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수행했다.
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 역사문화와 인문학 분야 디지털 아카이브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올 사업 주제는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다.

두 번째 답사로는 사대문 안 근대건축물을 사대문 밖으로 옮긴 ‘이축 건축물’을 찾아서 8월 20, 21일, 9월 3일 세 차례에 걸쳐 답사했다.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 이유다. 각각 구 서북학회인 건국대박물관, 구 배재학당 서관인 배재고 아펜젤러기념관, 우이동 봉황각 영내로 옮긴 천도교 중앙종리원을 찾았다. 계획했던 구 벨기에영사관인 서울시립미술관 남부분원은 여건상 답사하지 못했다.

모든 답사 해설은 김태휘 해설사가 맡았다. 김 해설사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조경학 박사를 마치고 돌아와 건축문화와 역사문화에 대한 해설을 하는 인문학자다.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생태와 건축, 역사 분야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77년 해체된 후 85년 이축 복원된 구 서북학회 회관

답사팀이 구 서북학회, 현 건국대박물관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답사팀이 구 서북학회, 현 건국대박물관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서북학회는 1908년 서북·관서·해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했던 애국계몽단체다. 서울에 본부를 두었고 31개지회와 69개의 지교(支校)를 두었다. 서북학회회관은 종로구 낙원동에 있었다. 지금은 인근에 표석만 남긴 채 건국대 캠퍼스 안으로 이축됐다.

서북학회 주요 인물로는 안창호, 박은식, 유동열, 이동휘 등이 있다. 서울 한 복판인 종로구 낙원동에 터를 잡았다. 회관 건물은 중국인 기술자에 의해 당시 종로2가에 있던 한성전기회사 사옥을 모방해서 지었다. 1910년 학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된 후 신식 교육기관인 오성학교 교사로 사용됐다. 1918∼1922년에는 보성전문학교 교사로 사용됐다.

건물은 1939년 당시 민중병원을 운영하던 상허(常虛) 유석창(1900~1972)에게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해방 후 건국대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1946년 이후 건국대에서 사용하다가 1977년 도시계획으로 해체된 뒤 1985년 지금의 화양동 캠퍼스에 복원됐다.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됐다.

서북학회 건물의 건축연대는 한국 전통건축 양식으로부터 근대건축으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시점인 1908년이다. 일본인에 의해 서구식 근대건축이 유입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하는 측면에서 일본기술자를 배제하고 중국인 손을 통해 신축을 도모했다.

대체로 구한말의 근대건축은 종교건축물은 고딕 양식, 공관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서북학회 건물은 중앙에 돔을 얹어 시계탑을 구성하는 등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립된 한미전기회사 사옥(1900)을 모방한 것으로 판단된다. 두 건물 모두 2층 벽돌조 건물이라는 점과 건물 평면은 포치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인 점, 포치의 2층 부분 테라스의 모습, 모서리 코너스톤 장식 모양, 포치 기둥 부분의 아치형 쌓기 등에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건축사조이면서 유행이라고도 볼 수 있다.

건물외형에 대한 평가는 한미전기전기회사 사옥에 비하여 작고 소박하게 지어졌다. 때문에 피상적인 모방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있다. 1900년대 초반(약 1905년~1910년)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로는 서북학회 회관, 중앙기독교 청년회관(1908), 한국산업은행본점(1907), 원효로 성당(1907, 사적 255호), 창경궁 식물원(1909) 등이 있다.

서북학회 회관은 벽돌과 석재가 혼용된 조적조 구조체 위에 한옥 모양의 지붕을 쌓는 등 재료나 부분적인 표현 수법이 다른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당시 근대건축의 흐름을 반영한 것인 동시에 한국 전통가옥의 미학을 살려 구조화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서북학회회관은 일제에 대항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주요 정신으로 삼은 서북학회라는 단체가 결성된 것을 기념해 서울의 중심부에 세워진 건물이라는 점도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1900년대 초반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건물로서의 가치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 두 단체는 1908년 1월 3일 학회 임원들이 교동에 있는 서우회관에 모여 서북학회 결성을 선언했다. 학회의 명칭은 서북학회(西北學會), 학교는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결정했다.

통합으로 인해 회관 급 교사의 확장이 불가피해 짐에 따라 4월 10일 특별총회를 개최하고 3층짜리 서양식 건물 신축을 결정했다. 건축경비는 15,700환 이상으로 책정하고 청나라 기술자를 고용하기로 했다. 회관은 초기 서북학회 주요 회원 33명의 공동소유로 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강북 명문고 강남 이전의 상징 ‘배재고 아펜젤러기념관’

배재학당 서관(1923)은 고덕동으로 옮겨져 지금은 배재고등학교 내에 있으며 아펜젤러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재학당 서관(1923)은 고덕동으로 옮겨져 지금은 배재고등학교 내에 있으며 아펜젤러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재학당은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다. 배재학당이 세워지던 시절은 다수의 선교사들이 들어온 시기와도 맞물린다. 그보다 살짝 앞서 들어온 인물로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턴 여사가 있고, 연세대학교 하면 떠오르는 인물 언더우드 또한 같은 해인 1885년 입국했다.

최초의 위치는 여기가 아닌 서울 중구 정동이었으나, 다수의 명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하던 무렵 배재고등학교 또한 강동구로 옮겨왔다. 고덕로 227(고덕동 313번지)로 옮긴 배재고의 전신은 배재학당이다. 배재학당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欲爲大者當爲人役)’라는 교훈 아래, 1885년에 미국 북 감리회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다.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상륙한 아펜젤러 목사는 한국의 정세가 불안정하자 4월 13일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국어를 공부하다가 6월 21일 다시 인천항에 도착한다. 아펜젤러가 자신보다 한 달 먼저 도착해 병원을 운영하던 스크랜튼 의사의 집 방 2칸을 빌려 교실로 만들고 이겸라와 고영필 두 사람에게 영어수업을 하면서 배재학당이 시작됐다.

1886년에 학생이 16명으로 늘어나자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민가 몇 채를 사서 교실로 개축하여 사용했다. 1886년 6월 8일 고종이 학교 설립의 소식을 듣고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아펜젤러기념관은 설립자인 아펜젤러를 기리기 위해 1923년에 건립됐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 차 목포로 가던 중 어청도 인근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파손된 배 안으로 동료를 구하기 위해 들어갔다 순직하게 된다.

1970년대 정부는 ‘강북 억제, 강남 개발’을 추진하면서 이른바 서울 4대문 안에 몰려 있던 명문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배재고도 1984년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때 아펜젤러기념관도 옮기게 되었는데, 당시 건축 기술의 한계로 건물들이 훼손될 우려가 적지 않았으나 다행히 예전 모습 그대로 이축하게 된다.

아펜젤러기념관은 배재자연사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2019년 9월 아펜젤러기념관으로 재개관하고자 준비, 2020년 배재중고등학교박물관(아펜젤러 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다. 배재고등학교 아펜젤러기념관은 근현대 유산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정부 주도의 강남 개발로 강북의 명문학교가 강남으로 이전 추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 중 하나이다.

배재학당 서관은 1914년 착공해 1915년 준공된 벽돌로 지어진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이다. 현관 좌우에 있는 원형기둥에서 터스칸 양식의 배흘림이 보이며 내부 계단과 바닥은 목구조로 되어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전면과 배면에 도머창이 각각 3개소, 굴뚝이 각각 2개소 돌출되어 있다. 외벽은 벽돌과 화강석 돌림띠 창대석 등으로 마감되어 있다. 내부는 벽체와 천정 모두 회반죽미장 마감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목조 트러스 위 골함석으로 마감했다.

양식적으로 불분명하나 전체적으로는 르네상스 양식에 가깝다. 건축가는 미상이나 심의석이라는 설도 있다. 보존이 잘 돼 있어서 한국 근대건축물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우이동 봉황각 근처로 이건된 중앙종리원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우이동의 같은 종교시설로 이축된 천도교 중앙종리원.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우이동의 같은 종교시설로 이축된 천도교 중앙종리원.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 옆에는 수운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22년 지은 중앙종리원 건물(중앙총부 본관)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중앙대교당, 대신사백년기념관(수운기념관)’과 더불어 천도교 단지를 이뤘다. 1969년 수운회관의 신축과 함께 우이동의 봉황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 전면에 이축됐다.

도심의 밀도가 높은 경운동에는 더욱 밀도 높은 건물들이 중앙대교당 주변으로 신축됐고 상대적으로 도심보다는 밀도가 낮은 북한산 입구 우이동에 천도교 2대 교주인 손병희의 묘소와 독립운동가 양성을 목적으로 지은 봉황각이 있는 너른 비탈에 건물을 옮겼다. 현재는 천도교 종학대학원(자료실과 강의실 포함) 및 수련시설로 사용하고 있다. 이축을 하면서 형태가 일부 변형된 것으로 보이며, 용도가 일부 변경되어 내부의 벽난로가 없어지면서 굴뚝도 사라졌다.

이 이축사례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벨기에 영사관과는 그 내용면에서 궤를 달리한다. 구 벨기에 영사관은 행정협의에 의해 장소성과는 먼 곳으로 이축하게 된다. 그러나 천도교 중앙종리원이나 서북학회 회관은 같은 종교재단과 학교재단의 다른 부지로 이축되었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장소성을 고려한 것이 특징이다.

중앙종리원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수운회관은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 때인 1971년에 지어졌다. 청와대 근처에 16층이나 되는 고층건물이 허가가 쉽게 날 리 없던 시절이라 의아했지만 천도교 교령이었던 최덕신 때문이란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서 이해가 됐다.

최덕신은 육사교장으로 있으면서 박정희와는 사제지간으로 맺어진 관계다. ‘수운회관’이란 판석의 각자 글씨가 박정희 것이란 소리도 있다. 이 때문에 고층건물이 들어섰고 지금은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을 대신해 천도교의 자산으로 활용되고 있다. 보성사 이종일 사장의 집도 이 근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는 또 한 번 아이러니하게 흘러갔다. 박정희 정권에서 외무장관까지 지낸 최덕신은 1977년 도미한 후 박정희를 파쇼정권이라고 비난했다. 이후 1986년 부인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의 아버지 최동오는 화성의숙 시절 김일성의 스승이었다. 남북의 최고 권력자이자 독재자를 제자로 둔 최 씨 부자의 삶이 파란만장하단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부자는 나란히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회현동서 남현동으로 이측된 옛 벨기에영사관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벨기에영사관.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벨기에영사관.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벨기에영사관은 1977년 11월 22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1903년(광무 7) 착공해 1905년에 세운 서양의 고전주의 양식 건축물이다. 대한제국 때 벨기에영사관으로 사용했다. 이중화가 지은 ‘경성기략(京城記略)’에 따르면 l900년에 입경한 벨기에 전권위원 L.뱅카르가 1902년 6월 중구 회현동에 영사관 건축을 착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뒤 1919년 벨기에 영사관을 충무로로 옮긴 다음 이 건물은 일본 요코하마생명보험회사 사옥으로 쓰이다가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관저로 이용됐다. 8·15광복 후 해군헌병대 청사로 사용했으며 1970년 상업은행(지금의 우리은행) 소유가 됐다. 1982년에 관악구 남현동으로 이전해 복원했다.

이 건물은 일본 호쿠리쿠토목회사에서 시공하고 고타마가 설계하였으며 니시시마가 감독했다. 좌우 대칭의 평면으로 정면 중앙에 돌출된 현관이 있고 정면 외벽면 1·2층에서 중앙부는 적벽돌로 마감하고, 양끝에는 석조기둥을 둘렀으며 지붕은 함석 경사지붕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붉은 벽돌과 석재를 적절하게 혼용했다. 고전주의 양식의 현관과 발코니의 이오니아 양식의 돌기둥 등 의장이 매우 수려하며 내부의 문과 계단 등은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다.

해체 이전 경위에 따르면 영사관이 자리한 중구 회현동 2가 78ㆍ79번지는 외교가가 주로 위치하던 정동과는 거리가 있는 특이한 위치로 고옥이 둘러싸인 곳이었다. 상업은행은 1960년대 당시 사용 중에 있던 본점이 협소한 탓으로 본점 기구 일부를 임차해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현재의 건물로서는 많은 업무량을 처리하기 어려워 새로운 본점을 신축계획하고 있었다.

1968년 상업은행이 본점 신축을 위해 영사관 및 주변 부지를 사들여 영사관을 철거할 것을 전제로 수리를 하지 않은 채 건물 내부를 창고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7년 영사관이 사적으로 지정됐고 상업은행은 영사관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금융중심 지역인 회현동 2가를 벗어나 다른 지역에 본점을 신축하기에는 소요 부지 확보계획으로 인한 막대한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금융업무를 취급하는 특수한 입장에서 금융 중심가에 위치해야 본연의 기능을 수월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계획해온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 구 벨기에영사관의 해체공사를 하기 위해서 소유자인 상업은행과 서울시 그리고 문화재관리국 3개의 기관이 서로 의견과 방안을 주고받았다. 최종적으로 서울시 관악구 사당동 541번지 일대를 이전장소로 정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서북학회의 설립과 운동, 홍미경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2007, 국내석사
-한국 근대건축 문화재의 보존유형과 수리기술에 관한 연구, 고주환 단국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 박사
-네이버 지식백과, 서북학회·배재학당(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역사문화 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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