황리에 운영 중인 구로시장을 통과했다. 먹거리를 주로 팔아 북적이며 활기가 넘치는 남구로시장에 비해 한복점이 주를 이룬 구로시장 쪽은 한산했다. 오가는 이가 매우 드무니 인건비라도 아껴볼 요량으로 아예 문을 닫은 점포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 시절 여공들의 손을 거친 물건 중엔 명품 브랜드 표식이 부착된 것들도 꽤 존재했을 테지만, 정작 생산자는 비싼 가격으로 인해 소유는 꿈도 꿔선 안 됐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면 일부는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고 남은 돈으로 시장에서 요기를 하고 저렴한 옷도 장만하는 게 그네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지금은 한복을 입지도 않을뿐더러 필요하면 빌려 입지만 그 땐 한복만한 옷이 없었다. 결혼식처럼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자리는 당연히 한복을 입어야 했고, 특히 어르신들에겐 한복이 곧 평상복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 수요가 급감한 한복 시장은 어찌 하면 되살릴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 보아도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질 않았다.

시장 부근에서 독특한 건물을 보기도 했다. 지금은 경로당으로 사용 중인데 요즘은 보기 힘든 동그란 창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거주하는 도봉구 쪽도 서울의 가장자리지만, 구로도 마찬가지라 예전부터 버스 종점이 많았다. 해당 건물은 버스 안내양들이 이틀간의 근무를 마친 후에 휴식을 취했던 기숙사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야트막한 높이, 삼각형 지붕을 얹은 건물들도 골목 안쪽에 제법 많았다. 4000여 채 정도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집들은 ‘공영 주택’으로 한 때 임노동자 등이 거주했으나 지금은 주로 조선족들이 머물고 있다 들었다. 실제로 이날 거닌 골목에는 나로서는 읽으려 시도조차 하기 힘든 꼬부랑글씨가 꽤 많이 부착돼 있었다. 심지어 구로구청 등 행정기관에서 내건 현수막에도 중국어가 병기된 경우가 상당했다.

‘보충대 슈퍼’라는 군대를 연상시키는 구멍가게도 있었다. 훈련소에서 막 훈련을 바친 병력이 본부대 배치를 받기 전 잠시 머무르는 곳이 보충대인데, 의정부와 구로, 춘천 3곳에 보충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씁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쟁 통에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던 시절, 실제 농사를 지으며 이곳에서 살았던 이들이 농지를 돌려 달라는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였으나 국가 권력에 의해 오히려 사기범으로 몰리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단다.

‘구로 분배농지 강탈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의해 진실이 표면에 드러났으며, 2017년이 되어서야 국가가 배상 책임을 진다는 판결이 이루어졌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여럿인지라 막대한 보상금이 무슨 의미일까 싶으면서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측백나무제와 가리봉오거리는 구로의 역사 한축

▲ 주민들의 무사안녕을 비는 측백나무제와 구로공단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가리봉오거리 모두 서울미래유산이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해결되기까지, 거대한 측백나무의 속도 타 들어갔을 터. 얼핏 보아도 오래됐지 싶은 측백나무는 나름의 상징성을 지녔던지 일대 명예도로명이 ‘측백나무길’이었다. 가리봉시장과 가리봉오거리, 마리오 까르뜨니트를 지나 마지막 장소인 노동자생활체험관으로 향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구로공단이 버젓이 존재하던 시절, 순이로 대표되던 여성 노동자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은 아담하면서도 알찼다. 오늘날로 치면 쪽방에 해당할 2평 남짓한 면적에 많게는 네다섯 명의 인원이 함께 숙식을 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와 같은 생활이 가능했던 건 밤낮이 뒤바뀌는 교대 근무 덕(?)이었을 터. 엄연히 존재했던 시절이고, 나의 부모 세대가 실제로 겪은 일들임에도 막연한 과거로 느껴지는 건 내 삶이 그다지 치열하지 않다는 방증일지도. 처음부터 매우 낯설게 다가왔던 구로 지역은 답사의 끝무렵까지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음이자 불편함을 나에게 선사했다.

‘순이’의 추억 노동자생활체험관과 구로역

▲ 일명 ‘순이의 집’으로 부르는 노동자생활체험관은 1960년대부터 90년대 까지 순이로 대표되던 여성 노동자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미래유산인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 있다.

여전히 구로는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는 전혀 다른 거라는 식의 말을 세상은 하지만, 누군가에게 고용됐으며 제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한 결과 돈을 번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난날로부터 그리 멀리 오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우리는 일해야 할 것이다. 조금 덜 투박해졌고, 조금 더 세련돼 졌음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구로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그와 배치되는 현재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심경은 복잡했다. 과연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왔다고 확신해도 좋을지.

▲ 산디지털역에서 공식 일정을 마쳤지만 대부분은 구로역과 구로기계공구상가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 곳을 함께 볼 수 있는 새말고가교 위에서 네 차례에 걸친 서울미래유산 답사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다들 구로역 방면으로 걸어간다 하였다. 30여분 가량이 걸린다는 말에도 아랑곳 않았던 건 구로기계공구상가 쪽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 같다. 많이 걸었지만 다리가 아픈 거보단 배고픔이 더 컸다. 조금은 뜬금이 없을 수도 있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안양천 쪽을 달리고 싶기도 했다. 일행과 헤어져 따릉이를 빌렸다. 지상으로 달리는 국철로 고전했다.

불행 중 다행이도 인도에 자전거 도로가 상당히 잘 정비된지라 외려 감탄을 하며 금천구청역 부근까지 내려갔다. 길이 곧았으면 별 생각 없이 계속 직진한 끝에 석수역까지 닿았을 것이다. 거긴 서울 아닌 안양시라는 걸아니까, 놀라서 두리번거렸을 듯. 금천구청 옆 도로가 글쎄 삼거리여서 고심 끝에 따릉이를 짊어지고 철로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억새가 흩날리는 자전거도로를 따라 페달을 밟았다. 배가 안 고팠으면 한강까지 갈 뻔했는데, 꼬르륵 지령(!)을 받고 구일역에서 멈추어 섰다.

전수정 문화지평 칼럼니스트  moonwhajipyu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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