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도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 아카이브 단체인 문화지평은 2022년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지원사업으로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를 수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역사] 문화지평이 지난해 ‘옛 물길‘에 이어 올해는 ’옛 전찻길‘을 따라 서울을 속속들이 톺아보고 있다. 마지막 여덟 번째 답사로 지난 7월 10일 성심여대입구역에서부터 중구청까지 옛 돈암동선을 걸으면서 주변 역사문화, 수목생태, 산업관광 자원 등을 들여다봤다.

문화지평의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지원사업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 8차 답사는 김태휘 역사문화해설사가 해설을 맡았다. 김 해설사는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역사와 건축, 조경생태 분야 전문가다.

문화유산아카데미, 전국역사지도사모임 대표이며, 조선 왕릉과 골목길 해설 등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표석시리즈로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걷다’를 공저로 출간했다. 김 해설사는 이번 해설과 함께 5차 ‘황금정선(을지로선)+왕십리선’ 전찻길 해설을 담당했다.

교통난 원인제공으로 1968년 11월 전차 퇴장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김원봉 집 일대, 서울대학병원(옛 대한의원)에서 찍은 단체 사진.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김원봉 집 일대, 서울대학병원(옛 대한의원)에서 찍은 단체 사진.

전차는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시민의 발로 기능했다. 모든 노선의 차량이 승객들로 가득 찼다. 타는 것이 아니라 매달려 가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6·25전쟁은 가장 큰 결정타였다. 전쟁으로 인해 89대가 전소됐고, 일부 노선이 축소됐다. 영등포선이 복선으로 신설됐지만 서울의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쟁 이후의 복구로 차량 수는 해방 이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서울로 밀려들어오는 인구 증가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외국에서 전차를 수입하는 것도 그때뿐이었다. 도심 내 거주인구가 교외로 확장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도 필요했다.

전후 전차의 파괴로 여객량 감당이 어려워졌다. 이 시기에는 전쟁으로 고장 난 자동차와 폐차의 부속품을 모아 만든 자동차가 등장했다. 또 불하된 군용차도 재생자동차로 재탄생했다. 이러한 조립자동차들은 버스로, 또 택시로 외형을 바꾸어 거리에 등장했고 이러한 자동차의 수는 점점 많아졌다.

1955년 8월에는 군용 지프와 유사한 시발자동차가 국내 최초로 조립되어 생산됐다. 시발자동차가 시발택시로 공급되면서 1957년 서울에서 택시가 약 1500백대까지 늘어났다. 그러면서 전차교통은 사양사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궤도가 놓이지 않는 교외지역으로 버스와 합승택시가 다니게 됐다. 서울이 팽창하면 할수록 전차의 한계는 두드러질 뿐이었다. 차에 비해 속도가 늦은 전차는 자동차 교통의 혼잡을 야기해 도로의 걸림돌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전차의 수난시대였다.

특히 1963년 서울의 확장이 종전의 2배 이상 되면서 도심과 신편입지역을 연결할 교통수단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렇게 자동차가 증가하는 시점에서 도로교통을 저해하는 전차는 ‘구시대 유물’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운영비용이 많이 드는 애물단지였다. 이에 따라 전차를 철거해 도로 이용률을 높이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1966년 4월 김현옥 서울시장이 부임하면서 전차의 철거가 본격화 됐다. 그것은 김 시장이 부임 직후 발표한 주요 행정시책의 첫 과제가 ‘교통난 완화책’이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김 시장은 단기적으로 시내버스의 대량 증차, 합승의 대형화, 정류소 감축과 노선 재조정, 교통도로 건설, 지하도와 육교 건설 등 도시 내 수송력을 증대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전차 철거와 지하철 건설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서울시는 세종로 지하도 공사를 진행하면서 한국전력이 운영하던 전차사업을 인수했다. 결국 전차는 1968년 11월 29일, 모든 운행을 멈추었다. 서울시가 이 사업을 인수한지 2년만의 일이다. 마지막 전차가 동대문 차고에 들어갔다. 8시 12분 동대문에 도착한 마지막 전차 303호 차장은 “동대문 종점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목 메인 소리로 남아있는 승객 46명에게 안내를 마친 후 운전사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근대화의 첨병으로 인식되면서 이 땅에 처음 들어왔던 전차는 자동차 위주로 개편되어가는 도시교통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점차 여겨지게 됐다. 철거는 시간 문제였을 뿐이었다. 세종로 지하도 건설은 그 신호탄이었다. 서울시는 세종로 지하도 건설 단행을 위해 한국전력으로부터 전차 사업을 인수하고, 전차운행을 일부 중단시키며 전차의 철거 수순을 밟았다. 1899년부터 70년간 시민의 발이었던 전차는 그 여정을 다하게 됐다.

이후 서울의 교통 혼란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수준이 됐지만 수도권 전철화 사업이 추진됨으로써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과 경원선(용산~성북), 경부선(서울역~수원), 경인선(구로~인천) 전철이 개통됐다. 서울의 도시교통은 지하철과 버스가 중심이 됐다.

전차 사라진 자리 지하철과 버스가 대체

전자를 비롯한 버스, 택시 노선이 수록된 교통 안내도다(1966년). 전차가 교통난 해결을 하지 못하자 버스가 점차 그 자리를 채워갔다.
전자를 비롯한 버스, 택시 노선이 수록된 교통 안내도다(1966년). 전차가 교통난 해결을 하지 못하자 버스가 점차 그 자리를 채워갔다.

전찻길을 따라 걷는 마지막 여정을 앞두고 있는 날, 적잖은 사람들이 성신여대입구역으로 모여들었다. 중구청까지 돈암동선을 걸을 차례다. 어찌 보면 짧은 듯도 하지만 공간마다 서린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보면 3-4시간은 훌쩍 흐르기 마련이다. 걷는 데는 나름 자신이 있으나 날이 뜨거우니 마음을 단단히 먹을 필요가 있다.

이날 출발 지점은 성신여대입구 1번 출구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빤히 보이는 곳에 한 때 철학관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점집일 곳들이 대거 들어찼던 미아리고개가 보이는 그 곳에 서서 슬픈 역사를 접한다. 타자의 짓밟음은 가깝게는 한국전쟁,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병자호란 무렵으로 시초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고개를 넘어 한양도성으로 진격했을 오랑캐의 모습과 남으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의 모습, 어느 쪽도 가히 아름답지는 않았을 듯하다. 아름다운 전쟁은 없으니까.

실제 성신여대는 한국전쟁 당시 고위인사의 학살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전쟁의 끔찍함이 보다 더 생생히 와 닿았다. 집결 장소와 맞닿은 올리브영 건물은 돈암동선의 종점으로, 전차 사무소가 위치했던 곳이라고 했다. 돈암동선은 1941년에서야 놓였다. 종로4가에서 창경원까지 전차 운행이 시작된 게 1910년의 일이요, 1915년에는 종로4가에서 본정이라 불렸던 충무로 일대까지 전차 노선이 놓였음을 고려하면 꽤나 늦은 일이다.

1936년 돈암동 택지개발 사업을 진행하며 비로소 전차 노선 놓는 것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진 점도 있긴 하지만, 1928년 도입된 버스와의 경쟁이 전차 노선의 추가 도입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일본인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야 했던 점도 왠지 이 구간의 전차 노선 도입을 좌지우지했던 요소였을 것 같다. 대한의원 일대까지 놓인 노선을 ‘총독부의원선’이라 일컬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일제 치하에서 이루어진 개발의 순수성에 대한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서울미래유산인 1958년 영업을 시작한 태조감자국을 지나 스치는 성북구청의 통유리 건물이 무척이나 더워 보인다. 성북천 건너편에서 나는 돈암동 성당이 있다. 성당하면 유심히 관찰하게 되는 스테인드 글라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한국노트르담수녀회의 김겸순 마리 테레시타 수녀님의 작품이라 했다. 수녀회도 하나의 작은 사회인 듯 그 안에 보직이라는 게 있는데, 김겸순 수녀님은 토목 분야를 담당하는 수녀님이라고 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상의 성모상도 접했는데, 이는 길상사의 관세음보살상을 만든 최종태 님의 손길이 빚어낸 작품이다.

뾰족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은 십자가는 예배당이 전형적인 고딕 양식을 취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 아래 놓인 종을 직접 치는지 여부를 두고 잠시 설왕설래했다. 이 곳 돈암동 성당만이 종을 직접 친다, 아니다, 아현성당에서도 직접 종을 친다에서부터 시작해 종 치는 회수에 이르기까지, 궁금증은 계속해서 생겨났으나 이에 대해 명확히 답해주는 이가 없었다.

2010년경 조성됐다는 성북천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걸었다. 들려오는 물소리에 더위가 잠시 밀려나는 것도 같았다. 대다수의 하천이 건천인 우리나라다. 성북천을 비롯한 다수의 하천은 지하철 등의 밑에 흐르는 지하수를 끌어 올려 공급함으로써 끊이지 않게끔 관리를 받고 있었다. 다시금 도로를 따라 걷다가 비교적 최근에 설치했지 싶은 표지석을 하나 만났다.

동활인서터. 신당동 떡볶이 타운 쪽을 걷다가 동활인서에 대한 이야기를 분명 들었는데 왜 표지석이 여기에 놓인 건지. 알고 보니 이곳에 있던 동활인서가 후에 신당동 쪽으로 이전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하면 지금과 비교해 매우 미천했을 것만 같은데, 내의원-전의감-혜민서-활인서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의료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한다. 활인서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기관이었다.

창경원 관광과 병원 다니던 옛 총독부의원선

대한의원은 1899년 내부병원으로 개원, 이듬해 광제원, 1907년경 대한의원이 됐다. 경술국치 후인 1910년 9월말엔 조선총독부의원이 됐고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이다. 옛 모습과 현재 모습. 외관은 명칭만큼이나 큰 변화는 없다.
대한의원은 1899년 내부병원으로 개원, 이듬해 광제원, 1907년경 대한의원이 됐다. 경술국치 후인 1910년 9월말엔 조선총독부의원이 됐고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이다. 옛 모습과 현재 모습. 외관은 명칭만큼이나 큰 변화는 없다.

조소앙집터를 향하는 길, 한 블록 즈음 떨어진 큰길가의 버스정류장 명칭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조소앙활동터’. 언제부터 이와 같은 명칭이 병기됐던 거지? 눈여겨보지 않았으므로 몰랐다. 모든 걸 다 아는 건 불가능하다지만, 왠지 이번에는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그곳으로부터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조소앙집터가 있었다. 아니, ‘터’ 아닌 실제 집이었다.

기둥이 처마 위로 높이 솟아 있어 더욱 그러했을지도. 선생은 1950년 5월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에 출마해 무려 3만4000표를 얻으며 전국 최다 득표자로 국회에 당당히 입성했다. 당시 경쟁 상대는 우익세력의 거물 중 거물이라 할 수 있는 조병옥이었다. 씁쓸하게도 얼마 후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조소앙 선생은 납북돼 우리의 역사에서 지워졌다. 선생이 주장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화, 즉 삼균주의가 우리사회에 안착했더라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대한민국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길 건너편 나폴레옹제과점이 눈에 들어온다. 1968년 영업을 시작했다 하니 오래된 건 맞지만, 제과 제빵 분야의 사관학교 마냥 이 분야 유명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했다는 소리는 이날 처음 들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빵집 중 하나인 군산 이성당 이야기도 살짝 나왔다. 이성당하면 단연 팥빵을 으뜸으로 치는데, 전국 제과점의 균일한 팥빵 맛의 비밀이 이성당 팥을 사용해서라 하니 왠지 더 대단하게 여겨졌다.

성북구를 벗어나 종로구에 접어든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아야 하는 위치에 혜화문이 우뚝 서 있었다. 본디 이름은 흥화문. 일제는 개발을 이유로 우리의 많은 것들을 파괴했다. 전차 노선의 복선화로 철거가 불가피했다고는 하지만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때 전혀 다른 위치에 혹은 전혀 다른 모양새로 복원된 문화재들을 볼 때마다 아쉬움을 크게 느낀다.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안내 센터가 근처에 있어 잠시 들렀다. 개인주택에서 대법원장 공관을 거쳐 서울시장 공관으로, 그리고 현재의 모습으로까지의 변모 과정은 이 공간의 역사이자 서울의 역사와도 같아 보였다.

얼핏 보아도 세련된 건물이 두 채 등장했다. JCC크리에이티브센터라는 이름이 낯설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재능교육 빌딩이 이 건물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듯도 했다. 예술적 열정, 창의적 생각 그리고 교육적 사고.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중시한 세 가지 정신이라고 했다. 노출 콘크리트 재질에 직선을 곧잘 쓰던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독특하게도 이 건물에 만큼은 사선을 과감히 도입해 지금의 모습을 창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관공서라는 혜화동 주민센터와 몇 차례의 앞선 답사 시 스쳤던 문화이용원 앞을 이번에도 지나쳤다. 길이 굽은 게 옛 물길이었음을 알 수 있는 성대입구 뒷길로 접어들었다. 현재는 종로구육아종합지원센터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에 앙증맞게 놓인 사섬시터 표지석의 내용을 읽는 것을 끝으로 이제부터는 지하철 4호선이 뻗은 방향과는 결별하고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국립어린이과학관을 지나치며 경모궁 이야기를 들었다. 창경궁 돌담길의 낭만적인 풍경 뒤에 서린 서러움이 낯설었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 경모궁이었다. 정조가 경모궁으로 행차할 때 드나들던 문은 매달(月)마다 경모궁에 찾아뵙겠다(覲)는 의미의 월근문으로 불린다. 사도세자, 정조 모두 떠나고 없지만 아직 그의 정신이 깃든 공간들은 이처럼 우리 곁에 남아 있었다.

일인들 관광과 병원 가던 전차가 신거주지로 확장

서울 마지막 전차 운행 소식을 전한 기사(동아일보 1968년 11월 30일자).
서울 마지막 전차 운행 소식을 전한 기사(동아일보 1968년 11월 30일자).

서울대학교 병원 안 대한의원 터 근처에서 다들 한숨을 고르게 됐다. 대한의원은 1899년 내부병원으로 개원했으며, 이듬해 광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07년경 대한의원이 됐다. 경술국치 후인 1910년 9월말엔 조선총독부의원이 됐는데, 이것이 오늘날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이다. 대한의원본관 건물 정면에 이르자 종두법을 도입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지석영 선생의 동상이 나타났다. 선생은 대한의원의 초대 병원장이었다.

지금은 재개발 중이라는 예지동 시계골목 쪽을 아련히 응시한 후 광장시장을 관통했다. 화약을 제조하는 염초청이 있었다는 곳을 지나 마전교 방면으로 향했다. 소와 말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었다던데, 이제는 명칭에서만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음이 아쉽다. 아는 사람만이 살필 수 있지 싶은 위치에 관우사당이 있었다. 겉에서는 보이는 게 없어 맞닿은 건물 2층에 올라갔다. 동묘 쪽 사당에 비하면 규모가 매우 작았다.

이제는 사라진 방산국민학교 터에 자리한 방산시장은 여느 시장과는 달랐다. 한 때 미군의 보급품이 많이 거래됐고, 현재는 인쇄, 포장 분야 전문 시장이라 했다. 저만치 N타워가 보인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예전 답사 때 되짚었던 앵정소학교 방면으로 흘렀다. 지금의 덕수 중학교 자리가 바로 앵정소학교 자리다.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는 명칭도 소학교요, 6년제인데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는 보통학교로 4년제였다. 기초 교육에서부터 이렇게 차등을 두었으면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일하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려 들었으니, 식민 치하에서 일제의 기만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오장동 함흥냉면거리가 등장했다. 냉면거리라는 명칭이 민망하게도 현재 보이는 냉면집인 달랑 두 곳뿐이었다. 그 중 한 곳은 1953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고 하니 그 역사가 무려 70년에 달한다. 여기서 마무리를 지을까 하다가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기왕이면 전차의 마지막 지점까지 가 보는 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현 을지로4가에 해당하는 황금정4정목을 지났다. 여기가 어디 즈음일까 위치 가늠이 쉽지 않았는데 제일병원 이야기를 들으니 대강의 방향이 파악됐다. 제일병원은 1963년 개원한 한국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으로, 매년 첫 번째로 탄생한 아가의 소식을 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아이를 낳지 않는 저출생 시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2021년 폐원하고야 말았다. 조만간 힐스테이트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하니 예전의 모습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나 존재하게 될 듯하다.

이윽고 중구청 건물이 등장했다. 붉은 기운을 가득 머금은 현수막이 내걸린 게 수장의 소속 정당이 어딘지를 말해주는 듯하였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관공서 건물치고는,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던 것일 수도 있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전차는 무슨 의미일까. 너도 나도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일이 보편화된 요즘, 대중교통이 지닌 힘은 정녕 퇴색되었다 말해도 좋을까.

이렇게 8차에 걸친 ‘옛 전찻길을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 답사가 마무리됐다. 불과 110년 전 생겨나고 50여 년 전 사라진 전차가 바꾼 우리의 일상과 도시의 확장을 생각하면서 전찻길로 인해 훼철된 역사적인 문화재와 전찻길 주변에 쌓기고 사라진 역사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다. 전찻길 답사는 같은 노선을 분야별로 나눠서 답사해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또 이번에 돌아보지 못한 다른 노선도 이어서 답사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면서 답사기를 마친다.

​<참고문헌>
-서울지역 전차교통의 변화양상과 의미(1899~1968), 최인영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서울의 전차, 서울역사박물관, 2019
-서울 중구청 홈페이지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역사문화 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옛 전찻길 따라 시공간을 잇는 서울 역사(2022),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근대건축 테마답사(2022), 조선왕릉 40기 프롬나드(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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