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수행했다.
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 역사문화와 인문학 분야 디지털 아카이브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올 사업 주제는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다.

네 번째 답사로 지난 12월 20일 오후 6시 덕수궁 대한문부터 행촌동 딜쿠샤까지 다시 한 번 정동과 일대는 물론 북쪽으로 더 올랐다. 그만큼 이 일대는 톺아볼 것이 많고 깊었기 때문에 지난 9월에 이어 두 번째 답사를 진행한 것이다. 답사 해설은 전상봉 역사문화해설사가가 1회차 김태휘 해설사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공간을 설명했다.

전 해설사는 서울시민연대 대표와 발로품는서울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있다. 강남개발사를 담은 ‘강남을 읽다’ 등을 저술하고 한성백제 역사에 해박한 서울학 전문가다. 문화지평과는 2016년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역량 있는 해설가다.

덕수궁부터 행촌동 딜쿠샤까지 두 번째 정동야행

근대건축 테마답사 마지막 답사는 정동을 다시 한 번 톺았다. 원가 많은 근대건축이 분포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돌아보기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멀리 이화박물관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근대건축 테마답사 마지막 답사는 정동을 다시 한 번 톺았다. 원가 많은 근대건축이 분포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돌아보기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멀리 이화박물관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답사팀은 느지막이 오후 6시 덕수궁 대한문 앞 매표소에서 집합했다. 대한문은 조선후기 다포식 우진각지붕 형태의 문이다. 덕수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을 당시, 궁궐이 모두 불타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중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거처하게 된 것이 시초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고 했다. 전 해설사는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덕수궁은 정전인 중화전을 짓기 전에는 임시로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고, 3문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인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명례궁을 옛 이름인 경운궁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2년(광무 6) 들어 궁궐을 크게 중건하면서 정전인 중화전·중화문·외삼문인 조원문을 세워 법전의 체제를 갖추었다.

얼마 뒤 인화문 자리에는 건극문을 세우고 조원문 앞 동쪽에 대한문의 전신인 대안문을 세워 새로 정문으로 삼았다. 1904년(광무 8) 함녕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자 1904년에서 1906년(광무 10)에 걸쳐 이를 다시 중건했고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이라고 불렀다. 전 해설사는 대안을 대한으로 고친 야사가 몇 개를 소개했다.

대한문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이 썼다. 1914년 도로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문 오른쪽에 있던 건물 및 담장이 모두 일제에 의하여 크게 파괴됐다. 이때 대한문도 궁 안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1970년에도 도시계획으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는 월대 복원 공사로 가림막이 쳐 있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다.

답사팀은 월대 공사 가림막에 새겨진 덕수궁과 대한문의 역사와 변천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세실마루로 향했다. 세실마루는 정동과 서울시청 앞 등 인근 도시경관을 살펴보기 좋은 공간이다. 세실마루에서 서울시청 방향으로는 과거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별관이 있었다.

지금은 철거되고 기둥만 흔적으로 남겨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체신국 청사로 쓰기 위해 1935년 12월 공사에 착공해 1937년 6월에 준공한 건물이다. 조선총독부 체신국 경리과 영선계가 설계를 맡았다. 일명 조선체신사업회관으로 불렸다. 1930년대 들어 경성부청을 중심으로 각종 근대식 건물들이 들어서던 가운데 독일의 조형학교 바우하우스와 비슷한 외관으로 당시로서는 첨단의 모더니티를 자랑하던 건물이었다.

2015년 8월 서울시가 추진한 역사문화광장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철거됐다. 2019년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지상 1층~지하 3층 연면적 2998㎡ 규모로 조성됐다. 지상은 '비움을 통한 원풍경 회복'이라는 취지의 시민광장이, 지하 3개 층은 국내 첫 도시건축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세실마루서 내려다 본 눈 덮인 정관헌

세실마루서 내려다 본 눈 덮인 정관헌. 1900년대 초에 지은 서양식 근대건축물이다.
세실마루서 내려다 본 눈 덮인 정관헌. 1900년대 초에 지은 서양식 근대건축물이다.

세실마루에 오른 답사팀은 덕수궁 안을 조망했다. 가장 가까이 지붕에 살풋 눈을 이고 선 정관헌이 보인다, 정관헌은 동양적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근대건축물이다. 1900년경에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건립년도는 알 수 없다.

대한제국기 초 경운궁 내 대부분의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정관헌이 언제 준공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정관헌이 등장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 고종실록 1901년 2월 5일자(경자년(1900) 12월 17일자)라는 점을 근거 삼아 1900년경으로 짐작할 뿐이다.

2016년 학계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덕수궁원안(德壽宮原案)은 1915년(大正4)에 궁내부 이왕직이 덕수궁 중심권역 166채의 건축물 현황을 조사한 보고서다. 당시 덕수궁에 남아있던 양관들 중에서는 정관헌이 유일하게 포함돼 있어서 1930년대 초 개조 공사 이전의 상황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자료이다. 이런 자료에 따라 정관헌이 수 차례에 걸쳐 원형이 변형되어 오늘날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30년 이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오카다 미츠구의 사진에 의하면 정관헌은 현재의 개방형 기둥구조가 아니라 사방이 벽돌벽으로 둘러싸인 구조였다. 지금과 같이 세 방향이 열린 구조에서는 어진을 모셔두고 예를 올리는 것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따라서 훗날 개축이 진행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종이 이곳에서 커피를 즐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나 후대를 그것을 문화행사로 둔갑시켜 해마다 축제를 벌였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이었던 지난 2017년 가을, 서울 중구청의 정동야행 공연프로그램 ‘대한제국 외국 공사 접견례’는 덕수궁 정관헌 홀을 무대로 외국 사신들이 고종황제를 접견하고 연회를 즐기는 장면을 재현했다. 그리고 덕수궁관리소의 고궁문화 행사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는 2009년부터 2017년 봄까지 스타벅스 코리아의 후원으로 참가자들에게 무료 커피를 나누어 주었다.

이 두 행사는 고종황제가 정관헌에서 연회를 열고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속설이 투영된 가장 최근의 일들이다. 사실 정관헌에서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거나 커피를 마셨다는 내용의 기록은 없다.

구 러시아공사관, 정동 가장 좋은 전망에 위치

답사팁은 고종의 길을 따라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했다. 민비 살해 사건인 을미사변 이후 친일파의 득세로 신변이 불안했던 고종은 일본의 압박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과 측근 세력은 정동 외국공관으로의 이어(移御)를 구상했다. 춘생문 사건은 1895년 11월 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친미, 친러 세력인 ‘정동파’ 관료들이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도피시키려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춘생문 사건이 실패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 스페이어와 접촉해 1896년 2월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했다. 이완용 등이 도왔다. 이완용은 친미파였다가 아관파천 당시는 친러파로 말을 갈아탔고 나중에는 친일파가 되는 처세의 달인이다.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각지 광산채굴권 등을 헐값에 넘겨받았다. 다른 열강들까지 은근한 압력을 가하자면 경인선, 경의선 철도부설권 등을 싸게 불하받았다. 구한말 나약한 조선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러시아공사관은 정동에서 가장 높은 구릉지에 자리 잡은 크고 웅장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고종이 안전을 도모하기 좋은 장소였다. 탑의 동북쪽 지하실은 경운궁과 연결되어 있어 고종이 유사시 러시아에 의지하기 위한 도피 경로로 만들어 놓았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현존하는 러시아공사관 건물이 세워진 것은 여러 설이 있지만 1890년으로 정리된다.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이 정리한 ‘외교사연표’에는 ‘현 러시아공사관의 정초석을 놓은 것은 1890년 8월 30일’이라고 적고 있다.

손탁호텔 터, 고종이 하사한 땅에 들어선 호텔

옛 손탁호텔(좌)과 프라이홀 모습. 이화여고는 1922년 손탁호텔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했지만 1975년 화재로 소실됐다. 지금은 이화100주년기념관이 들어서고 손탁호텔 표지석이 남아 있다.
옛 손탁호텔(좌)과 프라이홀 모습. 이화여고는 1922년 손탁호텔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했지만 1975년 화재로 소실됐다. 지금은 이화100주년기념관이 들어서고 손탁호텔 표지석이 남아 있다.

이화박물관 앞 주차장 입구에는 손탁호텔의 표지석이 있다. 러시아 공사관 수석통역관이었던 앙뚜아네트 손탁(Antoniette Sontag)이 지은 호텔이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해 출생지인 알자스로렌이 독일로 병합되면서 독일인이 됐다. 아관파천을 주도했던 러시아 초대공사 카를 베베르와 함께 입국했다. 경복궁의 양식요리사로도 일하고 명성황후와도 친분이 있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아 덕수궁 근처 황실 소유 가옥과 부지를 하사 받았고 1902년 2층 25개 객실 규모의 호텔을 지어 지배인이 된다. 주변에 구미 공관들이 즐비하던 시절, 손탁호텔은 또 하나의 외교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명전 맞은편에 위치한 터라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기다렸던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고종이 하사한 땅에서 이토가 나라를 빼앗기 위해 기다리는 부조리와 아이러니의 장소, 구한말 손탁호텔이다.

손탁호텔은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 묵은 적이 있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말경 런던 데일리 텔레그래프 종군기자로 특파된 처칠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왔고 만주로 취재를 가는 도중 하루를 손탁호텔서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손탁호텔은 손탁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 이화여고에서 사들였다. 1922년 손탁호텔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했지만 1975년 소실됐다.

답사팀은 월암동으로 오르는 길에 길에 삼성강북병원 안에 위치한 경교장을 들었다. 경교장(사적 제465호)은 일제강점기 부호인 최창학의 저택이었던 것을 최 씨가 친일 경력을 무마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헌납했다. 그 뒤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의 숙소이자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건물로 사용했다.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환국해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서거하기까지 3년 7개월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건물 이름은 근처에 있던 경교라는 다리에서 따왔다. 백범 서거 후 외국 대사관저, 미군시설, 병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2013년 원형대로 복원됐다.

등록문화재가 된 친일파 홍난파 가옥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답사팀이 홍난파 가옥 앞에서 설명을 듣는 모습.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답사팀이 홍난파 가옥 앞에서 설명을 듣는 모습.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등록문화재 제90호)은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지은 벽돌조 서양식 건물을 작곡가 홍난파가 인수해 살던 곳이다. 홍난파의 대표곡들이 작곡된 곳이고, 1930년대 홍난파는 이곳에서 ‘고향의 봄’, ‘봉선화’, ‘풍당당’ 등 주옥같은 우리 가곡과 동요를 남겼다. 1935년부터 6년간 거주하면서 말년을 보냈기에 홍난파의 집이라 부른다. 1900년대 초반 부근 송월동에 독일영사관이 위치해 있었기에 이 일대는 국내 독일인들의 주거지였다.

서쪽 도로를 통해 마당 안으로 들어와 계단을 오르면 현관으로 이어지는 이집은 지붕이 가파르며 거실에는 벽난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남쪽 현관과 이어진 복도의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거실과 침실을 두고 가파른 경사지를 이용해 거실의 아래쪽에는 지하실을 두었는데 이는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던 당시 서양인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층 동쪽에 있던 두 개의 침실은 홍난파 기념관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홍난파 가옥은 보존 이후 거실과 안방을 개조해 공연장을 만들면서 집의 원형이 훼손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역사인물가옥 박물관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거나, 예산과 복원 기간이 충분하지 않았을 때, 보존 목적과 방법에 대한 이해와 공유가 부족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점이란 지적이다.

한편, 홍난파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포함된 인물이다.

‘딜쿠샤’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테일러 저택’

행촌동에 위치한 테일러 저택(딜쿠샤). 지금은 전시관으로 개관 중이다.
행촌동에 위치한 테일러 저택(딜쿠샤). 지금은 전시관으로 개관 중이다.

‘테일러 저택’은 ‘딜쿠샤(Dilkusha)’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딜쿠샤는 기쁨마음, 희망, 이상향이란 의미다. 행촌동 1-88, 1-8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행촌동이라는 동 명칭은 1914년 동명 개정 때 ‘은행동’과 ‘신촌동’에서 한 글자씩 합성한 이름이다. 은행동은 약 400여 년 전 권율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때문에 동명이 유래한다.

테일러 저택은 지하1층, 지상 2층의 규모다. 1963년부터 대지와 건물이 국유화됐으며, 저소득층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가 2017년 8월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됐다. 서울시는 2018년부터 복원 공사에 착수해, 3.1 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 딜쿠샤 복원을 마치고 일반 개방을 추진하였으나 건물 내 거주하던 주민들과의 법적 분쟁 탓에 그 해에는 임시 개방에 그쳤다.

2021년 3.1절부터 개방된 딜쿠샤 전시관은 기존 내부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거주할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고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상과 테일러의 언론활동 등을 조명하는 6개의 전시실로 구성했다.

배재학당 동관에서 근대건축 투어 마무리

배재학당 동관(사진 좌)에서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마무리했다. 이번 답사에서는 고덕동 배재고로 이축한 서관(아펜젤러기념관)까지 답사해 의미를 더했다.
배재학당 동관(사진 좌)에서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마무리했다. 이번 답사에서는 고덕동 배재고로 이축한 서관(아펜젤러기념관)까지 답사해 의미를 더했다.

답사팀은 발길을 돌려 정동 방향으로 내려 왔다.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쌓였고 월암동에 교교하게 달빛이 비췄다. 하필 영하14도의 강추위가 있는 날 야외 답사였지만 어느 누구도 불평 없이 근대건축과 역사의 얼개를 엮는 길을 묵묵히 걸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다다랐다. 정초석을 어렵사리 읽어보니 ‘定礎 昭和二年十一月 朝鮮總督 子爵 齋藤實’이라고 새겨져 있다. 쇼와 2년은 1927년이다. 齋藤實는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한자 이름이다.

이 건물은 건축 당시 경성재판소로 지어졌다. 조선 말기에는 평리원(한성재판소)가 있던 자리다. 대법원이 1995년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했다. 과거에는 이혼 업무를 했던 가정법원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덕수궁 돌담길이 ‘이별’을 상징하는 곳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건물 전면만 보존하고 새로 건축해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술관 뒷문으로 빠져 나오면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이 나온다.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효시다. 배재학당은 고종이 내린 교명이다. ‘선교+의료’가 주특기인 스크랜턴과 달리 아펜젤러는 ‘선교+교육’이 주특기였다. 배재고등학교는 1984년 쌍둥이 건물 중 동관을 남기고 강동구 고덕으로 이전했다. 남은 동관은 배재역사박물관으로 조성해 배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로 만들었다. 독립신문 터도 근처에 표석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 독립은 일제가 아닌 청나라로 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
근현대문화유산의 활용방안 연구 : 서울 소재 등록문화재·미래유산을 중심으로, 신창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2015
-역사인물가옥 박물관의 현황과 활용 방안, 송지영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 20세기 초 서울의 서양식 저택 연구 : 현존하는 7채를 중심으로, 허유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2013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역사문화 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2022),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2022), 조선왕릉 40기 프롬나드(2022)

지자체‧기업‧단체·학교 인문역사답사‧강연 진행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