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역사] 문화지평이 지난해 ‘옛 물길‘에 이어 올해는 ’옛 전찻길‘을 따라 서울을 속속들이 톺아보고 있다. 그 일곱 번째 답사로 지난 6월 26일 영등포역 앞에서부터 노량진역을 지나 노들역까지 걸으면서 주변 역사문화, 수목생태, 산업관광 자원 등을 들여다봤다.

문화지평의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 7차 답사는 배건욱 역사문화해설사가 해설을 맡았다. 배 해설사는 서울KYC 공동대표를 지낸 역사문화 해설 전문가다. 한양도성길라잡이 백악구간을 담당하고 있다. 배 해설사는 이번 해설과 함께 6차 영등포선 해설을 담당했다.

영등포 등 도시외곽 발달로 경성부 인구 급증

영등포공원 오비맥주 담금솥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영등포공원 오비맥주 담금솥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1920년대 경성부의 인접지역에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36년 4월 경성부의 행정구역은 기존의 약 4배가량 넓어졌다. 경성부로 편입된 지역은 구 경성부 영역에서 동쪽으로 중랑천, 서쪽으로 홍제원천, 남쪽으로 이번에 답사를 한 영등포를 포함한 지역이었다.

경성부의 행정구역이 확장된 후 교통수요도 급증했다. 하지만 부내 교통은 교통시설의 부족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특히 통근·통학시간에 집중되는 교통수요는 교통난으로 이어졌고, 이 시간 동안 전차는 ‘지옥전차’가 되기 일쑤였다. 이미 1930년대 초부터 경성은 매우 혼잡한 상태였다. 주로 출·퇴근과 등·하교 시간이 되면 관청과 회사, 학교 등이 밀집한 곳에서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타는 전차가 아니라 매달리는 전차!’로 풍자하기도 했다. 전차의 혼잡은 당시 총독부의 부영버스 정책 때문이었다.

경성에 전차 이외의 대중교통 수단이 등장한 것은 1928년의 일이었다. 경성부에서 관할하는 부영버스의 등장은 전차의 독점 체제에 변화를 가져왔다. 전차와 버스의 경합이 시작된 것이다. 빠른 속도와 쉬운 노선 변경, 궤도의 불필요와 같은 장점을 갖춘 버스는 점차 전차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경성전기회사는 전차를 홍보하기 위해 각종 행사를 개최하는 등 승객 유치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러한 전차와 버스의 경합은 운수기관들의 불필요한 경쟁을 막자는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중단됐다. 이후 전차 사업을 담당했던 경성전기주식회사가 1933년에 버스 사업을 인수하면서 간선에는 전차가 지선에는 버스가 다니는 전차 중심의 교통체계를 만들었다.

한편 만원전차의 위험을 무릅쓰고 만원전차에 매달린 학생들이 전신주에 부딪쳐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고, 한강통에서도 만원전차에 매달려가던 사람이 길에 떨어져 다치기도 했다. 이처럼 통근·통학시간은 물론, 그 외의 시간에도 전차는 만원이 아닐 때가 없었다. 당시 교통난은 경성부의 확장과 인구 증가로 통근·통학 인구가 늘어난데 비해, 교통시설이 부족해서 발생한 도시문제였다.

1930년대 들어 경성의 교통상황이 나빠지면서 전차는 늘 만원이었다. 러시아워에는 '송곳 한개 꽂을 데 없을 만큼 대만원'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사람들의 불만이 속출하자 경성부와 사업을 담당하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는 교통난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대책을 내놓았다. 만원전차라는 이름을 얻은 만큼, 전차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경성사람뿐 아니라 경성에 올라온 지방사람들도 있었고, 어른부터 아이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경성에 처음 온 사람들에 게 여전히 전차는 신기한 문물이었다. 전차는 경성과 부산, 평양의 세 도시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성역에 도착해 가장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로 전차 탑승이 꼽히기도 했다. 반면 경성사람들에게 전차는 일상으로, 주로 학생과 회사원들이 등하교와 출퇴근을 위해 전차를 이용했다.

전차는 경성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하였다. 지금의 풍경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런 가운데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휘발유가 군수물자로 지정돼 보급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전차가 경성부민의 이동을 오롯이 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차의 ‘급행화’ 방안이 마련됐다. 이는 전차가 러시아워 동안 유동인구가 많은 정거장에만 정차하는 방식으로, 전차의 운행회수를 늘려 승객의 이동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1940년 4월 1일 급행전차가 첫 운행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출·퇴근, 등·하교 시간에만 행했지만, 그해 8월부터는 하루 종일 급행으로 운행했다. 하지만 전시체제가 이어지면서 시설 확충이 불가능해진 전차는 또다시 ‘만원’ 상태가 됐다. 또 휘발유의 통제로 버스 운행마저 전면 중단되면서 전차도 불완전한 운행을 이어갔다. 이처럼 도시의 팽창으로 교통수요가 늘어났지만, 경성에서는 기동성을 앞세운 버스보다 여전히 전차가 집중 운행됐다.

해방이 되자 본격적인 인구이동이 시작됐다. 재조 일본인 87만여 명이 돌아간 자리에 귀환동포와 월남민들이 들어왔다. 해방 직전 100만 명에 달하던 서울의 인구는 해방 직후인 1948년에 170만 명이 됐다. 하지만 전차는 100여 대 정도만이 운행할 수 있었다. 해방 직전 150여 대가 다녔던 상황에 비하면 운행 가능한 전차의 수는 상당히 감소한 것이었다.

1947년 7월 경우 하루 평균 20여 대의 전차가 운행할 정도로 교통상황은 악화됐다. 원인은 해방 후 일본과의 국교 단절로 인해 전차 부속품을 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잡은 1947년 7월 미군정이 ‘민간원조물자’로 일본에서 부속품을 들여오면서 해결됐다. 그리고 1950년 6월6일에는 미국에서 중고전차 10대가 도입됐다. 이 시기 미국의 각 도시에서는 전차 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부분의 도시 시설은 파괴됐다. 전차도 차량 89대가 모두 불에 탔고, 나머지도 온전한 것이 없었다. 경성전기(주)는 1951년 5월부터 복구작업을 시작해 다음해에 일부 노선에서 전차 운행을 재개했다. 1953년 말에는 영등포까지 노선이 연장됐다. 이 무렵 전차의 부족한 차량은 일제전차가 아닌 미제전차로 보충됐다. 거리에는 일제전차와 미제전차가 뒤섞여 다니는 모습은 전차교통의 불완전한 상황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교통난 해소를 위해 등장한 급행전차

일제강점기 급행열차 모습. 119개 정류장 중 43개소를 통과했다.[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급행열차 모습. 119개 정류장 중 43개소를 통과했다.[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제부터 1인칭 시점 답사기다. 답사의 출발 지점인 기업은행 영등포지점에 이르기까지 다소 헤맬 정도로 영등포역은 복잡했다. 영등포에 오기 위해 한강 다리를 건넜으나 강남이라는 생각은 아니 들었다. 본격적으로 영등포 일대가 개발된 것은 전차 도입 시기와 맞물린다.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인천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이 영등포 지역의 발전을 이끌었다. 서대문까지 오가는 기차 또한 영등포를 지나치게 되면서 인력과 물자 모두가 몰려드는 공간으로 영등포는 부각되기 시작했다. 강남으로 일컬어지는 강남, 서초, 송파 3구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개발을 경험했지만 오늘날 영등포는 강남 아닌 강남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듯하다.

이제는 지도와 오랜 사진으로만 남은 옛 영등포의 모습에서 번영이 느껴졌다. 중공업이나 첨단 산업이 발달하기 이전인 1950년대 한국 산업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산업이라 할 수 있는 삼백산업(三白産業), 즉 면직물, 설탕, 밀가루 공장이 일대에 들어찼음을 알 수 있었다. 전쟁 직후 지닌 게 없어 원조에 의존적이었던 시기임을 고려한다면 딱히 생산 행위가 없었을 것도 같으나, 개개인에게 주어졌어야 할 원조품은 소수 기업의 성장을 이끄는 밑천으로 활용됐다.

노동 집약적인 가공 산업을 좇아 서울로 이주해 왔을 임노동자들의 처절한 삶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일방적인 희생이었다. 산업역군으로서의 제대로 된 대접을 기대하는 건 철없는 태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예의가 아닐 듯하나, 여전히 건재(?)함을 뽐내고 있는 영등포역 일대의 홍등가로부터 비루했을 지난 삶이 그려졌다.

기업은행 바로 옆 위풍당당함을 뽐내고 있는 신세계백화점 타임스퀘어점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붙은 상호는 신세계이나 이를 소유한 측은 이름도 낯선 ‘경방’이라 하였다. 경방은 원래 면직물을 생산하던 기업이었다. 섬유산업의 사양화에 따라 백화점 사업 분야에 진출했고, 1994년 영등포 공장 부지의 일부를 활용한 경방필백화점을 선보였다.

아무래도 백화점 운영 쪽으로는 경험이 부족했을 터. 주변에 신세계, 롯데 백화점 등이 입점함에 따라 경쟁력을 상실하고야 말았으니, 결국 신세계와 20년 장기 위탁계약을 체결해 현재에 이르렀다. 백화점 건물은 리모델링 등을 통해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였다. 사무동으로 사용되던 건물만은 여전히 남아 커피숍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뾰족하게 솟은 삼각 모형이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가옥을 연상시켰다. 층고를 높이고자 의도적으로 천장을 뜯는 일이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최근에 지어졌다 하여도 믿길 정도로 세련된 내부 모습이 놀라웠다.

전후 전차 부족으로 미군 전차 등장

한국전쟁 시 파괴된 전차로 인해 미제 전차를 수입해 운행했다.
한국전쟁 시 파괴된 전차로 인해 미제 전차를 수입해 운행했다.

영등포에 들어선 공장 중에는 맥주 공장도 있었다. 하이트맥주와 오비맥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대일본맥주(크라운맥주)와 기린맥주가 그것이다. 교통 요충지로 원료의 수급이 용이한 게 공장입지로 합격점을 받았던 걸까. 대일본맥주 공장 자리는 대우푸르지오 아파트 단지로 변신해 흔적을 찾기 어려웠지만 영등포공원에는 이곳이 기린맥주 공장 부지였단 걸 기억하기 위한 높이 3.5m짜리 조형물이 있었다. 경방필백화점과 마찬가지로 기린맥주 또한 사무동 건물이 남아 있었다. 도색을 새로 한 탓인지 영등포문화원이 사용 중인 건물에선 옛 흔적이 잘 읽히질 않았다. 역사를 알지 못한 채 이를 접했더라면 문화원 건물치고는 규모가 상당하다는 생각만을 하였을 듯하다.

어느 시점부턴가 전철과 평행선을 그으며 걷게 됐다. 신길역은 신길삼거리에 있었으리라 추정되며 대방역 위치는 현재와 비슷할 거란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적잖은 전차 노선이 지하철 노선으로 부활했음을 잘 알아서다. 70년대 계룡대 쪽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영등포에 있었다는 공군, 해군본부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본다. 두 본부 모두 이전이 잦았다. 공군 본부는 대구에서 대방, 대방에서 계룡으로 이전하였고, 해군 본부의 경우 진해에서 출발해 대전, 부산, 신길을 거쳐 계룡대로 옮겨갔다. 참고로, 신길동 일대에는 해병대사령부도 있었다. 현재는 이 또한 경기도 화성시로 이전한 상태다.

​군대 이야기를 흘려듣던 내 앞에 유한양행 사옥 건물이 등장했다. 유한양행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유일한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아선 안 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해 사업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고.

영등포 확장 후 전차 내리막길 걸어

영등포역 뒤쪽 도림동일대로 가운데 있는 큰 공장 부지에는 현재 영등포푸르지오 아파트 단지가 위치하고 있다. 과거 일제시대 기린맥주가 있던 곳이다.
영등포역 뒤쪽 도림동일대로 가운데 있는 큰 공장 부지에는 현재 영등포푸르지오 아파트 단지가 위치하고 있다. 과거 일제시대 기린맥주가 있던 곳이다.

서울을 도보형 도시에서 전차형 도시로 전환시켰던 최초의 대중교통 수단인 전차 노선이 1910년경 서대문에서 마포까지 연결되어 교통의 요지로서의 기능은 더욱 강화됐다. 노량진 일대에 수산물 시장이 들어선 건 해방 후의 일이다. 서울수산, 노량진수산, 삼호물산이 각기 운영해오던 것을 2000년대 들어 수협중앙회가 인수했다. 현대화 사업 결과, 가게 면적은 줄어든데 반해 임대료는 상승했다. 한동안 입점을 거부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

1960년대 이전의 학원 운영을 상상하기란 어려우나, 1960년대 정부의 사대문 밖 이전 명령에 따라 대일학원(서울역), 종로학원(충정로), 제일학원(신설동로타리) 등 학원 이전이 대거 발생했다고 한다. 대성학원, 정진학원, 한샘학원 등이 들어선 노량진은 한동안 재수생들의 성지(?)로 군림하였는데, 단과학원이 대거 대치동으로 이전한 후로는 각종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장소로 재탄생했다.

전차 노선에서는 조금 벗어나지 싶으나 마지막 장소로 사육신역사공원을 택했다. 방향을 잡아 걸어가다가 동작구에서 새로이 문화공간으로 조성한 근대하수박스를 구경했다. 정식 명칭은 노량진지하배수로. 1890년대에 설치된 구간과 1960년대 경부선 복선화 시 설치된 구간, 1970년대 수도권 전철화 시 설치된 구간이 나란히 있어 시대별 빗물과 오수의 배출 체계를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뒤늦게 검색으로 찾아낸 내용 중엔 버려진 땅으로 여겨 구에서 민간에 이 일대를 매각했는데, 이번 문화 공간 조성으로 사용료를 낼 처지에 놓였다는 기사가 있었다.

가파른 진입로 옆 사육신역사공원 안내 표지판이 놓였다. 그 옆으로는 조망이 좋은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판도 보였다. 한화 그룹에서 불꽃축제를 개최할 때 사육신역사공원 방문 인원이 가장 많다는 소리에서 뼈가 느껴졌다. 사육신의 묘는 의절사 뒤편이었다. 동편과 서편에서 각각 4개, 3개씩의 묘를 만날 수 있었다. 원래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이 있었는데, 1970년대에 김문기, 유성원, 하위지의 가묘를 만들었다.

집현전의 촉망 받는 학자에서 변절의 대가로 거듭난 신숙주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를 제 노비로 취하려 들었다는 이야기엔 치가 떨렸다. 세조의 권세에 힘입어 망나니와도 같은 인생을 산 홍윤성에 대해 알게 됐을 땐 혀를 내두르고야 말았다. ‘조선 세조 때의 신하이자 정치깡패, 연쇄살인마’라는 나무위키의 개요 부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참고문헌>
-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 최인영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서울 중구청 홈페이지

[문화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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