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수행했다.
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 역사문화와 인문학 분야 디지털 아카이브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올 사업 주제는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다.

세 번째 답사로 지난 11월 20일 근대건축물이 밀집해 있는 남대문로, 명동길, 소공로, 을지로 입구 주변에 있는 근대건축물 가로군(街路群)과 멸실 위기의 2층 한옥을 답사했다.

답사 해설은 김태휘 해설사가 맡았다. 김 해설사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조경학 박사를 마치고 돌아와 건축문화와 역사문화에 대한 해설을 하는 인문학자다.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생태와 건축, 역사 분야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표석을 따라서’ 시리즈로 한성, 제국에서 민국, 경성, 서울 등 총 4권의 공저를 냈다.

서울역부터 시작된 근대건축 가로군 답사

근대건축과 2층 한옥을 답사하기 위한 답사팀이 서울역에서 모여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근대건축과 2층 한옥을 답사하기 위한 답사팀이 서울역에서 모여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답사 일정이 엉켰다. 그래서 각각 진행하려던 근대건축물 가로군과 멸실 위기 2층 한옥에 대한 답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9월 정동야행 때 미진했던 정동을 한번 더 돌아보기로 했다. 답사는 지난 11월 20일 오전 9시 서울역에서 출발해 남대문로와 명동길, 을지로 입구를 거쳐 종로, 서촌지역 2층 한옥을 찾았다.

출발지인 구 서울역사의 원래 명칭은 경성역이었다. 이곳의 역사(歷史)는 우리나라 철도 역사 출발점인 경인선의 개통과 함께 시작됐다. 경인선은 1899년(광무 3) 9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의해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33.2㎞ 구간의 개통을 시작으로 1900년 8월 한강철교를 개통하면서 남대문역까지 노선을 운행하게 됐다. 이 구간의 개통과 함께 1900년 염천교 아래에 10평짜리 목조건물인 남대문 정거장을 세운 것이 경성역의 시초가 된다.

1900년 경성역으로 문을 열었으나 1905년 남대문역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1923년 다시 경성역으로 바뀌었다. 1925년 역사가 준공됐다. 1946년 광복 1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명칭인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기로 한 서울시 헌장이 공포됐고 이에 따라 같은 해 11월 1일부터 서울역이라 불렀다.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조에 붉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외장을 마감했다. 입면의 중요 부분과 1층부, 상부 모서리와 출구부 등을 화강석으로 처리했다. 때문에 외형이 도식적이고 권위적인 형태이지만 지금은 주변 환경으로 인해 그런 권위적인 이미지가 묻혀버린 상황이다. 지붕은 철골조에 천연 슬레이트 마감으로 일부 동판 이음을 했으며 전면 중앙의 지붕에 비잔틴풍의 돔을 올린 다음 측면으로 반원아치창을 내어 1층 대합실 중앙 홀에 자연광선을 끌어들여 내부를 밝힐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역사의 중앙 홀은 천장에 화려한 봉황 문양이 장식돼 있고 장대한 화강석 기둥이 내부를 받치고 있는 웅장한 모습이다.

서울역사는 원래 1층은 대합실, 2층은 귀빈실과 식당, 지하는 역무실로 사용하고 승강장은 지하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늘어나는 교통량에 따라 1969년에는 서부 역사가 준공됐고 1974년 서울역 지하전철이 개통됐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여객 편의와 역사의 현대화 계획에 따라 민간자본이 투입된 민자역사로 거듭났다.

그러나 한 해 동안 대략 2,400만 명이 이용한다는 이곳은 2003년 12월 역사 남쪽 100m 지점에 고속철도 역사가 완공되면서 그 기능이 이전되고 2011년부터 ‘문화역서울284’란 복합문화공간이 됐다. 284는 건축물의 사적번호다.

답사팀은 서울역 광장에서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 ‘서울로7017’에 올랐다. 서울로7017은 1970년에 지어 2017년 보행길로 재탄생했다는 의미를 가진 숫자다. 총길이 1.24Km 고가 보행로는 ‘중림만리동, 소공동, 명동, 남산 코스, 후암동 코스 등 주변 5개 지역과 걸어서 갈 수 있도록 설계됐다.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중림동을 핫플레이스로 뜨게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답사팀은 서울로7017 길을 따라 걸으며 서울스퀘어와 남대문교회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서울스퀘어·남대문교회 현대건축 상징성 지녀

서울스퀘어는 이번 답사의 해설 포인트인 근대건축은 아니지만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다. 1973년 대우그룹이 사들여 77년 지하 2층 지상 23층 건물로 완공했다. 당시로서는 서울서 가장 넓은 연면적을 자랑했다. 대우그룹 본사가 있던 건물은 대우가 해체되고 2006년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주인이 바뀌었다.

대우건설 인수에 무리수를 뒀던 금호그룹은 결국 ‘승자의 저주’가 됐다. 주인은 다시 모건스탠리 부동산 운용부분에 매각됐고 2009년 서울스퀘어란 이름을 달고 재개관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모건스탠리는 건물을 싱가포르 계열 알파인베스트먼트에 손절 매각을 했다. 이를 NH투자증권이 사들였고 이를 다시 상장리츠인 NH프라임리츠, 삼성화재, 군인공제회, 농협중앙회 등 국내 기관투자가에게 매각하면서 주인이 다섯 차례 바뀌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빌딩으로 남았다.

서울스퀘어와 힐튼호텔 사이 뾰족한 첨탑을 인상적인 남대문교회는 고려대 본관을 설계한 건축가 박동진의 작품으로 고딕양식의 석조건물이다. 원래 교회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현 교회당은 1969년 새로 지어졌다. 교회건축물은 고딕양식의 웅장한 석조 건축물로 건축사적 측면에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건축가 박동진(1899~1981)은 보성전문학교 본관(현 고려대 본관), 영락교회, 조선일보 사옥, 아서원, 오산중학교, 중앙중학교 등을 지었다. 그의 작품은 ‘근대 합리주의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석조 고딕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멀리 단암빌딩이 보인다. 옛 도큐호텔이다. 현대건축의 거장이라고 일컫는 김중업이 설계했다. 숭례문 바로 곁, 남대문로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자락에 있는 고층 건물이다. 1956년 프랑스에서 서울로 돌아온 그는 김중업건축연구소를 개소해 주한프랑스대사관, 부산대학교 본관(현 인문관) 등을 설계한다. 중소기업은행 본점, 갱생보호회관(현 안국빌딩), 삼일빌딩 같은 서울 도심 빌딩들을 설계해 우리나라 고층 건물 시대를 열었다.

구 도큐호텔 단암빌딩은 김중업이 1968년 설계하고 현대건설이 시공해 1971년 사업을 시작했다. 호텔로 지어져 오랫동안 쓰였기에 남대문시장 상인 중에는 아직도 이곳을 도큐호텔로 부르는 이들이 있다. 인도까지 뻗은 웅장한 캔틸레버 캐노피와 그 아래 넓은 계단이 특징적인 입구에 두 개의 회전문이 있다.

1층에 상가가 있고 2층부터 26층은 모두 똑같이 생긴 사무실 층으로 단순한 구성이다. 최초 설계에서 김중업은 단 2개의 기둥으로 89미터에 이르는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캔틸레버 구조를 계획했으나 당시의 시공 기술로 이를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사방에 8개의 기둥을, 각 면마다 2개씩 건물을 둘러 가며 배치하는 구조로 바꾸었는데 정방형의 간결한 건물에서 강렬한 디자인 요소가 된다. 그러나 서산부인과 건축과 주한프랑스 대사관에서 보여줬던 김중업의 관능적 곡선미는 보이지 않는다.

김중업이 설계한 유유제약 안양공장(현 김중업건축박물관)에도 바깥에서 건물 몸체를 붙잡고 서 있는 노출된 세로 기둥을 볼 수 있는데 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7개의 엘리베이터와 계단, 화장실, 닥트 등이 위치한 코어가 중앙에 있는 정방형의 평면이다. 외부의 기둥이 구조를 모두 담당하므로 사무실 내부에는 기둥과 벽이 없이 넓다.

단암빌딩은 2018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단행했다. 빌딩 밖으로 ‘정초定礎1968.5.15’라는 머릿돌이 보인다. 건물의 입면을 단순화한 그림을 건물의 공식 로고로 쓰고 있는데 바로 밑에 ‘since 1970’이라고 병기했다. 준공 당시 만든 건축모형을 로비 한 쪽에 전시해놓았다. 건축도면도 보관하고 있다.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건축주가 건물에 갖는 자부심과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본정 입구 일제하 금융·소비 건축물 즐비

신세계백화점 본관(좌)과 신세계가 사들인 SC제일은행 제일지점. 일제 강점기에는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과 조선저축은행이었다.
신세계백화점 본관(좌)과 신세계가 사들인 SC제일은행 제일지점. 일제 강점기에는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과 조선저축은행이었다.

남대문로는 일본의 경제적 침탈 본거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신세계백화점 옆 건물인 SC제일은행에는 조선저축은행, 한국은행 소공별관 자리는 조선상업은행, 롯데 애비뉴엘에는 조선신탁주식회사, 식산은행(롯데백화점), 동양척식회사 등을 비롯해 경성취인소, 대한천일은행 등을 은행과 주식관련 기관이 밀집했던 금융 1번지였다.

또 각종 백화점들이 즐비한 소비의 도시이기도 하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은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으로 문을 열었다. 국가기록원이 인정한 국내 최초의 백화점이다. 1930년 10월 20일이 개점일이다. 일제강점기 미츠코시 경성점 때부터 내려온 국내에 현존하는 백화점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런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기에 2000년대 초엔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 등록을 권하기도 했지만 신세계 측이 거절했다. 2005년에는 뒤쪽에 신관 건물을 새로 올리고, 2007년에는 본관 건물을 한층 증축했다.

바로 옆 SC제일은행 제일지점 건물(전 조선저축은행)을 매입해 건축물 용도전환을 신청해 업무시설에서 판매건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건물은 제2 명품관으로 하이엔드 시계, 쥬얼리 브랜드 위주로 전환될 예정이라고 한다. 건물 앞 쪽 분수도 해체하고 다시 만들어 분수광장을 조성해 서울시에 기부채납 하고 레스케이프 호텔, 메사빌딩 등과 함께 이 주변을 신세계 타운으로 재편하는 중이다.

1989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제일은행의 전신은 1929년 7월 1일 설립된 조선저축은행으로서 은행의 본점건물 신축계획은 1931년부터 세워졌다. 1935년 지하 1층, 지상 5층(중 2층 별도) 규모의 네오바로크적 외관을 보여 주는 건축물로 완공됐다.

내부구조는 철골과 철근을 혼합하여 사용하고 외부는 벽돌쌓기 위에 세밀하고 장중해 보이는 화강석으로 마감했다. 외관은 벽돌조의 막벽(물이 닿는 부분의 돌)으로 둘렀고, 전면만은 우리나라에서 캐낸 화강석을 붙여 마감했다.

또한 전면의 중후한 붙임 석조기둥을 처마 부분까지 곧추 세워 올렸는데, 그 기둥에는 선을 새겨 넣음으로써 단조로움을 깼다. 처마 부분에는 5개의 원판석을 붙여 간살을 암시하는 구실을 하게 하였으며, 양 끝의 대형면은 수직창 3개씩을 두어 건물의 전체적인 상승감을 극대화시켰다.

광복 후인 1946년 제일은행은 특수은행에서 일반은행으로 전환했고 6·25 후 한때 한국은행에 건물을 빌려주기도 하였으나 1958년부터 다시 본점으로 재사용했다. 그 후 1987년 10월 5일 종로구 공평동에 본점을 신축하고 이전했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은 이 건물은 1907년에 착공돼 1909년 정초 후, 1912년에 조선은행 본점으로 준공된 은행건물로 광복 후 1950년에 한국은행 본관이 됐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경제 수탈을 위해 일본이 세운 중앙은행이다. 정초석에 이토 히로부미 글씨로 확인되는 ‘定礎 隆熙三年七月十一日’ 기록이 남아있다.

지하1층 지상3층의 철골 콘크리트 구조로 외벽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붙였다. 일본인이 설계했고 한국전쟁 때 내부가 불에 타서 1956년에 보수했다. 그 후 1987년 신관을 건물의 뒤쪽에 건립하고 이 건물은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고풍스런 외관의 명치좌·경성전기 사옥

고풍스런 외관의 명치좌·경성전기 사옥은 현재 명동예술극장과 서울 남대문로 한국전력공사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풍스런 외관의 명치좌·경성전기 사옥은 현재 명동예술극장과 서울 남대문로 한국전력공사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

답사팀은 명동입구로 들어섰다. 옛 코스모스 백화점이 있었다는 장소에 도달했다. 코스모스 백화점이 영업을 시작한 때는 1970년. 롯데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까지 명실상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대형마트 등지로 사람이 몰린 나머지 동네 상권이 맥을 못 추듯 일대에 보다 큰 규모의 백화점들이 등장하자 그 길로 경쟁력을 잃고야 말았다.

유네스코회관 빌딩은 옥상에서 양봉을 한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다. 건물 바로 앞에는 배우 최불암 씨의 어머니가 운영했다는 은성주점의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놓여 있었다. 나석주 열사의 앙다문 입술이 돋보이는 조각상 앞에 섰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자리다. 이 곳에서는 김수근의 오양빌딩과 김중업의 기업은행 본관 건축을 감상할 수 있다.

명동길 한 가운데는 명동예술극장(구 명치좌)가 고색창연한 색을 띠고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으로 지금은 장충동으로 이전한 옛 명동 국립극장을 복원한 연극 전문공연장이다. 명동예술극장은 1936년에 개관해 1973년까지 영화관, 공연장, 예술극장 등으로 활용되면서 우리나라 근현대 공연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옛 명치좌 시절에는 일본인을 위한 위락시설로 활용되었으며 주로 일본 영화를 상영한 것으로 알려진다. 명동예술극장은 명치좌 시절의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을 보존하기 위해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 두고 내부만 리모델링했다. 총 5층 건물에 지하1층은 연습실, 2·3·4층은 공연장, 5층은 사무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객석수는 총 558석 규모이다.

서울 남대문로 한국전력공사 사옥은 등록문화재 제1호다. 시초는 1928년 12월 준공된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이다. 경성전기는 1898년 설립된 한성전기회사의 후신으로 1961년 조선전업주식회사, 남선전기와 함께 한국전력주식회사(현 한국전력공사)로 통합된 바 있다.

서울 도심부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무실 건물로 의미가 있다. 1961년 출범한 한국전력의 본사로 사용되었고, 1991년부터는 한국전력공사의 서울본부 사옥이 됐다. 건립 당시 지하 1층·지상 5층 규모였다가 1965년 2개 층을 증축했다. 한국 최초로 화재와 지진에 잘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엘리베이터와 유리블록 등이 설치됐다.

합리주의·기능주의를 중시하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한 건축가 집단인 시카고파의 건축양식에 르네상스 건축의 장식적 요소를 접목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건물 기초부·구조부·지붕부, 내외장 마감 등의 보존관리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2020년 3월 문화재 복원 및 재생사업을 통하여 재정비됐다. 한국의 대표적 근대 건축물로서 역사·문화적,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2월 28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오양빌딩·기업銀 본점 등 현대 건축도 볼만

오양빌딩은 서울시 중구 명동9길 구 외환은행 본점 옆에 준공된 지상 6층짜리 건물로 지금은 쌍용빌딩이라 부른다. 건축가 김수근 작품이다.
오양빌딩은 서울시 중구 명동9길 구 외환은행 본점 옆에 준공된 지상 6층짜리 건물로 지금은 쌍용빌딩이라 부른다. 건축가 김수근 작품이다.

답사팀은 명동교자에서 식사를 하고 답사를 이어갔다. 을지로 입구에 있는 오양빌딩(현 쌍용빌딩)은 복잡한 명동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오양빌딩은 서울시 중구 명동9길 구 외환은행 본점 옆에 준공된 지상 6층의 건물로 지금은 쌍용빌딩이라고 한다.

오양빌딩은 김수근이 1962년에 설계하고 1964년 완공시킨 건물이다. 건물 전면이 도자기로 장식돼 있고 노출 콘크리트 기법을 사용했다. 도자기 장식은 화가, 서양화가, 판화가, 도예가로 활동한 현대 미술가 정규(1923-1971)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외벽에 한국의 도자기와 소품 등 한국적 전통을 살린 예술성이 담겨 있으며 콘크리트의 질감과 도조 장식에 의해 예술적 가치가 돋보이는 건축물로 명동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노출 콘크리트 양식은 1960년대에 김수근이 제작한 작품의 특징으로 당시의 근대 건축물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노출 콘크리트 작품들은 그의 스승인 요시무라 준죠(일본)와 르 코르뷔지에(프랑스),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미국)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오양빌딩은 지하 1층과 지상 6층으로 구성돼 있다. 빌딩 관리는 재단법인 일주학술문화재단에서 하고 있다. 오양빌딩은 1960년대 한국의 건축 양식을 알 수 있는 건축물임과 동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한국 전통과 서양건축을 접목시켜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중소기업은행 본점은 ‘을지로 2가 16-17지구 재개발 사업’으로 들어선 3개 건물 동(棟) 중 하나다. 1층 부분을 필로티로 처리해 전면의 을지로 거리와 후면의 장교마당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기법은 건물의 앞뒤를 활기찬 공간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을지로와 중앙광장 사이의 보행자 동선을 연결시켜 은행으로 사람들을 흡입하도록 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지하층 부분에는 김중업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보이듯 연못이 딸린 정원이 만들어져 있다.

건물은 동서로 긴 대지 여건으로 인해 길어진 평면의 양측에 코어를 뒀다. 이를 통해 사무공간의 유효면적이 증대되도록 했다. 또 1층에 넓은 로비는 은행을 찾는 고객에게 친근함과 개방감을 갖도록 했다. 건물의 외관은 선돌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있다. 멀리서도 매우 굳건하고 당당하게 서있는 느낌을 준다. 최상층 부분을 경사지게 처리한 것은 김중업의 건축 특징 중 하나다. 전통건축의 지붕 일부분을 연상시킨다.

특히 파란색 계통의 커튼월 유리면과 검은 색 알루미늄 패널 마감은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주면서 각인효과를 가져온다. 특히 12층 부분을 투명한 서스펜디드 글라스로 개방해 변화를 주는 외장을 시도했다. 지하 4층, 지상 20층 규모이며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와 무량판 구조다.

이 건물의 평면은 르 코르비지에가 1930년대에 파리에 설계한 ‘구세군회관’ 평면과 매우 유사하다. 삼각형의 뾰쪽한 끝이 건물 양쪽에 나있고 여기에 각종 동선시설들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단면에서 볼 때 건물 상부를 경사지게 하였는데 이런 형태는 그가 이전에 설계한 여러 프로젝트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아나백화점’, ‘아나아트센터’는 이런 단면 모양이 실현된 대표적인 예다.

이오니아식·바로크 절충식 광통관

우리은행 종로지점으로 사용되고 있는 광통관.
우리은행 종로지점으로 사용되고 있는 광통관.

2층 양옥의 근대적 건물로 1908년 2월에 착공, 1909년 5월에 준공했다. 벽돌과 석재를 혼합해 사용한 이 건물은 이오니아 양식의 벽기둥이 전면에 배치되고 건물 양 날개 부분에 바로크풍의 돔 등이 설치됐다.

1914년 2월 화재로 소실돼 1915년에 복구되면서 박공과 기둥 양식, 돔 등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형됐다. 이 건물은 탁지부 건축소가 설계한 건물 가운데 가장 정교한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02년 3월 5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됐다. 우리은행에서 소유, 관리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점포의 하나이며, 우리은행 종로지점으로 쓰인다.

대한제국 때 탁지부 건축소에서 세운 이 건물은 민족자본 계열의 천일은행과 어음조합의 사무소, 일본 상공인들의 집회소 등으로 사용됐다. 가까운 곳에 광통교가 있어 광통관이라고 불렀다. 한편 계속 이어진 2층 한옥 답사의 답사기를 후속으로 나눠 싣기로 한다.

마지막 남은 남대문로 2층 한옥상가

남대문로 2층 한옥상가 앞에서 답사팀에게 설명하고 있는 김태휘 해설사.
남대문로 2층 한옥상가 앞에서 답사팀에게 설명하고 있는 김태휘 해설사.

서울 남대문로에 건설된 일제강점기의 전형적 벽돌조 한옥 상가다. 현재 서울 시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당시 남대문로 상업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역사적 의미와 건축적 가치가 있어서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62호로 등록됐다. 1910년대 만들어진 벽돌조 한양(韓洋) 절충식 건물로 전통적인 단층 목조 건축 양식에서 벗어난 벽돌조란 특징을 갖는다.

1900~1910년대 서울 남대문로를 중심으로 종로 등 주요 간선도로 변에는 한양절충식 한옥상가가 2층으로 연이어져 건립되는 붐이 있었다. 당시까지는 단층 건물이 주류였던 상황에 2층 건물들이 연이어 지어졌다. 목조가구식 구조의 전통에서 벽돌(주로 전돌) 조적식 건축으로 바뀌었으며 지붕은 전통적 지붕틀에서 탈피해 서양식 목조 트러스를 설치했다.

상업건물이 주였으므로 외부에는 출입문, 창문 등에 목재틀과 난간 등이 설치되었는데 장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문양들이 채택됐다. 지금은 리모델리 후 카페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은 흥국생명이 소유하고 있다.

답사팀은 광통관을 지나 종로 쪽으로 접어들어 조계사 건너편에 멈춰 섰다. 이곳은 2층 한옥이 무관심 속에 멸실 위기에 처한 곳이다. 종로구 우정국로 32에 위치한 인간문화재 죽파 권영진 선생의 대흥당필방이 들어서 있는 2층 한옥이다. 청송화랑 건물로 더 잘 알려 있지만 지금은 공사용 장막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건축물 상태평가 결과 안전등급이 ‘D’가 나왔다. 주요 부재 결함이 발생해 보강 수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특히 변위변형이 ‘E’등급을 받는 등 훼손 정도 심한 상황이다. 공사 장막 안을 들여다보니 서까래가 파손돼 내려앉기 일보직전이다.

건물주 입장에서는 부수고 다시 지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 곳이다. 몇 채 남지 않은 2층 한옥이란 것을 주지한다면 쉽게 결정 내릴 부분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2층 한옥에 대한 가치가 남대문로 한옥상가 한 채 정도에 그침에 따라 서서히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부분이다.

서울 사대문안 2층 한옥은 도시문화유산의 한 유형으로 근대 시기의 건조물로 주목받고 있지만 보호받지 못하면서 변형이 심하고 멸실 위기에 처해있는 실정이다. 다른 근대건축물 역시 중요성에 대한 공론화에도 불구하고 시장 경제 논리 앞에 무기력하게 철거되는 경우가 허다한 상황에서 근대건축물로써 가치와 매력도가 떨어지는 2층 한옥은 멸실 속도가 빠를 것으로 예상된다.

명동성당, 서울역사 등은 문화재로 지정되는 반면 화신백화점, 대한증권거래소 등은 보존 논의에도 불구하고 철거되는 등 근대문화유산에 보전·관리·활용에 대한 고민이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김 해설사는 답사팀을 조계사 경내로 이끌고 들어가 한참을 한옥건축에 대해 설명했다. 2층 한옥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초 지식을 알려준 것이다.

무관심 속에 사라지는 2층 한옥

조계사 건너편 대흥당필방이 들어서 있는 2층 한옥은 건물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어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다. 보수를 통한 보존이냐, 멸실이냐 기로에 놓인 것이다.
조계사 건너편 대흥당필방이 들어서 있는 2층 한옥은 건물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어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다. 보수를 통한 보존이냐, 멸실이냐 기로에 놓인 것이다.

조계사 후문을 통해 일본대사관을 지나 서울지방경찰청 쪽으로 향했다. 1918년에 지었다는 가장 오래된 2층 한옥을 보기 위해서다. 지금은 ‘마초’라는 식당이 들어서 있다. 외관상 점포병용 2층 한옥 형태로 보인다. 이들 점포병용은 주로 종로구에 많이 분포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경복궁과 창덕궁의 주변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점은 그 당시 상권이 일인과 한인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한인들이 많이 살던 북촌지역이 주로 한인들의 상권이었기 때문이다. 점포병용 2층 한옥은 상점이라는 특성상 간선도로나 도로변에 주로 다른 상점들과 함께 위치하고 있었다. 삼선동이나 옥인동처럼 가로변을 따라 거의 같은 외관과 평면을 가진 점포병용 2층 한옥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점이 주거전용 2층 한옥과는 다른 점이다.

점포병용 2층 한옥은 1935년 이전에는 기존에 있던 주택의 길 쪽에 점포만 덧대어 지은 형태가 많았으나 1935년~1950년에는 ‘一자형’ 평면으로 도로의 일면에 2층 상가를 구성하고 그 후면에 ㄱ자로 살림채를 배치하는 일률적인 모습을 보인다.

점포병용 2층 한옥은 대부분 점포가 있는 부분을 2층으로 올리므로 도로에 면한 곳에 2층이 된다. 주거전용 2층 한옥은 도로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2층의 위치를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지만, 점포병용 2층 한옥만큼 도로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행랑채 부분이나 안채의 일부, 1층과 비슷하거나 같은 면적으로 2층을 올리기도 하는 등 점포병용 한옥보다는 2층의 위치나 규모에 있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점포병용 2층 한옥은 1층과 2층의 진입에 있어서 외부에서 따로 1, 2층으로의 독립된 출입구가 있는 것은 주거전용 2층 한옥의 대부분이 대문간이나 마당에서 2층으로 진입하는 것에 비교할 때, 상점이 가진 개방적인 특성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서촌 자하문로 큰길가 점포병용 2층 한옥에서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답사지인 우리집과 킴스부띠끄는 2층 한옥이 연이어 있는 특이한 사례다. 대지면적은 72.7㎡으로 1층 면적은 44.43㎡, 2층 면적은 19.83㎡로 배면 쪽에는 2층이 없고 도로에서 바라봤을 때는 곧게 선 2층 한옥이다. 과거와 많이 변한 것은 첫째 외부 마감의 차이다. 본래 벽돌 등의 마감 없이 목재가 노출된 것을 도면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현재 정면에서는 나무 기둥을 찾아볼 수 없다.

둘째는 개구부의 위치 및 크기의 차이점이다. 출입문부터 창문까지 재료 및 입면이 변화된 점은 가옥의 평면까지 변형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009년 모아분식에서 2014년경 우리집으로 업종이 바뀌면서 외부 입면도 변화가 있었다. 기존에 있던 붉은 벽돌에는 부분적으로 흰색 페인트를 도색했고 판매대는 목재로 막았다. 분식점 출입구는 전면 유리창으로 변경했으며 출입구도 평면을 바뀌었다.

킴스부띠끄는 필운대로에서 수성동계곡으로 가는 옥인길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우리집 우측(동편)에 있다. 대지면적은 62.8㎡으로 2층 한옥의 1층과 2층의 면적은 13.65㎡이며, 2층 한옥 뒤쪽으로 23.14㎡의 목조 주택이 있다. 우리집과 같이 배면에는 2층이 없고 도로에서 바라봤을 때 곧게 선 2층 한옥 유형이다.

‘도시문화유산으로서 2층 한옥의 보호방안 연구’ 연구자 정윤재 씨는 “2층 한옥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도시문화유산의 중요 거점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더 이상 노후화되기 전에 도시문화유산으로서 보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문화유산으로서 보호를 할 경우 거주자는 일정 부분의 인센티브를 가질 수 있도록 하여 건물의 멸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태휘 해설사는 “이번 답사준비와 실행을 통해 2층 한옥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가급적 개발논리에 밀려 무조건적 멸실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이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참고문헌>
-서울역사(답사여행의 길잡이 15-서울, 200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도시문화유산으로서 2층 한옥의 보호방안 연구, 정윤재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2016
-1920년대~1950년대 서울지역에 지어진 주거용 2층 한옥에 관한 연구, 김연주 명지대학교 대학원, 2002
-한때 서울의 랜드마크·연극의 산실을 가다, 미디어파인, 2021, 문화지평
-을지로 통에 남겨진 김중업·김수근의 흔적, 미디어파인, 2021, 문화지평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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