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수행했다.
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 역사문화와 인문학 분야 디지털 아카이브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은 지난해에 이어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올 사업 주제는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다.

첫 번째 답사로 지난 7월 24일 정동 일대를 답사했다. 정동 지역은 흔히 근대 건축물의 ‘보물창고’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시대별, 양식별, 역사적으로 많은 근대건축물들이 지어졌고 잘 보존된 공간이다. 과거에는 중구청 주관 ‘정동야행’이란 특별한 축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틈에 문화지평이 근대건축 테마답사를 정동야행에 접목했다.

정동 일대 주간, 야간 경관을 아울러 돌아볼 수 있도록 오후 4시 원구단에서 답사를 시작했다. 답사 해설은 김태휘 해설사가 맡았다. 김 해설사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조경학 박사를 마치고 돌아와 건축문화와 역사문화에 대한 해설을 하는 인문학자다.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생태와 건축, 역사 분야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문화유산아카데미, 전국역사지도사모임 대표이며 표석시리즈로 책자로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에 이어 표석시리즈 네 번째인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걷다’를 펴냈다.

조선의 시작과 끝이 있는 공간 ‘정동’

정동야행 답사팀이 원구단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정동야행 답사팀이 원구단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정동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묘가 있었기에 붙은 지명이다. 서울시 중구에 있는 동으로 행정상으로 소공동에 속한다. 이곳은 신문로·태평로·서소문 등에 둘러싸여 있으며 면적은 30만㎡, 인구는 400여 명이 거주하는 아주 작은 동이다.

정동은 이씨 조선 왕조의 시작과 끝이 있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4년 뒤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가 세상을 뜨자 정동에 묘를 조성했다. 애틋함이 과해서 사대문 안에 묘를 쓰지 말라는 국법에 반하면서까지 묘를 쓴 탓에 오늘날 정동이란 이름이 남았다.

명성황후 살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과 1년 만인 1896년 덕수궁 환궁, 이듬해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등 일련의 굵직한 사건이 휘몰아친 공간이다. 고종이 개화를 추진하자 서구 열강들이 이곳 주변에 앞 다퉈 공사관을 설치하면서 뜨거운 외교 각축장이 됐다.

구한말 정치의 1번지 정동은 서구 열강은 물론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곳이다. 그 때 들어섰던 각국 공사관과 교육기관, 종교건축물 등 다양한 형태의 고풍스런 근대 건축물이 잘 보존돼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덩달아 외국 선교사들은 안전과 편의를 위해 자국 영사관과 가까운 곳에 학교와 의료기관, 종교시설을 세웠다. 또 외국인 방문객이 늘면서 호텔도 들어서는 등 신문물이 가장 빨리 선보인 곳이기도 하다.

훼손된 원구단에 남은 황궁우와 석고

황궁우 삼문과 석고.
황궁우 삼문과 석고.

정동 지역을 답사하기 위해 환구단에서 오후 6시 느지막이 집합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고종은 1897년 10월 11일 새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했다. 고종 34년(1897) 조선은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10월 12일 새로 마련된 환구단에서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행한 후 고종은 황제에 올랐다. 왕후 민씨는 황후로, 왕태자는 황태자로 책봉했다. 의정부 의정 심순택을 비롯한 백관들은 처음으로 만세 삼창을 하며 축하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2월 일대가 총독부 소유가 되면서 일제는 1913년 환구단을 헐고 조선총독부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을 지었다. 해체해서 나온 부재는 이곳저곳에 팔아 고의적으로 훼손했다. 환구단 정문은 조선호텔 정문이 됐다가 1967년 조선호텔이 신축되고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이듬해 해체되고 1969년 5월 어디론가 팔려갔다.

답사팀 뒤쪽 환구단 정문은 일제시대 때 매각됐다가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호텔 정문으로 밝혀져 2009년 지금 자리로 이전 복원됐다.
답사팀 뒤쪽 환구단 정문은 일제시대 때 매각됐다가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호텔 정문으로 밝혀져 2009년 지금 자리로 이전 복원됐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 정문이 환구단 정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9년 지금 자리로 이전 복원됐다. 지금 남아 있는 팔각의 황궁우는 신위를 봉안하던 건물로 환구단의 북쪽 모퉁이에 해당한다. 그 앞에 있는 석고는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해 세운 석조물로 전각인 석고전 안에 돌북이 누워 있었지만 지금은 자리를 옮긴 채 서 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다. 화강암 기단 위에 돌난간을 둘렀다. 건물 1·2층은 통층구조로 중앙에는 태조 신위를 봉안했다. 건물은 익공계로 청나라 영향을 받은 듯 복잡하게 장식돼 있다. 사래 끝에는 조선시대 궁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청동 토수들을 끼워 넣었다. 황궁우의 삼문은 세 개의 아치로 구성돼 있다. 문 앞을 장식한 석조 계단은 궁궐의 월대를 장식하고 있는 답도와 형태가 비슷하다. 건물의 위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식이다.

옛 세실극장이 이고 선 정동 명물 세실마루

세실마루에서 쳐다 본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세실마루에서 쳐다 본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답사팀은 세실마루로 이동했다. 세실마루는 옛 세실극장 옥상을 개방해 만든 문화공간이다. 세실극장은 1976년에 건립된 소극장으로 대학로가 만들어지기 전 1970~80년대 연극 메카였다. 건축가 김중업의 1970년대 작품 가운데 하나로 보존 가치가 높아서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세실극장을 설계한 김중업은 김수근과 함께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로 삼일빌딩, 프랑스대사관, 드라마센터 등을 남겼다.

세실극장은 당시 320석 규모로 개관했다. 세실이란 이름은 일제강점기 대한성공회 4대 주교였던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에서 따왔다. 세실극장 옆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이 있다. 이 건물은 긴 십자형 평면으로 한국 로마네스크양식 교회건축을 대표하면서 고딕양식의 명동성당과 쌍벽을 이루는 성당건축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 해설사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 교회 건축물은 하늘에서 보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주교좌성당은 크게 두 번의 공사에 걸쳐 완성됐다. 1910년에 건축을 결의한 후 1922년에 착공했고 1926년 5월2일에 축성했다. 3대 주교 마크 트롤로프의 10년간 구상과 모금에 힘입은 그의 마지막 산물이다. 설계자는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회원인 아더 딕슨, 감독자는 레슬리 브룩스였다.

원 설계도에는 하나의 성가대석, 7개 주간의 신도석과 통로, 양 날개부로 설계됐다. 그러나 20년대 준공 당시는 3개 주간의 신도석과 통로부, 양 날개부 일부, 지하 현실(玄室)만 건립됐다. 전체적으로 원 설계도의 50% 정도였다.

1991년 성공회 성당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을 증축하고자 했으나 설계도가 없었다. 1993년 한 영국 관광객이 그가 근무하는 렉싱톤도서관에 보관된 아더 딕슨의 원 설계도를 극적으로 찾아냈다. 원 설계도에 따라서 두 번째 공사(1994~1996년)는 광장건축의 건축가 김원이 실시설계를 했고 대우건설이 시공했다.

서울에서 보기 드문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면서도 한국적 정서의 처마장식, 기와지붕 등을 적용한 아름다운 건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주교좌성당에 대한 해설사들의 해설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한국적 건축미’의 가미다. 기와지붕과 처마장식, 창살, 심지어 스테인드글라스 오방색까지 끌어 온다. 3대 주교 트롤로프와 성공회 건축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에 따르면 정통적인 서양건축양식의 소개와 교회 건축의 토착화라고 평가했다.

붉은벽돌 건축물군(群) 제2의 대학로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에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가는 길가는 붉은 벽돌 건물이 많이 제2의 대학로 같은 분위기다.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에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가는 길가는 붉은 벽돌 건물이 많이 제2의 대학로 같은 분위기다.

세실마루에서 내려와 답사팀은 성공회주교좌성당 뒤편에 있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건물 앞에 섰다. 연말연시면 어김없이 지하철역이나 번화가에 등장하는 ‘사랑의 열매’ 모금함을 운용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소유의 이 건축물은 김수근이 설계한 정동빌딩이다.

위에서 보면 4각형에 가까운 5각형으로 각 꼭짓점에 적벽돌 원기둥(샤프트)이 세워져 있고 각 변에는 알루미늄 캐스트를 사용해 유리창을 모듈처럼 끼워 넣었다. 1970년대 말에 김수근의 건축 특성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철거돼 볼 수 없는 대한지방행정회관(1979, 마포구 공덕동)도 같은 알루미늄 캐스트 모듈을 사용했다.

공간건축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태평로 주변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변색 벽돌 치장의 특수기능을 유치한 건물로서 각 코너마다 원통형의 구조에 계단 등 설비기능을 부여했으며, 원통형의 수직적인 벽들의 무거움을 덜어주기 위해 알루미늄 캐스트를 사용, 수평적인 요소를 가미한 조형으로 단순화했다’고 적고 있다.

정동빌딩이 있는 이 길은 붉은 벽돌 건물로 채워져 있다. 정동빌딩 옆에 있는 조선일보미술관(1988)은 건축가 윤승중이 설계한 건물이다. 이곳에는 1922년 지어진 정동제일예배당이 있었다. 1946년부터 덕수교회로 불리다가 1980년대 초 이곳을 떠나 성북동으로 이전했다.

조선일보미술관 옆 성공회 성가수녀원은 한옥을 제외한 부분을 건축가 김원이 1990년 설계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훗날 설계도가 발견된 성공회주교좌성당의 증축을 맡았던 건축가다. 윤승중과 김원은 공교롭게도 김수근의 제자들이다. 이 지역 일대는 김수근 군단이 지은 붉은 벽동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마치 제2의 대학로 같단 느낌이다.

구세군중앙회관, 신고전주의 충실 좌우대칭 조화

1928년 지은 구세군중앙회관은 벽돌조 지상 2층으로 구세군사관학교, 구세군중앙회관을 거쳐 불리다가 현재는 ‘정동1928아트센터’가 됐다.
1928년 지은 구세군중앙회관은 벽돌조 지상 2층으로 구세군사관학교, 구세군중앙회관을 거쳐 불리다가 현재는 ‘정동1928아트센터’가 됐다.

김 해설사는 답사팀을 사조빌딩, 선원전 터로 이끌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선원전 터 앞에 있는 구세군중앙회관은 한국 구세군의 본관으로 사용되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한국 구세군의 중흥기인 근대화 과정까지 한국 구세군의 혼과 정신이 뿌리 깊게 배어 있는 건물이다. 1928년 건립 당시부터 1989년까지는 구세군의 새로운 인력을 양성하는 구세군사관학교로 사용됐다. 1959년 1·2층 일부를 증축하고 강당 천장을 높이는 공사가 시행된 후 구세군 대한본영 사무실 일부가 입주하면서부터 구세군중앙회관으로 불리게 됐다.

지난 2006 2월 지정명칭을 ‘구세군본관’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건물의 공식적 이름이 되어온 ‘구세군중앙회관’으로 변경했다. 건립연대도 건물 신축 검토가 시작되는 1926년이 아니라 실제 준공연대인 1928년으로 변경했다.

좌우대칭으로 된 안정된 외관과 현관 앞에 배치된 거대한 기둥, 구세군사관학교가 명시되어 있는 정면 중앙 상부의 박공, 목조의 짜임 등 건물의 세밀한 부분이 조화를 이룬다. 벽돌조의 외관과 중앙 현관의 4개의 기둥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충실히 반영돼 있다는 평가다. 세부적으로 개조된 부분이 있고 건물 뒷면은 증축되었지만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현관의 4개의 기둥과 지붕이 당당한 인상을 주는 건물로, 현관 쪽의 바닥은 물갈기 슬래브이나 복도 및 계단 난간은 목조로 되어 있다. 1층은 사무실, 2층은 집회·예배당이 있었고 목조 트러스가 이색적인 아름다움이 보인다.

이 일대는 과거 모두 덕수궁 궁역이었다. 덕수궁은 현재보다 세배 정도는 더 넓었다. 선원전 터에 세워졌던 경기여고와 미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덕수초등학교, 중명전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일제는 1922년 덕수궁 선원전 터를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덕수초, 구세군교회 등이 있는 길이다. 낭만적인 궁궐 외각 길이 아니라 덕수궁 궁역을 둘로 갈라 놓은 것이다. 일제는 길을 내고 덕수궁 터를 분할 매각했다. 그 자리에 외국 공사관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덕수궁이 원형을 잃고 궐내 각사들이 산만하게 배치된 이유다.

중명전은 궁역 변화로 지금은 밖에 위치하게 됐다. 이 건축물은 원래 왕실 도서관 수옥헌이었다. 수옥헌은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면서 중명전이란 이름을 얻었다. 을사조약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중명전은 정관헌과 함께 소위 ‘베란다건축’으로 불린다. 열강들이 날이 더운 지역에 지은 건축 양식이라 ‘식민지건축’이라고도 한다. 동서남 방향으로 회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덕수궁 내부에 있는 정관헌 곳곳에는 궁 주인의 수복을 기원하는 상징물이 많았다. 정관헌 용도는 고종이 쉬거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다.

자유센터를 닮은 정동 작은형제회 수도원

정동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아담한 정동아파트 옆에는 적벽돌로 외관을 마감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을 만날 수 있다. 교육회관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이 건물 뒤에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있다. 교육회관을 지은 김원의 스승인 김수근이 설계해 1965년 준공된 건축물이다. 근대주의양식의 종교건축물로 60년대 중반 무렵 한국 근대주의 건축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평지 중의 옥상난간 장식, 수평 띠 창문 형태, 자유센터를 연상시키는 출입구 캐노피와 격자장식 등의 모습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돼 있다.

수도원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건축면적은 871.2㎡, 연면적은 3,474.93㎡이다. 준공 당시는 지상 3층 건물이었으나, 1986년의 공사를 통해 4층으로 증축했다. 이곳에는 한국관구의 각 행정사무실과 타 수도회나 교구의 내방객을 맞이하는 시설들이 입주해 있다.

60년대 김수근 작품경향 잘 담긴 경향신문 사옥

프란치스코 교육관과 수도원을 지나 강북삼성병원 앞 정동사거리 방향으로 오르면 길 끝에 경향신문 사옥이 나타난다. 이 자리는 한국의 첫 정교회 성당이 있던 곳이다. 고종황제가 1903년 주한러시아 공사관 직원에게 하사한 땅에 정교회가 처음 터를 잡았다.

아현동 마포형무소 소장 사택 자리로 떠난 정교회 터에 들어선 경향신문사는 1946년 천주교 서울교구 소유의 신문사로 처음 출범했다. 1962년 민간에게 소유권이 이전된 이후 기아산업, 한국문화방송(MBC), 한화그룹 등으로 여러 차례 경영권이 바뀌다가 1998년 사원주주회사로 독립했다.

옛 MBC정동사옥(현 경향신문)과 그 뒤편에 방송국 건물로 사용했던 정동빌딩은 김수근이 1967년 설계한 건축물이다. 두 건물 모두 1960~70년대 초반 그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경향을 담고 있다. 앞쪽 방송국건물은 지금은 경향신문 사옥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이 건물은 아래층은 방송국, 위층은 호텔로 사용하도록 설계돼 하층부와 상층부가 전혀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드러나는 김수근의 건축물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옛 방송국에서 사용했던 안테나를 남겨두고 있다. 뒤편에 있는 정동빌딩은 리모델링이 끝나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민간 최초 철근콘크리트 건물 ‘신아기념관‘

신아기념관은 1930년대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민간 최초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건축사적 의미가 있다.
신아기념관은 1930년대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민간 최초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건축사적 의미가 있다.

정동길 끝인 경향신문사까지 올라갔던 답사팀은 정동길을 되짚어 내려오다가 신아기념관 앞에 섰다. 이 건축물은 1930년대 건립된 것으로 신아일보사 별관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건축기법과 언론 통폐합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는 여러 업체들이 입주한 민간 사옥으로 이용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402호로 지정됐다.

신아기념관 건물이 처음 건립된 것은 1930년대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건물에는 일방향 장선 슬라브 구조 및 원형철근 등 일제강점기 건축기법이 잘 남아 있다. 외벽은 중국 상하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쌓았다. 민간 건축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지어진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의를 갖는다.

발걸음을 몇 발짝만 옮기면 이화박물관이 나온다. 이 건물은 심슨기념관으로 세워졌다. 미국인 사라 J. 심슨이 위탁한 기금으로 1915년에 건립된 것이다. 1922년에 증축을 한번 했다. 이후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가 1961년에 복구됐다. 남쪽 건물 외관은 처음 건축할 때의 모습으로 복원했고 뒷부분은 현대적인 외관으로 처리했다. 외벽을 붉은 벽돌로 지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근대 건물로 학교건축의 초창기 서양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2002년에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됐다.

1차 답사를 진행한 김 해설사는 “이번 답사 목적은 개항부터 1960년대까지 지은 근대건축물에 대한 다양한 건축학적, 역사적, 인문학적 접근과 관련 스토리텔링 개발을 통해 대도시 서울의 미래 건축문화 발전방향을 고민하는 것”이라며 “첫 번째 시간으로 근대 건축의 보고 정동 일대를 둘러봤다”고 마무리했다.

<참고문헌>
-한국 근대건축의 재조명,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부 교수, 建築士(Korean architects), 1988, pp.22 – 31
-근대건축물 활용을 통한 도시재생계획 비교분석 연구 : 서울특별시 정동과 명동일대를 중심으로, 조인성·오상묵·천득염·오세규, 2014, 대한건축학회연합논문집 Vol.16 No.1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재생을 통한 문화 공간 활성화 연구, 이소영·남경숙,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2011
-근대건축물의 등록문화재 등록 활성화 방안 연구: 재산권 제한에 대한 보전방안 중심으로, 최찬익·유주연, 2018, 감정평가학논집 Vol.17 No.3
- 중구청, 이화박물관, 위키백과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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